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아빠는 혼자 살더라 (1)
신화 속 장엄한 전투를 그린 천장화.
황금 갑옷을 입고 불타는 검을 든 붉은 눈의 남자가 벌레를 닮은 괴물들을 몰아내는 그림이었다.
그 아래를 천장화 속 주인공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슬라임처럼 물컹거리는 괴물이 미끄러지는 중.
이현과 크루엘이었다.
키르단 제국의 황성 복도를 걷는 중.
크루엘이 말했다.
“…일단 뽑아낼 수 있는 정보는 다 뽑아냈습니다. 쓸모 있는 정보는 추려서 아카이브에 모아놨는데, 이건 폐하께 직접 전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란 액체로 이루어진 촉수가 푸른 다이아를 이현에게 건넸다.
“고생했다.”
이현이 다이아를 받아 쥐었다. 다이아가 빛을 내더니, 그의 앞에 반투명한 원형의 창이 떠올랐다.
창에서 선명한 풍경이 나타났다.
거대한 눈.
세로로 찢어진 금색의 동공 안쪽에서 불길 같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어디냐… 말하여라…….
끔찍한 목소리.
크리스털을 깨고 나온 괴물의 목소리였다.
하데스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만둬. 난 절대 네게 우리의 위치를 말하지 않는다.
신념이 느껴지는 목소리.
실제로 하데스는 고고하게 정의를 추구했다.
그 행위를 아름답다고 느낄 자도 있을 것이다.
츠쿠요미처럼 개인적인 욕망에 의해 움직이지는 않았으니.
하지만 이현이 보기에는 그처럼 신념에 의해 움직이는 자가 더욱 무서웠다.
강한 신념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해 악행을 폭주시키니.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말은 좋다.
그러나 이는 필연적으로 강력한 힘을 지닌 다수가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희생당할 소수의 의견을 들어보기는 했느냐.
빈이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한다.
증오로 노려보는데 괴물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렇다면 고통받을 뿐이다…….
―크으윽!
시야가 떨렸다.
―보아라. 이것이 ‘나’이니라.
돌연 거대한 붉은 행성이 나타났다.
행성 전체가 살점으로 이루어진 듯 꿈틀거리더니…….
그 행성에서 크리스털에서 나왔던 괴물 수천 마리가 떠올랐다.
무시무시한 광경.
―나는 영원하다. 나는 무수하다. 나는… 굶주렸노라.
―영원히 숨을 수는 없노니…….
―언젠가는 찾아낼 터. 지금 말하여 네 고통을 덜어라.
이를 악문 하데스가 말했다.
―물러가라! 추악한 것!
영상이 사라졌다.
크루엘이 말했다.
“그 괴물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한 마리도 그토록 강했다.
그런 것이 수천 마리…….
이현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위험하겠군.”
이런 징그러운 벌레가 수천 마리나 오면… 빈이 교육에 좋지 않겠지…….
그때 이현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우우웅.
“음?”
전화다.
“오, 역시… 게이트를 열어놓고 공유기를 설치하면 여기서도 지구랑 전화가 통하는군.”
전화를 받자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저 희수요!
“어, 오랜만이네. 납치당했냐?”
―납치당한 소녀가 이렇게 밝은 거 보셨어요?
“그럼 무슨 일인데?”
―혹시 방송 일정 있으세요?
“방송? 없지.”
원준이 몇 번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귀찮기도 했고 괜히 방송 같은 걸 나가면 빈이와의 시간만 빼앗기는 셈이니.
얼마 전 멸망급 게이트 공략으로 300억이 넘는 보상을 받아 돈은 차고 넘치는 상황.
돈으로 베개를 만들어 베고 잘 것도 아닌데 굳이 귀찮게 방송까지 나갈 이유가 없다.
―요즘 인기 많으신데 뭐 하나 나가시지. 왜, 요즘 아빠랑 딸이 같이 나가는 예능도 많잖아요.
“…그래?”
―그럼요. 그런 데 나가면 이제 광고 섭외도 들어올 수 있죠.
“오…….”
역시 아이돌.
이쪽 시장에 빠삭하구나!
듣고 보니 아주 그럴듯하다.
실제로 아들이나 딸과 함께 광고에 출연한 연예인들을 본 적도 있고.
원준에게 말하면 아마 방송국 피디와 연결시켜주지 않을까!
“좋은 생각인데…? 나중에 밥 사주마.”
―밥 말고, 우리 앨범 홍보 좀 해주세요.
“앨범? 그럴까? 대신 효과 없어도 뭐라 하기 없기다.”
―와! 진짜 해주시는 거죠? 아저씨 최고! 나중에 유명해지면 갚을게요!
“녀석…….”
이현이 전화를 끊었다.
크루엘이 흐뭇하게 올려다봤다.
물방울 세 개가 표정의 전부지만 어디 한두 해 본 사이인가.
그 표정에서 마치 아들을 보는 아버지 같음이 훤히 보였다.
“그 불쾌한 표정은 뭐냐?”
“아뇨… 폐하께서 많이 유해지셨구나 싶어서요.”
이현이 크루엘의 머리에 손을 척 얹었다.
“내가 예전엔 거칠었니?”
말투에 담긴 살벌한 분위기를 읽어야 했으나…….
주로 골방에 틀어박혀 연구를 하는 탓에 대인 관계가 협소한 크루엘은 눈치가 부족했다.
“살벌하셨죠. 마음에 안 들면 다 패고 다니셔서 제 연구 자재도 많이 부수셨잖아요.”
“허허.”
쌓아뒀던 거냐…….
이현이 뒷짐을 지고 먼 곳을 보았다. 나름대로 참아보려는 시도였는데…….
“하하! 어디 그뿐인가요! 가끔 황녀 마마께서 태어나신 알을 안고 쓰다듬으시면서 뭐라고 중얼거리시는데… 그거 무서웠다고요!”
“그래… 그랬구나…….”
“그랬죠.”
흑역사까지 들춰지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싱긋 웃으며 돌아선 이현이 야무지게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래, 너 좀 맞자.”
“…예?”
뻑!
* * *
아빠와 자식들의 일상을 보여준다는 단순한 컨셉의 프로, ‘아빠는 혼자 살더라’의 메인 피디인 나영찬은 최근 고민이 많았다.
담배를 피우며 핸드폰을 보는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화면에 보이는 건 마왕 이현과 관련된 SNS.
그는 잘생긴 외모와 강력한 힘뿐만 아니라 딸의 사진만 가득한, 팔불출스러운 SNS로 커뮤 등지에서 인기몰이 중이었다.
[존나 위풍당당하게 게이트 공략하고 나와서 집에서는 쪼그려 앉아 아기 사진 찍을 거 생각하면 개웃김.]
[ㄹㅇ 갭모에 오짐… 나 요즘 입덕한 듯.]
[ㅅㅂ 애 딸린 아저씨 사진 오백 장 채운 내 인생이 레전드;;]
[아혼살 안 나오나? 딱 아님?]
영찬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섭외가 되면 좋을 텐데…….”
이현은 지금까지 모든 방송사의 섭외 요청을 거부했다.
S급 헌터들은 으레 그랬기에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돈도, 명예도 아쉬울 게 없는 헌터들이 굳이 방송에 출연해 긁어 부스럼 만들 일이 어디 있나.
그때 핸드폰 화면이 까맣게 바뀌더니 전화 모양이 떠올랐다. 가운데 ‘대배우 원준’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믿기 힘들어하지만… 원준과 영찬은 동갑내기 친구 사이였다.
“어, 원준아. 무슨 일이야?”
―어, 영찬아. 잘 지내?
“나야 그냥저냥 지내지. 야, 너 연퀴즈 나온 거 조회수 날아오르던데?”
―뭐, 다들 그렇지. 넌 담배 피는 중이었고?
“이 새끼… 귀신이네.”
서로를 워낙 잘 아니 바람 소리만 들어도 담배를 피우는지 안 피우는지를 알았다.
“아, 요새 시청률 안 나와서 큰일이다. 너 혹시 ‘아혼살’에 나올 생각 없냐? 연퀴즈 나온 김에 얼굴 좀 비춰봐.”
―그 생각도 안 한 건 아닌데… 대신 내가 더 좋은 사람 꽂아줄게.
“좋은 사람? 누구? 형수님?”
출중한 연기력과 외모로 드라마를 대박 터트린 서이수가 ‘아혼살’에 나오면 상당히 흐뭇할 것이다.
―일단은 비밀. 오늘이나 내일 저녁에 술자리 하려는데. 시간 돼?
“어, 당연하지. 갈게.”
―오케이. 그때 봐. 데려올게.
영찬은 어리둥절했다.
“톰 크루즈라도 되나? 왜 이렇게 기대감을 키우지?”
* * *
동대문 구석에 있는 작은 바.
원준과 영찬이 종종 비밀스럽게 찾는 아지트였다.
한적한 곳에 있다고는 해도 일반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기에, 평소에는 추리닝에 후드를 눌러쓰고 찾는 곳.
그러나 오늘 이곳을 찾은 영찬은 말끔한 정장 차림.
입사 면접을 준비하는 신입 사원 같았다.
원준이 데리고 올 사람이 누군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이다.
먼저 와 있던 원준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평소처럼 편한 옷이라 좀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척 앉은 영찬이 불만을 토로했다.
“야. 누군데 이렇게 사람을 설레게 만들어? 응?”
“기다려봐. 지금 오고 계신다니까.”
안주로 나온 과자를 먹으며 기다리는데 10분쯤 지나,
뚜벅뚜벅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남자를 보고 영찬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끔한 포마드에 검은 정장. 가슴 포켓에는 붉은 행커치프. 훤칠한 키에 긴 다리를 가진 잘생긴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원준이 그에게 손을 들었다.
“아! 여기!”
설마…….
방송국 피디이기에 당연히 트렌드에 관심이 많은 그였으나, 그럼에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보고만 있는데.
남자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현입니다.”
마왕 이현!
현재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헌터.
원준이 섭외한 남자가 설마 이현이었다니!
멸망급 게이트라는 재앙의 해결로 막대한 유명세를 얻고, 이후로도 사당과 강남 일대의 게이트에 슈퍼맨처럼 나타나 해결함으로써 인망까지 얻는 중인 대세 헌터.
“아… 안녕하십니까.”
악수하는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피디답게 영찬은 자연스럽게 응대했다.
“이거,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네요.”
빈말이 아니다보니 자연스레 나왔다.
원준뿐만 아니라 수많은 남자 배우들을 보며 눈이 높아졌음에도 그들과 비교해 전혀 밀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제가… 이현 님이 오신다고는 못 들었는데…….”
“아, 그러신가요?”
“싫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우, 심장이 막 벌렁벌렁하네요. 아, 앉으시죠.”
칵테일을 한 잔씩 마신 후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했을 때 영찬이 슬며시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방송에 출연하실 의향이 있으시다고요?”
이현이 끄덕였다. 고갯짓에 맞춰 영찬의 심장도 같이 뛰었다.
“최근에 아빠 혼자 어디가라는 예능을 봤는데… 재밌어 보이더군요. 꾸밈없이 아빠와 딸의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컨셉이 좋더라고요.”
“어후, 마왕님께서 제가 한 프로를 보셨다니 영광스럽네요.”
“그래서 제가 딸과 함께 거기 출연하면 재밌을 것 같고 좋더군요.”
S급 헌터다운 직구다.
방송에 재미로 출연하겠다는 점도 S급 헌터답다.
영찬은 거부감 없이 냅다 캐치했다.
“아, 탁월한 선택이시죠! 사실 마왕님 같은 분께서 출연하시면 이미지에도 굉장히 좋거든요.”
“그래요?”
영찬이 열변을 토했다.
“아, 그럼요! 이게, 헌터분들은 보통 경외받고 초월적인… 범접할 수 없다… 이런 이미지거든요? 그런데 이 방송을 통해 그 이미지가 반전될 수 있는 거죠.”
빈말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아혼살에 출연하여 자연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을 어필할 수 있다면 방송사는 시청률을 챙기고 그는 인간적인 이미지를 챙길 수 있는, 윈윈이었다.
“3화에 출연한 백도현 씨는 원래 건달이나 부패한 정치인 역으로 자주 출연해서 대중들에게 그 이미지가 꽉 박힌 상태였는데요. 아혼살 출연하셔서 유머러스한 이미지 어필에 성공하셨거든요.”
영찬이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이후 광고나 예능에도 많이 나가시고, 영화에도 완전히 다른 역할로 출연하셨죠. 이렇게, 이미지가 정말 중요하거든요.”
“음. 그렇군요.”
잔을 든 채 천천히 끄덕이는 이현의 얼굴에서는 방송에 자주 출연한 사람과 같은 여유가 느껴졌다. 오히려 영찬이 매달리게 됐다.
“되게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잖아도 다다음 주쯤에 자리가 비기는 하거든요?”
“그때쯤이면 저도 시간이 날 겁니다.”
“그러면… 집에 카메라 설치도 하고 해야 해서 다음 주 중에 스태프들이 갈 겁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이현의 아혼살 출현이 결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