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올림푸스 (1)
빈이가 손바닥으로 열심히 버튼을 눌렀다.
문양이 그려진 버튼들인데, 누를 때마다 목소리가 나왔다.
―나비!
―구름!
빈이가 버튼을 누르며 따라 했다.
―나비!
“나비.”
―구름!
“구음!”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제법 신중한 얼굴로 따라 한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이현은 헤벌쭉 웃으며 빈이를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아는 단어가 백 개도 넘었는데 어설프게나마 짧은 문장도 구사했다.
‘우리 빈이가 연예인을 하는 건 학계에 손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켜보는 중 베요네타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어때?”
―네, 폐하. 말씀하신 지점에 가서 확인해보았습니다만 잔류 마력을 분석해보니 폐하의 거처와 반대 방향으로 간 흔적이 포착되었습니다. 지금은 다른 곳을 돌아다니고 있고요. 소녀의 의견으로는… 관광 같습니다.
“그래? 그럼 됐어.”
갑자기 서울 한복판에서 강력한 힘이 느껴져 베요네타를 보냈는데…….
별일 아니었나 보다.
‘신들이라는 놈들도 관광을 오나?’
―그… 근데요, 폐하. 소녀가 둘러보니 이 서울이라는 곳이 참 구경하기 좋더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사옵니까? 한번 나오셔서 커피라는 음료도 한잔하시는 것이…….
“아, 바빠서 미안. 너도 얼른 돌아가.”
뚝.
전화를 끊은 이현은 갑자기 나타난 강력한 힘에 대해 깨끗이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날 저녁.
딩동.
전날 느꼈던 것과 유사한 힘이 문 앞에 나타났다.
“누구지?”
“크흠! 올림푸스의 아레스요!”
잉?
이현의 얼굴이 굳었다. 올림푸스라면 전에 이런저런 합의를 본 그곳 아닌가.
아레스라면 유명한 전쟁의 신이고…….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싸움을 걸러 왔나?’
아니, 그럴 생각이었으면 아파트째로 폭격하거나… 다른 방법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경계는 해야겠군.’
크루엘과 이현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온갖 마법 덕에, 지금 빈이의 방은 설령 지구가 멸망해도 홀로 형태를 온전히 유지할 만큼 강력한 힘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빈이를 방에 들여보낸 이현이 문을 열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서로가 서로의 모습에 당황했다.
‘이놈이… 아레스?’
‘이놈이… 마왕?’
아레스는 폐가를 수학여행지로 착각하고 뛰어놀다 온 고등학생 같은 모습.
이현은 어제부터 밤을 새며 원준과 게임해서 머리는 떡이 지고, 늘어진 셔츠를 입은 모습.
서로가 서로를 불신의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그대가 마왕인가?”
“엉. 우리 집엔 무슨 일로? 참고로, 종교 권유나 동냥은 사절이야.”
아레스가 활짝 웃었다. 마왕 본인임을 확인한 이상 더 거리낄 것 없지.
“직접 보게 되니 반갑군! 나, 당신 팬이야! 내가 당신 덕에 성소도 많이 따고 아주 좋았어! 아, 들어가서 얘기할까?”
“그건 좀…….”
문전박대를 당하니 자존심이 좀 상한다. 아레스의 눈가가 떨렸다.
그러다 이현의 시선이 자신의 몸에 있음을 깨달은 아레스가 다급한 어조로 변명했다.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이 몸은 전령이 맞아! 이 차림새에는 슬픈 사정이 있네!”
이현이 그를 위아래로 훑고는 말했다.
“그래 보여.”
딱하다는 눈빛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오해만 깊어질 꼴!
“난 전령으로서 왔네.”
아레스가 꾸깃꾸깃한 양피지를 들었다.
“이걸 보게!”
“아.”
확실히 본 적이 있는 물건.
이현의 반응에 아레스가 안도했다.
“크흠. 알았지?”
양피지를 받아 든 이현이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그래서, 이게 뭐 하자는 거지?”
“초대장일세.”
아레스가 가슴을 팡 때렸다.
“올림푸스에서 성좌들을 위한 연회가 열릴 예정인데 자네를 초대하네. 거대 성단들이 모이는 크나큰 축제지! 마음에 들 걸세!”
올림푸스를 중심으로 지구를 감시, 관리하는 성좌들이 한데 모이는 연회.
원래는 거대 성단, 그중에서도 강력한 자들만이 모이며 새 성좌의 입회에는 기존 회원들의 심사를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이 달렸다.
그러나 이현에게는 모든 조건을 무시하고 초대장이 날아간 것이다.
올림푸스가 그를 특별하게 대우하고 있다는 뜻.
하지만 이현은 심드렁했다.
“그래? 거기서 날 왜 초대하지?”
“…응?”
제우스는 이현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말할 순 없다.
아레스는 잠깐 당황했다가 말을 이었다.
“우호를 다지기 위해서네!”
“우호? 별로 안 다져도 되는데.”
귀찮다. 아레스는 또 당황했다.
여태 이런 반응을 보인 놈은 이현이 처음이었다.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될 거네! 술! 여자! 뭐든지 있지!”
“거, 무슨 쌍팔년도 멘트냐. 용건 끝났으면 닫는다?”
“자, 잠깐! 초대장에 기록된 날, 정오에 마차가 갈 것이네! 그때까지 준비해두게!”
“어, 어. 수고하쇼.”
쿵.
문이 닫혔다. 아레스는 안절부절못했다.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 * *
서울 한복판의 거대한 간판에 이현과 빈이의 모습이 걸렸다.
유모차에 앉아 좋아하는 빈이와 그런 빈이를 바라보는 이현.
아동복 광고 같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며 희수가 중얼거렸다.
“저렇게 잘되시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네…….”
그때 사장이 그녀를 불렀다.
“야! 희수… 하니야! 여기 와 봐!”
“아, 넵!”
이현이 방송에서 하트캔디를 홍보해준 후 바로 이튿날 세 개의 광고대행사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그중 하나인 홍삼캔디를 홍보하러 온 날.
하필 왜 홍삼캔디냐 하면 하트캔디와 홍삼캔디가 잘 맞는다나…….
홍삼캔디 회사 사장이 젊은 피를 수혈한답시고 정한 방책인가 본데,
별로 공감은 안 가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들어온 광고.
희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사실 며칠 전에는 자괴감도 들었다. 그렇게 열심히 할 때는 아무런 제의도 안 왔는데 이현이 언급해주자마자 제의가 들어오다니.
노력해봐야 아무 소용없고, 다 인맥의 힘… 타고난 것이 전부 같았다.
그 마음을 오빠인 남우에게 전화로 털어놓자 곰곰이 생각하던 오빠가 말했다.
―오빠도 항상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근데 요즘에는 다르더라.
“어떻게?”
―재벌집 아들로 태어나도 도박으로 패가망신하거나, 예쁘게 태어났는데 사고를 당하고… 사실 다 운이지.
“결국 우린 재수 없다?”
―프흐흐. 그런 불운 속에서도 행운을 붙잡게 해주는 게 노력인 것 같아. 인맥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너랑 내가 이현 씨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현 씨가 홍보해주신 거잖아?
“으응.”
―네가 착하고 성실하지 않았으면 이현 씨 마음에 들었겠어? 인간적으로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으니 우리한테 잘해주시는 거지.
“그런…가?”
―항상 주변 사람들한테 잘해주고, 착하게, 성실하게 사는 게 다 나한테 돌아오는 거야. 아니지… 이러면 너무 속물 같나?
“응.”
―에이! 어쨌든 사람들한테 잘해줘서 나쁠 게 뭐 있어?!
착해서 가끔은 바보 같기까지 한 오빠의 말이지만 실제로 이현은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그들을 도왔다.
괴물들에게 납치당했을 때 구해주었고, 어머니도 치료해줬다.
그들 가족에게는 그 빚을 갚을 만한 아무런 힘도 없는데.
‘꼭 산타클로스 같네.’
“희수야!”
사장님의 고함.
놀란 희수가 쳐다보자 사장님이 멤버 두 명의 손을 잡고서 패딩 차림으로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희수야! 도망쳐!”
“…예?”
콰장창!
그때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홍보하기로 했던 빌딩의 유리창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쾅! 콰직!
끔찍한 소리가 나는데…….
그르륵.
그어어.
피투성이가 되어 뼈가 튀어나온 사람들.
일부는 팔다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찢어진 피부 사이로 피를 뚝뚝 흘렸고,
심하면 뇌가 보이거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자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미노타우르스나 악어 머리를 한 인간, 온갖 기괴한 생물들이 마찬가지로 시체나 다름없는 몸 상태로 움직였다.
“이… 이게 뭐야.”
아직 어리지만 온갖 고난을 겪으며 어지간한 일에는 무감각해졌다고 자부하는 희수도 그 끔찍함에 발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달려온 사장이 그녀를 재촉했다.
“게이트야! 희수야! 도망가자!”
“게… 게이트요?”
하필이면 처음 광고를 받은 방송사에 게이트라니!
쿠르릉!
“건물 안이요?”
“아냐!”
사장이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암적색으로 물든 하늘.
사악한 존재가 지구를 훔쳐보기 위해 뚫은 것 같은 구멍이 보였다.
오한이 전신을 때렸다.
위잉위잉!
챙그랑!
“아악!”
“꺄아악!”
“괴, 괴물이다!”
사방에서 차량의 경보음과 유리창 부서지는 소리 등이 들려왔다.
서울 한복판에 지옥이 펼쳐졌다.
“희수야! 얼른 차에 타!”
빠앙!
경적 소리에 희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재빨리 차에 타 안전벨트를 매기가 무섭게 사장이 액셀을 밟았다.
끼이익!
도로에 올라탄 순간, 기괴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
―흐흐흐흐… 같잖은 올림푸스 놈들… 이 바롱 삼디께서 네놈들의 생각대로 움직이지는 않으리라…….
근원을 찾을 수 없는 목소리에 희수는 몸이 떨렸다.
무섭다.
그냥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오한이 스미며 모공까지 얼어붙는 기분.
예전에 그녀를 납치했던 뱀파이어보다도 훨씬 무시무시한 무엇인가가 벌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희수는 재빨리 핸드폰을 켜서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이현.
‘언제든 연락해’
그렇게 말하며 가르쳐준 번호.
아마 지금은 한창 아혼살 촬영 중이겠지만 한시가 촉박한 상황. 물불 가릴 틈이 없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이라도 이현이라면 분명 어떻게든 해결해줄 것이다.
금방 이현이 전화를 받았다.
―예. 여보세요?
희수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오빠! 저 지금 여기…….”
“으악!”
그때 사장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비명을 질렀다.
신호를 무시하고 갑자기 쏟아져 나온 차들로 도로가 막힌 것이다.
갑자기 앞에서 두 대의 차가 추돌하며 앞을 막았다.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트니 차가 스핀하는데…….
원심력으로 희수의 손에서 핸드폰이 빠져나갔다.
“꺄아악!”
“안 돼!”
“아악!”
차의 옆을 승용차 한 대가 들이박았다.
쿠웅!
“꺄악!”
벤이 종이상자처럼 밀려나 서 있던 다른 차와 추돌했다.
이어지는 충격.
안전벨트 덕에 튕겨나가지는 않았지만 낡은 벤이 탱크도 아니고, 방어력이 좋을 리가 없었다.
콰앙!
온몸을 울리는 충격에 희수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