89화. 올림푸스 (2)
“마왕! 환영하네!”
아레스가 양팔을 벌리며 다가오려는데… 그를 밀치고 수많은 여성들이 쏟아져나왔다.
“존함, 많이 들었습니다.”
“강하시다고요? 강한 남자 내 취향인데~ 우훗.”
“잘생기셨다~”
‘뭐야, 이건.’
보아하니 아레스가 준비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보통 인간과 다른,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여신들이 이현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별안간 시작된 육탄 공격에 이현은 얼이 빠졌다.
옷 사이로 마구 손이 들어오며 몸을 만져댔다.
“우와! 단단해!”
“어머, 이 근육 결 좀 봐.”
“꺄아!”
일단 여기를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 어어. 됐고. 잠깐들 비켜주지? 응?”
더 이상 손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머니에 손을 딱 꽂고 아레스의 앞에 서자, 아레스가 왠지 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자네… 기만자였군.”
얘는 또 뭔 소리야.
이현이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는데, 갑자기 엉덩이를 징그러운 손길이 슥 스쳤다.
홱 돌아보자 엉덩이를 만진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꺅! 눈 마주쳤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이현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연회는 언제야?”
“내일 점심이라네.”
그럼 내일 왔어도 됐잖아…….
뭔가 짜증이 났지만 이현은 꾹 눌러 참았다.
키르단에서도 손님을 하루 전에 초대해 융숭히 대접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그때까지 구경 좀 할 수 있나? 아까 위에서 보니 풍경이 제법 괜찮던데.”
물론 핑계고 진짜 목적은 정탐이다.
지구에 시도 때도 없이 게이트를 여는 것이 이놈들과 관련이 있다면 그건 누구 하나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떤 기관, 기구가 있을 테니… 그걸 찾는다.
“오, 그런가? 그렇다면 이 몸께서 절경으로 안내해주도록 하지!”
가슴을 떵떵 친 아레스가 안내를 시작했다.
‘단순한 놈이군. 길가메시랑 잘 어울리겠네.’
그때 아레스가 그에게 얼굴을 기울이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응?”
팔꿈치가 옆구리를 툭툭 친다.
“어떻게 해야 여성에게 인기가 많아지나? 비법 좀 가르쳐주게.”
이현이 눈썹을 모았다.
딱히 여성을 신경 쓴 적도, 인기를 얻으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어서 그의 질문이 좀 황당했다.
방금 여자들 때문인 것 같은데…….
“비법…까지 필요한가? 그냥 얘기하다 보면 친해지고 그러잖아?”
쿠르릉.
아레스의 머리 뒤로 번개가 쳤다.
이 녀석, 번개의 신이었나?
* * *
저녁이 될 때까지 올림푸스 관광을 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기껏해야 알아낸 사실은 제우스와 열두 신들이 머문다는 궁에서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는 정도.
하지만 그 정도로는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기가 부족했다.
‘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안내받은 숙소는 별에 감싸인 것 같은 궁전.
다른 궁전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통 사람이었으면 오가기도 힘들 거리.
하지만 거리가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좋다.
느긋하게 목욕을 즐긴 이현이 허리 아래 수건을 두른 차림으로 침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암살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좀 대놓고 기척을 풍기고 있기는 한데.
침실로 들어가자 고혹적인 미성이 그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
반쯤 헐벗은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환한 금발에 누구나 매혹당할 만한 완벽한 미모.
글래머러스한 몸매.
방에 가득 퍼진 달콤한 향취가 매력을 돋운다.
이현은 협탁에 올려놓은 상자를 한 번 흘끔 보았다.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누구?”
그녀가 금발을 우아하게 넘긴 후 말했다.
“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라고 해요.”
“그런가? 숙소를 잘못 찾은 것 같은데.”
“아뇨. 전 정확히 찾아왔답니다. 당신을 찾아온 것이거든요.”
“날… 왜?”
아프로디테가 발끝을 모으고 허리를 요염하게 틀며 물었다.
“여자가 야심한 시각에 홀로 남자의 방을 찾을 이유… 그게 어디 여럿 있을까요?”
“암살, 치정 모의, 술주정?”
아름다운 얼굴에 잠깐 당혹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소문보다 재밌는 분이시네요. 그렇게 서 있지 마시고… 더 재밌게 노는 건 어때요?”
“아냐, 됐어. 놀기엔 피곤하거든. 혼자 있고 싶은데. 나가주지?”
스스로 미의 여신이라 자부할 만큼 매력적인 여성임은 분명하지만.
누가 봐도 수상쩍은 상황 아닌가?
성욕에 미친 것도 아니고, 이런 함정에 걸려들었다가는 부하들에게 쪽팔려서 얼굴을 못 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내 취향 아니야.”
여태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던 아프로디테의 얼굴에 쩍 균열이 갔다.
* * *
올림푸스의 연회장.
상아로 만든 듯 하얗게 빛나는 조개 모양의 거대한 공간이다.
조개의 가장자리를 따라 탁자와 의자가 배치됐고.
올림푸스의 열두 성좌를 비롯해 수많은 성단의 성좌들이 모여 앉았다.
제우스는 다른 성좌들에게 들키지 않게끔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아니, 우리 애가 어디가 모자라서?”
누가 들으면 극성 학부모 같은 말이지만 제우스가 가리킨 ‘우리 애’는 아프로디테를 칭하는 말이었다.
이를 아는 헤라도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취향이 아니라고…….”
“미의 여신이?”
아프로디테라고 하면 그 미모만으로 다른 성단에서 꼬리를 흔드는 성좌를 만드는, 올림푸스 제일의 미녀.
게다가 단순히 미모뿐만이 아니라 그녀에게는 성좌에게도 통하는 매혹의 힘이 있다.
발성, 교태 등 다양한 면에서 유혹이 발휘되어 상대로 하여금 이상의 여인처럼 보이게 만든다.
남자라면 거부할 수 없는 수준의 강력한 매혹인데…….
“혹시… 게이?”
스킬도 거부할 수준이라면 역시 남다른 취향을 지녔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잠시 천장을 보던 제우스가 속닥였다.
“…그, 동물 좋아하는 취향도 있잖아.”
헤라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당신처럼?”
“아니, 여보… 왜 화살이 나한테 향해?”
“흥! 됐어요. 아무튼 아프로디테는 충격받아서 지금 요양 중이라, 연회에는 못 나오겠대요.”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다. 제우스는 이마를 짚었다.
“끙… 만만치 않군. 다른 성단 놈들이 눈독 들이기 전에 올림푸스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이현처럼 강대한 전력이 다른 성단에 넘어가면 큰일이다.
이미 아스가르드를 포함해 다른 여러 성단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가 다른 성단에 합류하기 전에 올림푸스로 끌어들이려고 했건만.
“마왕님이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정장 차림의 이현이 걸어 나왔다. 깔끔한 포마드에 정장 차림으로, 겨드랑이에는 상자 하나를 낀 채였다.
그가 상자를 내려놓았다.
“자, 초대 선물.”
발로 상자를 툭 치자 뚜껑이 열렸다.
안에 들어 있는, 비명을 지르는 표정을 보고서 제우스의 얼굴이 굳었다.
“으음.”
“이럴 수가…….”
“아, 아니… 대체…….”
좀비의 신인 바롱 삼디는 그 까다로운 능력과 강력한 군세로 올림푸스를 견제하던 파벌의 일각.
결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군대도 없이 부하와 단둘이 상대했다고 하니…….
이미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그 목을 보니 놀라웠다.
‘이현… 끝을 알 수 없는 자로군.’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성좌들은 새파랗게 질린 상태.
다시금 아프로디테가 그를 유혹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많다. 천천히 공을 들인다면 충분히 그를 끌어들일 수 있겠지.
제우스는 평정을 다스리고 일어났다.
“귀한 선물, 고맙군.”
제우스의 손짓에 아름다운 시녀가 나타나 머리 상자를 들고 뒤로 사라졌다.
이현의 눈이 잠시 시녀의 등을 쫓았다.
“자, 자리를 마련했으니 어서 앉으시오.”
제우스가 마련한 자리는 바로 그의 옆이었다.
게다가 의자의 질도 제우스 본인의 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스가르드의 오딘이 애꾸눈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친형제를 죽인 놈을 저리 우대하다니. 제우스도 한물갔군.”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곳에 작은 목소리 정도를 듣지 못하는 신은 없다. 이현이 피식 웃고는 오딘을 바라봤다.
“꼽냐?”
“뭐?”
“꼽냐고. 꼬움 너도 덤비든가. 아주 일리단을 만들어줄게.”
일리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기분 나쁘다.
오딘도 나름 한 성단의 주신. 그 힘이나 나이가 제우스 못지않은데…….
오딘이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창, 궁니르를 소환하고 벌떡 일어났다.
“네놈이 아주 방자하게 구는구나! 잡신 몇 해치웠다고 감히 내게 대드는가!”
제우스가 발끈해 일어났다.
“잡신이라니! 지금 우리 올림푸스의 신을 모욕하는 겐가!”
하데스가 강하다고 해야 그를 해치운 이현의 주가도 오르고 올림푸스도 면이 서니, 올림푸스의 신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여기저기서 신들이 벌떡벌떡 일어섰다.
그때 한 여신이 나섰다.
아스가르드의 프레이야였다. 은발에 초록색 눈을 가진 그녀는 아프로디테만큼이나 아름다웠으나 요염하기보다는 우아한 매력을 풍겼다.
“잠시만요. 새 성좌를 맞이하는 귀한 자리에서 이 무슨 추태십니까. 다들 진정하시죠.”
프레이야가 하늘거리는 치마를 잡고 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스가르드를 대신해 제가 사과드립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시지요.”
이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지 뭐. 나라고 싸움광은 아니야.”
“감사합니다.”
* * *
이현이 가져온 바롱 삼디의 머리는 시종의 손에 들려 어떤 방에 도착했다.
시녀는 마치 더러운 오물이라도 만진 것처럼 상자를 책상에 내려놓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바롱 삼디는 추하고 더러운 괴물로 악명이 높았다.
시체를 되살리고 조종하는 그 능력이나 추한 외모 모두 혐오의 대상.
심령 스팟에서 머물기 싫듯이, 괜히 만져서 득 볼 것이 없다.
시녀가 문을 닫고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덜컥.
상자의 뚜껑이 저절로 움직였다.
덜컥덜컥.
뚜껑이 스르르 밀려 떨어지고.
바롱 삼디의 머리가 상자 안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목 아래에서 푸른 점액이 일렁이는 중.
점액이 머리의 단면에서 콸콸 쏟아졌다.
쏟아진 액체가 바닥에서 뭉쳤다.
그리고 푸른 슬라임, 크루엘이 나타났다. 액체 한 줄기가 쏘옥 튀어나와 땀을 닦듯이 머리 부분을 훔쳤다.
“휴우. 드디어 내 차롄가. 척추 빠지는 줄 알았네.”
외부를 탐색했으니 이제 내부 차례.
그러나 이현이 내부를 탐색하려고 하면 분명히 걸릴 것이다.
올림푸스가 그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을 터.
그래서 이현은 바롱 삼디의 머리에 크루엘을 숨겨 데려왔다.
크루엘의 능력은 하데스만큼이나 정탐에 특화되어 있다. 변장이 가능하니 어떤 면에서는 더 유용하다.
기묘한 힘이 집중된 장소를 알았으니 이제 가서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도 빈이 보고 싶었는데.’
주운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주군을 닮은 아이. 게다가 느껴지는 힘도 비슷했다.
이유가 있을 터.
돌보는 척 검사도 하고, 연구도 해보고 싶다…….
크루엘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문틈으로 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