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종말의 기사 (4)
자그마치 수십만의 대군이다.
구구구구!
발소리만으로 지축이 울렸다. 날아오는 마법은 은하수를 이루는 별처럼 보일 지경.
베요네타가 그 모습을 보며 조소했다.
“하늘을 꾸미는 재주는 있는 자들이군요.”
그녀의 손짓을 따라 천 명의 기사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전술적으로 보면 미친 행동이나 다름없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사단원들을 믿었다.
아니, 오히려… 이 정도 군세에 사상자가 나오면 폐하를 볼 면목이 없다!
‘다치는 놈은 얼차려다.’
마침내 명계를 밝히던 별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온갖 속성을 지닌 마법의 폭격. 베요네타가 옷자락을 휘두르자 돔 형태의 하얀 방어막이 헌터들과 이현의 머리 위에 생겨났다. 조르그들은 조용히 머리 위로 방패를 들었다.
쿠구구구궁!
폭음조차 제대로 통과시키지 않는 완벽한 방어. 방어막 아래에서는 그냥 마법이 방어막에 부딪히며 만들어낸 빛의 파동만이 보였다.
성녀, 예슬이 그 광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예쁘다…….”
폭격이 끝났으나 사상자는 전무.
움츠렸던 몸을 펴고 조르그들이 정면에 활을 겨눴다. 물량만으로 압사시킬 수 있을 것 같은 무리를 앞에 둔 것치고는 지나치리만치 침착한 태도였다.
첫 열과 스무 발자국 가량 거리가 좁혀진 순간, 활시위가 튕겨졌다.
직선으로 발사된 금색의 섬광.
처음 명계의 군대를 폭격했던 화살이 다시 한번 군대를 꿰뚫었다.
슈슈슉!
시인 불가능한 속도. 몸통이 뚫렸다는 자각도 못 하고 달리려던 괴물들이 힘을 잃고 무너졌다.
밀집해 달려오던 군대의 앞 열이 수수깡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엄청난 기세로 병력을 꿰뚫던 화살 중 한 발이 선발대의 끝자락에 있던 한 오크의 방패를 강타했다.
카앙!
“크워억!”
누덕누덕 기운 피부를 지닌 오크가 방패에 화살을 꽂은 채 뒤로 수십 미터를 주르륵 밀려났다.
어마어마한 힘.
방패를 뚫고 코앞에서 멈춘 화살을 보며 오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화살에서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왔다.
“쿠륵?”
새카맣게 물든 화살이 금색으로 폭발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화살들이 폭발했다.
콰쾅!
군대의 중앙에서 일어난 연쇄적인 대폭발.
이번 화살에도 정체 모를 힘이 담겨 폭발이 일어난 주위로 끔찍한 병을 퍼트렸다.
화살에 꿰뚫려 팔다리를 잃은 자들, 폭발에 휘말려 눈이 멀고 전염병에 걸린 자들이 한데 나뒹굴었다.
“으아악!”
“캬악!”
“끄어어어…….”
그 아비규환의 장면을 보고 감히 달려갈 수 있는 마물은 없었다.
하데스의 창백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처음의 기술이 하루에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스킬이나 전력을 다한 한 방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쓸 수 있는 기술이었단 말인가……!
그럼에도 운 좋게 화살에 맞지 않고 접근한 용감한 마물 중 하나가 조르그에게 대낫을 휘둘렀다. 조르그가 낫을 턱, 붙잡더니 톱날 같은 주둥이로 가위질하듯 낫의 날을 물었다.
콰직!
낫이 유리처럼 깨졌다.
마물이 어처구니없이 보는데 조르그의 투명한 초록색 눈에 미소가 번졌다. 갑피가 벌어지며 드러난 두 팔이 검을 교차해 휘둘렀다.
서걱!
네 조각으로 나뉜 마물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바로 옆에서는 다른 조르그의 복부를 찌른 마물이, 창이 부러지는 광경에 당황해 멍청히 섰다가 내리찍는 검에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콰직!
콱!
서걱!
걷어차이고, 물리고, 베인다. 명계를 주름잡던 용맹한 전사들이 제초 작업당하는 잡초처럼 무너졌다. 한 번에 서너 마리가 달라붙어도 조르그는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정리했다.
전의를 잃은 마물들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떠밀려 넘어진 아군을 밟으며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그 참혹한 광경을 위에서 고스란히 지켜보던 하데스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던 상식이 완전히 무너졌다.
‘살육전…….’
이현이 오만하게 내뱉은 단어가 뒤늦게 닿았다.
“빌어먹을!”
쿠웅!
그의 주먹이 마차를 내리쳤다. 그때, 그의 애견인 케르베로스에게 접근하는 세 조르그가 보였다.
다른 조르그들보다 덩치가 조금 더 크고, 화려한 문양이 들어간 브레스트 플레이트를 입었다.
지옥 같은 전장의 한복판을 떠들며 걷는 모습이 무척 여유로웠다.
“이 자슥~ 강해 보이네~”
“1분이다. 까묵지 말기래이.”
“큰놈 쓰기 없기다.”
초록색 갑옷의 조르그가 팔을 장난스레 휘둘렀다. 파란 눈의 조르그가 앞장서며 끄덕였다.
“하모. 작은놈으로 1분 이내…….”
크르르르!
케르베로스의 세 머리가 화염을 뿜었다. 조르그들이 검을 풍차처럼 돌리며 화염을 막아냈다.
“마! 우리는 아이다카이!”
“점마가 말을 알아듣겠나?”
파란 눈의 조르그가 양손에 곡도를 쥐고 몸을 낮췄다.
“시간이나 제대로 세라!”
훅!
땅이 파이며 조르그의 몸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곳은 케르베로스의 목뒤. 곡도와 함께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떨어졌다.
서걱!
깨갱!
케르베로스의 가운데 머리가 털썩, 땅에 떨어졌다. 피 대신 용암이 솟구치며 땅을 태웠다.
두 머리가 붉은 흉안으로 푸른 눈의 조르그를 노려보았다.
“아… 가운데 머리가 본체가 아니었나.”
근처에서 다른 마물들을 확인 사살하던 조르그들이 킬킬 웃었다.
“점마 억수로 재수 없다 안 카나.”
“3분의 1을 틀린다카이.”
“쫑알쫑알 대지 말고 니들 일이나 제대로 해라!”
버럭 소리치는 조르그를 케르베로스가 앞발로 내리찍었다. 조르그가 휙 검을 휘두르자 앞발이 단숨에 두 갈래로 쪼개졌다.
크워엉!
조르그의 몸이 네 개의 잔상으로 갈라졌다. 케르베로스의 사지에서 피가 솟구쳤다.
깨개갱!
지탱을 못 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머리를 두 개의 섬광이 아래에서 위로 갈랐다. 두 머리가 동시에 아래로 뚝 떨어졌다.
쿠웅!
쿵!
푸른 눈의 조르그가 어깨에 곡도를 척 걸치고 뒤를 돌아보았다.
“일 분 안 지났재?”
같이 온 조르그들은 이미 저 멀리 가 있었다.
* * *
“하여간, 별것도 아닌 놈들이 꼭 주둥이를 털어요.”
전장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요약한 이현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하늘에 둥실 떠 있던 마차가 기수를 틀고 있었다.
살아남은 티탄들도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상황.
이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베요네타.”
“예! 주군!”
“자리 좀 맡아라. 면담 좀 하고 와야겠다.”
쿠웅!
이현의 몸이 스프링처럼 땅을 튕기고 마차를 향해 날아갔다. 이내 그의 몸이 마차 위에 착지했다.
쾅!
마차가 기우뚱 흔들렸다.
앉아 있던 하데스가 움찔, 놀랐으나 이내 평소와 같은 조소를 띠고 그를 바라봤다.
“오셨군요.”
“오셨다.”
이현의 주먹이 대뜸 하데스의 얼굴을 갈겼다.
펑!
뭐라고 말하려던 하데스의 머리가 땅에 던진 과일처럼 터졌다. 잠시 푸들푸들 떨던 몸이 축 늘어졌다.
이현의 등 뒤에서 멸망급 게이트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 * *
눈앞에 뜬 작은 화면을 통해 자신의 머리가 터지는 광경을 보며 하데스는 웃었다.
‘이현… 전술적으로는 당신이 이겼지만, 전략적 승리는 제가 쟁취하도록 하지요.’
하데스는 한 아파트의 앞에 몸을 띄운 채 물끄러미 앞을 보고 있었다.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모습.
그러나 누구도, 심지어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길가메시조차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머리에 쓴 고대 그리스풍의 투박한 투구, 퀴네에 덕분이었다.
멸망급 게이트도… 명계의 군대도… 모두 미끼.
그의 목적은 레비아탄의 아이였다.
‘그래도 이만한 힘의 군대를 지녔을 줄이야… 티탄을 다수 잃은 것은 상당히 뼈아픕니다만…….’
이 아이를 먹고 신을 초월한 존재가 된다면 잃어버린 명계의 군대, 그의 위상도 전부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는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성단을 규합하여…….
‘아니, 너무 먼 미래를 봐선 일을 그르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죠.’
스스스…….
그의 몸이 유령처럼 창문을 뚫고 베란다로 들어갔다. 거실에 선 그는 잠시 실내를 둘러보았다.
팔짱을 끼고 선 길가메시가 거실에 있고, 노인 하나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중이다.
‘아이는… 이 집 어딘가에 있겠지.’
감쪽같이 마력을 감췄으나 하데스 또한 신. 희미한 마력의 자취를 통해 아이의 위치를 추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대범하게 길가메시의 앞에 섰다.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퀴네에’를 쓴 동안 상대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면 위치가 들킬 위험이 있다.
길가메시처럼 감각이 좋은 괴물이라면 더욱 들키기 쉬울 터.
그때, 그의 눈에 안방의 이불 안쪽에서 꼼지락거리는 형태가 보였다.
훌쩍 다가가 이불을 살며시 걷자 불이 붙은 꼬리가 툭 튀어나왔다.
“…….”
요리를 하던 일성이 뒤에서 버럭 외쳤다.
“삼식아! 너 자꾸 침대 올라가면 할비가 이놈 한다!”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삼식이가 폴짝 뛰어내리더니 풀이 죽은 모습으로 어슬렁어슬렁 거실로 나갔다.
남은 방은 둘. 하데스는 침착하게 화장실 옆의 방을 열었다. 유난히 두껍고 화려한 색의 매트가 깔린 방이 나타났다.
아기 침대에 빈이가 얌전히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방금 잠들었을까. 아이답지 않게 긴 속눈썹을 늘어트리고 색색 숨을 쉰다.
하데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 있었군.’
그는 신중하게 뒤를 살피고, 보호 마법이 있는지 확인했다.
역시나… 몇 가지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고, 방에 굴러다니는 놀이 용품들도 꽤나 수준급의 방어용 아티팩트로 확인됐다.
게다가 길가메시가 지키고 있으니, 어지간한 자들은 감히 접근할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신살자의 위명은 저 올림푸스에도 유명했다.
하데스는 잠시 주위를 살폈다.
이만큼 방어에 공을 들이고, 방을 꾸민 흔적은 이현이 빈이를 그만큼 아낀다는 것.
‘하지만 당신의 딸이 레비아탄이고, 지구에 온 것은… 어찌 보면 필연……!’
하데스는 조심스레 빈이를 들었다. 빈이는 작은 입술을 잠시 오물거리나 싶더니 이내 평온해졌다.
퀴네에의 효과 범위에는 그가 양손으로 든 물체나 생물도 포함된다.
이렇게 안은 이상 이제 빈이는 그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집을 빠져나온 하데스는 상공으로 날아올라 게이트를 열었다.
레비아탄의 힘을 고스란히 얻으려면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이미 준비는 다 갖춰놓았으나 그 장소는 명계의 심부.
직접 가야만 했다.
게이트의 마력이 감지당할 테고 그리되면 빈이를 납치한 것이 하데스 본인임도 들통날 테지만, 이미 납치가 성공한 지금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
게이트를 지나자 다섯 개의 탑이 마치 손아귀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가장 높은 탑에 착지한 하데스에게 창백한 얼굴의 유령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폐하. 파르테르 평원 전투에서 아군 병력의 65%가 사망했고, 생존자 중 30%가 부상자입니다. 티탄족은 다섯만 남았습니다.”
뼈아픈 패배의 보고. 그러나 하데스는 태연하게 그녀를 지나쳤다.
어차피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심부로 가겠다. 문을 닫고 아무도 들이지 마라. 페르세포네도 마찬가지다.”
“네! 폐하!”
어두운 나선계단을 따라 내려간 심부에서는 심장 고동과도 같은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심장 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데스가 들어간 곳은 무수한 별이 보이는 우주.
인공적인 구조물이라고는 그가 들어온 낡은 나무 문과, 원형의 돌바닥이 전부였다.
바닥 중앙에 위치한 재단에 빈이를 내려놓은 하데스가 굳은 시선을 위로 향했다.
“시작해보죠.”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곳… 그 자리에는 달만큼이나 거대한 형이상학적 형태의 크리스털이 있었다. 크리스털 안쪽에서 커다란 동공이 멍하니 하데스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