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올림푸스의 사자
높은 첨탑을 이현은 느긋하게 올랐다.
이현이 밖으로 나오자…….
“마왕! 마왕!”
“마왕! 마왕!”
이미 명계의 성을 장악한 질병 기사단과 기근 기사단의 군대가 각자의 무기를 머리 위로 들고 열렬히 환호했다.
크루엘은 하데스와 동화된 순간부터 끊임없이 밖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데스는 저도 모르는 사이 위치추적기를 품에 넣고 다닌 꼴.
덕분에 두 기사단은 적의 군대를 우회하여 빠르게 성을 장악했고…….
그 모습을 본 명계의 군대는 모두 항복했다.
명계가 온전히 이현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이현이 손을 들자 일시에 환성이 멈추고 죽은 듯 고요해졌다.
뭐랄까… 꽤나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들의 승리나, 전과 때문이 아니라… 여전한 충성이.
이현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니들 잘 싸우더라?”
황제라기보다는 전우가 하는 듯 친근한 말투에 잠시 정적이 흔들렸다.
“고생했다! 오늘은 푹 쉬고 먹고 마셔라!”
군인에게 최고의 보상은 휴가라고 누가 말했던가.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와아아아아!”
이현이 등을 돌리는데 전령이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폐하. 올림푸스 성단이라는 곳에서 사절이 왔습니다. 일단 응접실에 두었습니다.”
“그래?”
올림푸스라면 분명 하데스가 속한 집단.
이번 사건을 올림푸스라는 놈들이 뒤에서 조종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 기괴한 촉수 괴물의 존재도 있고…….
아마 이번 일에 대한 항의가 아닐까. 저번 츠쿠요미 때도 그렇고, 성좌란 것들은 제 식구 감싸기가 심한 것 같으니…….
“내가 가지.”
“직접 가신다구요?”
“그게 빠르잖아.”
이현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심심했는지 소파에 앉아 루빅스 큐브를 하던 남자가 놀란 눈으로 일어났다.
화사한 금발에 날개가 달린 기묘한 신발을 신은 자였다.
“엇, 어… 마왕 폐하?”
“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자고.”
이현은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전 헤르메스라고 합니다. 저희 성단의 주신 제우스 님의 전갈을 갖고 왔습니다.”
“전갈… 전갈에 쏘이면 아프지.”
웃어야 하나……?
헤르메스는 고민하다가 씰룩씰룩 입꼬리를 올리며 어색하게 웃음이 터진 척했다.
“아… 하하… 유머러스하시군요, 네.”
“지구의 최신 농담이지.”
“그럼 전갈을 드리겠습니다.”
헤르메스가 품에서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그러자 안에서 글자 대신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금 옥좌에 앉아 손에는 번개를 닮은 창을 들었다.
올림푸스 성단의 주신, 제우스였다.
“오… 영상통화인가?”
[마왕 이현. 반갑소. 내 이름은 제우스. 올림푸스 성단의 주신이지.]
“아… 그래. 반갑다. 나 이현이다. 용건이 뭐지?”
[우선 승전을 축하하오.]
빈말일지라도 들으리라고는 생각 못 한 말이다. 어쩌면 조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현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고맙군.”
[그리고 사과하지. 하데스가 그대의 딸을 노린 것은 그의 독단적인 행동. 우리는 이를 반대했으나 말릴 수 없었소.]
흔한 책임회피다.
“그쪽의 책임이 아니다?”
[그렇소. 그에 대한 증명으로 명계의 관리 권한을 인정하지.]
“어차피 내가 점령했는데 뭔…….”
[그리고 따로 사과 선물도 준비했소.]
헤르메스가 일어나더니 황금으로 된 상자를 열어 보였다. 안에는 와인병 같은 것이 가득 들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세트?”
아직 좀 남았는데… 게다가 그런 것치고는 과할 만큼 강력한 마력이 느껴졌다. 안에서 찰랑거리는 액체의 물방울 하나가 A급 아티팩트에 버금갈 지경.
그런 것이 무려 세 병이었다.
“…넥타라고 합니다. 올림푸스 특산품이죠. 평범한 인간도 이걸 마시면 신에 버금가는 마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들에게는 일시적으로 마력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죠. 백 년에 간신히 한 병을 만드는, 아주 귀한 아티팩트입니다.”
“그래? 흐음… 뭐 일단 받지.”
이만한 마력을 띤 물건은 이현도 지구에 온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다. 황실 보물고에 넣기에 충분한 보물.
확실히 이만하면 사과의 의미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이거 술인가? 어린아이도 마실 수 있으려나?”
“술은 아니고 음료입니다.”
“그렇군…….”
그럼 빈이에게도 좀 줄 수 있겠다. 흡족해하는데… 제우스가 물었다.
[하데스는… 죽였소?]
“그건 왜?”
[그렇다면 그의 신변을 우리에게 넘겨주기를 바라오. 그도 일단은 우리 올림푸스의 신이오. 올림푸스의 법으로 심판함이 마땅하지 않겠소?]
얼핏 듣기에는 맞는 말이지만…….
이현이 싸늘하게 웃었다.
“내게 원한을 품은 녀석을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
살인 예고를 받고도 기왕이면 잘 드는 칼로 찔러 달라고 장인에게 수제 칼을 주문 제작하는 꼴이다.
제우스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쪽의 법으로 그를 심판한 후라면… 괜찮지 않겠소?]
그러니까,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다는 뜻. 신변 양도는 상징적인 것일 뿐, 올림푸스 성단의 체면을 살리겠다는 의도였다.
그들은 우호를 제안하는 것이다.
‘생각보다는 똑똑하군.’
이현도 굳이 확전을 바라지는 않았다. 전쟁의 꽃은 속전속결.
전투하는 장병들의 희생도 희생이지만 뒤에서 보급으로 뒷받침해야 하는 민중들의 노고도 어마어마하다.
하물며 지금은 빈이가 한창 커 가는 시기……!
일성이나 맘카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이나 아빠와 놀려고 하지, 더 크면 옷도 같이 빨기 싫어한다는 것이 중론.
사춘기의 자연스러운 변화이니 받아들여야 한다나.
‘크윽.’
이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아이가 크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뿌듯하면서도…….
역시… 언젠가 다가올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아… 아냐, 우리 빈이는 다를 거야! 우리 빈이는 지금도 효녀니까!’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이현이 정신을 차렸다.
어쨌든 저쪽에서 우호적으로 나온다면 이쪽도 굳이 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
“우리 법이 엄해서 꽤 시간이 지난 후에 몸 성치 않게 갈 텐데 괜찮나?”
사실 하데스는 이미 크루엘의 실험체 신세로 전락해 지금 어떤 상태인지조차 자세히 몰랐다. 그래도 정보를 다 뽑아내기 전에는 죽이지 말라고 했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제우스가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럼 우리가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조만간 올림푸스에 오시지 않겠소? 후하게 대접하리다.]
혹시 매스컴 다 몰린 데서 악수하는 사진도 찍고 그러나…….
귀찮아진 이현은 대강 대답했다.
“어, 뭐, 생각나면 가지.”
* * *
제우스는 양피지를 접었다.
그를 보던 푸른 장발의 거인, 포세이돈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형님, 넥타를 세 병이나 주고…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제우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가 과해?”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래봤자 한 놈입니다. 여긴 성좌가 열둘에… 병력으로 치면 훨씬 많지 않습니까? 헤라클레스도 있고요.”
헤라클레스는 저 신살자 길가메시를 단신으로 막아낸 전력이 있다.
전쟁의 신인 아레스조차 한 수 접고 가는, 그야말로 올림푸스 최강의 전력.
이야기를 들은 제우스가 끄덕였다.
“이기겠지. 그리고 난 다음에는?”
“…예? 다음이라니요?”
제우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포세이돈을 바라봤다.
“내가 이러니 네놈한테 주신 자리를 못 넘기지. 쯔쯔…….”
“…….”
그게 아니라 불륜으로 낳은 자식이 너무 많아서 누구한테 넘기기가 애매한 거겠지…….
포세이돈은 할 말이 많았으나 입을 꾹 닫고 쳐다봤다. 제우스가 그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뇌창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놈의 병력, 그게 전부가 아닐 거다. 전력으로 싸우면 이기더라도 우리도 크게 손실을 입겠지.”
그 기사단의 힘은 실로 강대했다. 명계의 군대도 결코 약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압도적으로 이겼으니…….
올림푸스의 신들은 열둘. 그중에서 하데스의 힘은 하위였으나, 영역의 강대함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전쟁의 신인 아레스나 헤라클레스가 이끄는 전사들의 군대도 그만큼 압도적으로 이기지는 못했을 터……!
성단의 자존심 때문에 이긴다고 말했을 뿐.
내심 승리를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손실을 입으면 저 다른 성단의 신들이 우릴 노리겠지. 사사건건 탐욕스럽게 노리는 놈들이니…….”
게다가 이번에 하데스의 돌발행동으로 아마츠카미 성단과 척을 지고, 올림푸스 전체의 명예와 신의도 떨어졌다.
다른 성단들의 빗발치는 항의가 물에 불린 미역처럼 불어나는 상황.
지금은 힘이 있기에 망정이지 쳐들어올 명분은 충분했다.
“당장은 마왕과 손을 잡아 기회를 도모해야 해.”
* * *
“YO, 남우.”
이현이 병실에 들어서며 바나나를 들었다.
“괜찮냐?”
병상에 누워 TV를 보던 남우가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아… 예에.”
공격에 직접 맞은 것도 아니고 풍압에 날아간 것만으로 전신의 뼈가 세 개나 부러지고, 두개골 골절이라는 중상을 입은 남우는 매우 의기소침했다.
이현이 그의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많이 아프냐?”
“상처보다는…….”
남우는 씁쓸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여기가 아프네요.”
“심장병이래?”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이번에도 전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한숨을 푹 쉰 남우가 한창 뉴스를 방송 중인 TV로 멍한 시선을 돌렸다.
“형님께서 그렇게 수련을 시켜주셨는데도… 헌터를… 그만두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이현이 물었다.
“네가 지향하는 헌터는 강함이 전부냐?”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강해야 사람을 지킬 수가…….”
“협회도 딜러, 탱커, 서포터로 포지션을 나눴잖아.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
어두운 시선이 이현을 향했다.
“그럴까요?”
[미국의 S급 헌터, 발레리의 인터뷰 일부입니다.]
두 남자의 시선이 TV로 향했다.
TV 화면에 매끄러운 백발이 인상적인, 나이 든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토크쇼인 듯 편하게 앉아 사회자와 마주 본 그녀가 말했다.
[슈퍼맨은 있고, 그 사람은 한국인입니다.]
화면이 바뀌며 이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아나운서가 말했다.
[우리 한국의 S급 헌터, 이현에 대한 발레리의 말입니다. 이현은 각성자로 알려져 있으며, 지난 일본의 멸망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에도 그의 공이 컸다고 합니다.]
남우의 표정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아니… 근데 하필 지금 이런 장면이…….’
이현이 TV를 돌리려는데 다시 발레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똑바로 정면을 보면서 어색한 한국어로 말했다.
[그리고 한국의 킴나무 헌터. 감사합니다. 당신이 저를 살렸습니다.]
토끼 눈이 된 남우의 어깨를 이현이 피식 웃으며 짚었다.
“그렇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