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종말의 기사 (2)
11월도 어느덧 중순에 접어들어 하늘은 바싹 메마르고 공기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온도계에 표시된 온도는 영하 5도!
그러나 강남의 화려한 전광판 아래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직 여유가 흘렀다.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은 이 정도 추위쯤은 견뎌내야 한다는 뜻.
실제로 커플들은 불타는 사랑의 힘인지 이 추위에도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다니는 중이었다.
“아… 첫눈이다.”
“눈?”
여자친구의 말에 남자가 손바닥을 펼쳤다.
팔랑거리며 내리는 솜뭉치 같은 것이 손바닥에 닿는데…….
“어라?”
“자기야, 왜?”
남자가 손바닥에 얹힌 눈송이를 어루만졌다.
“눈이… 따뜻한데?”
아니, 자세히 보니 그건 눈이 아니었다. 눈과 닮은… 재와 먼지 뭉치 같은 것.
커플이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이글거리는 붉은빛이 그들의 얼굴을 비췄다.
길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하나, 둘 고개를 들었다.
“어.”
“엇.”
“저게 뭐야?”
“마, 맙소사…….”
늑대가 입을 벌리듯 하늘에서 입을 벌린 붉은 균열이 서서히 하늘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 * *
“대충 시작된 느낌이군.”
미래를 그리는 화가, 데이먼 호크니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며 말했다.
그가 보는 것은 큐튜브의 재난 채널.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잠옷을 입고 슬리퍼 한 짝을 발끝에 건 자세. 길게 누워 핸드폰으로 영화 보듯 보고 있는데…….
보고 있던 리처드 경감은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멸망급 게이트야. 자네가 예언했지.”
“어, 그랬지.”
리처드가 결국 못 참고 분통을 터트렸다.
쾅!
그의 손바닥이 책상을 후려쳤다.
“자네도 참가해야 해! 이건 인류의 존망을 건 싸움이야!”
데이먼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슬리퍼를 흔들었다.
“오… 그 표현 좋은데? 맞아. 인류의 존망을 건 싸움이지. 그러니까 난 안 갈 거야. 갈 필요가 없거든.”
“정말 실망이군. 대학에 다닐 때 자네는 최소한의 인류애는 있었어. 지구가 멸망해도 그 잘난 예지 능력으로 혼자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 이 말인가?”
흔들리던 슬리퍼가 우뚝 멈췄다.
“서운하군… 자네, 날 어떻게 보는 거야? 아무렴 내가 그렇게 인간쓰레기일까? 난 러브 앤 피스가 모토야.”
“그런데…….”
데이먼이 탁자에 있던 맥주를 들어 건배했다.
“갈 필요가 없다니까. 나뿐만 아니라 S급 헌터들도 마찬가지야.”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켠 데이먼이 피식 웃었다.
“신들의 싸움에 인간이 끼어들어서 무슨 도움이 되겠나? 일렬 직관을 하고 싶은 거라면 모를까, 난 휘말리는 게 무섭거든.”
* * *
크르르르…….
세 쌍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머리는 황소도 한입에 집어삼킬 듯이 크고, 검적색 털은 마치 불타는 것처럼 일렁거린다.
케르베로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지옥의 파수견.
그 케르베로스가 끄는 수레에 창백한 얼굴의 미청년이 앉아 조소하고 있었다.
명계의 왕, 하데스였다.
시선이 향한 곳은 정면.
점점 확장되는 거대한 게이트의 안쪽으로 강남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메이드복을 입은 해골이 그에게 차를 올렸다. 차를 받은 하데스의 시선이 오만하게 아래를 향했다.
수레의 양옆으로 펼쳐진 것은 수십만의 군세.
명계를 지배하는 강력한 마군… 거기에 더해…….
하데스는 고개를 돌렸다.
마치 장벽처럼 선 거인들이 보였다.
한때 타르타로스에 갇혔던 거신… 티탄들.
그들 하나하나의 힘은 성좌들조차 두려워할 정도였다. 한때는 세계를 지배했던 자들이나, 올림푸스에 패배 후 명계에 흡수됐다.
그 강력한 힘과는 별개로, 한 번 패배하여 영혼이 명계에 묶였기에 하데스에게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
‘이들의 힘이라면 올림푸스 전체와도 길항할 수 있을 테지.’
차를 마시려던 하데스는 문득 하늘로 시선을 들었다.
하얀 게이트가 생겨나더니,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남자가 유유히 날아왔다.
케르베로스가 코를 킁킁거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하데스가 남자에게 미소를 보였다.
“헤르메스. 반가워요.”
“하데스… 주신께서 화가 많이 나셨어요.”
올림푸스 성단의 주신, 제우스. 하데스와는 형제 사이였다. 하데스는 갸우뚱했다.
“왜죠?”
날아온 헤르메스가 마차 옆자리에 팔베개를 하고 앉았다.
“허락받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셨잖아요. 다른 성단에도 개입 여지를 주는 거라고요.”
지구는 어느 성단, 성좌의 독점적 지배 영역이 될 수 없다.
성단끼리 맺은 조약의 가장 첫 줄에 있는 항목이었다. 하데스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게이트를 열었을 뿐입니다. 제 군단은 지구에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들어가더라도, 성단 간 조약에 위배되는 병력은 아닐 거라고 보증하죠.”
“이런 무력 시위 자체가 조약에 위배되는 행위라던데요.”
“형님은 제가 레비아탄을 먹고 본인 자리를 위협할 것을 걱정하시는 게 아닙니까?”
헤르메스가 여러 색을 띤 보석 같은 눈으로 아무 말 없이 하데스를 응시했다.
무언의 긍정.
의미를 알아채기 어렵지 않은 눈빛이었다. 하데스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레비아탄의 연구입니다. 이건 제우스… 형님께 레비아탄을 바치기 위한 전쟁이죠.”
“그런 것치고는 하데스 님의 행동이 너무 적극적인 것 같은데요?”
“형님을 위한 충정의 표시라고 해두죠.”
헤르메스가 다시 날아올랐다.
“뭐… 전 전령으로 온 것이니 더 할 말은 없네요. 손님도 온 것 같고.”
새카만 하데스의 시선이 게이트로 향했다. 때마침 수십 개의 헬기가 게이트로 들어오고 있었다.
“날파리는 거슬리는군요.”
하데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군대의 일렬이 방패를 들더니 뒤에서 수천 발의 불덩이가 하늘로 쏘아졌다.
그런데 불덩이가 헬기에 직격당하기 직전, 헬기에서 수십의 인원이 뛰어내렸다.
동시에 음울한 붉은빛이 감돌던 하늘이 맑게 개더니 성스러운 광채가 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왔다. 하데스는 올림푸스를 연상시키는 그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헬기의 중앙에 뜬 한 여인. 하얀 여인이 뿜어내는 마력이었다.
하데스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나는데… 헬기에서 뛰어내린 인원들 사이에서 총알 한 발이 날아와 그의 미간을 노렸다.
“음?”
가볍게 총알을 낚아챈 하데스가 총알을 가만히 살폈다. 금색의 기운이 일렁이는 화살… 그 안에 담긴 마력은 하찮으나 불쾌했다.
그의 검지와 엄지가 총알을 프레스처럼 가볍게 압착시켰다.
“아, 그래… 헌터라는 자들인가.”
갓 마력을 각성한… 측은한 자들.
“전투 전의 유희도 나쁘지 않겠군.”
하데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마차와 연결되어 있던 케르베로스의 사슬 목줄이 풀어지며 화염이 이글거리는 땅을 후려쳤다.
해방된 케르베로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펄쩍 뛰어나갔다.
진영을 짜고 있던 헌터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전투를 준비했다.
“온다!”
“놀아볼까!”
* * *
‘죽는다.’
미국의 S급 헌터, 발레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흔이 넘어 하얗게 물든 탓에 은색에 가까워진 금발이 그녀의 주름진 얼굴로 떨어졌다.
S급 중에서도 탱커로 당당히 1위에 머문 그녀였건만…….
케르베로스의 타격을 몇 번 막아낸 것만으로 팔이 저리고 한 몸과 같던 방패가 짐덩이처럼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케르베로스의 뒤로 향했다.
마차에 앉아 여유롭게 관망하는 미청년.
‘명왕 하데스.’
신의 이름을 가진 저 보스는 얼마나 강하기에 이 괴물을 수족처럼 부린단 말인가!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저 뒤에 즐비한 수십만의 마군… 벽처럼 선 거인들…….
그 모두를 부리는 힘!
정녕 신이라도 되는 걸까.
한눈을 판 그 잠깐의 틈. 케르베로스가 입을 벌리더니 화산의 구덩이처럼 이글거리는 목구멍을 드러냈다.
바지지지…….
석양과 같은 빛이 발레리의 얼굴을 물들이고 열풍이 화끈하게 달궜다.
“FUCK!”
발레리는 재빨리 옆으로 피했으나…….
콰르르!
케르베로스가 뿜어낸, 유황처럼 끈적이는 불길에 한쪽 팔이 휩쓸렸다. 삽시간에 팔이 타며 녹아내렸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고기 타는 냄새가 역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고통은 없었으나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발레리는 멍하니 제 팔을 살폈다. 그런 그녀를 거대한 발이 내리찍었다.
“조심하세요!”
옆에서 달려온 남우가 발레리의 허리를 안고 뒹굴었다.
간발의 차.
쿠웅!
케르베로스의 발톱이 땅을 찍었다.
“크윽……!”
“괜찮으실 겁니다! 돌아가면 치료받을 수 있어요!”
한국어는 잘 모르지만 남우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남우가 검을 들고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원래 함께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고, 서포터 역할로 온 것이었으나 위기에 빠진 사람을 앞에 두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제가 보호해드리겠습니다! 어서 회복하세요!”
절망이… 오기에 덮여 사라졌다.
‘아직 C급이라는 청년이 이런데, S급으로서 멍청하게 있을 수만은 없지!’
발레리는 재빨리 허리에 꽂아두었던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목숨과도 같은 포션. 빠르게 팔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때 케르베로스의 꼬리가 남우의 앞을 스쳤다.
후웅!
닿지도 않았으나 풍압도 남우에게는 강했다.
“으아악!”
의지와 달리, 남우의 몸이 발레리의 몸을 넘어 날아갔다.
“이런!”
발레리는 벌떡 일어나 뒤를 살폈으나 짙은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다시 앞을 보자 불타는 갈기를 지닌 케르베로스의 앞발에 치인 먹필도사가 날아가는 장면이 보였다.
“커헉!”
얼음과 불이 쏟아지고 바람이 케르베로스를 할퀴었다. 거대한 총성이 이따금 케르베로스의 미간과 눈알을 노렸으나 잠깐 저지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십의 S급 헌터들이 교전 중이었으나 케르베로스의 용암이 굳은 것처럼 생긴 피부는 이렇다 할 상처를 입지 않았다.
발레리는 이를 악물었다.
“FUCK……!”
저런 괴물을 무슨 수로 상대하란 말인가……!
멸망.
두 글자가 발레리의 뇌리를 스쳤다.
정치적 이해관계나 개인 사정으로 참여하지 않은 헌터도 많았으나 지금 여기에 모인 전력은 인류 방위군이라고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는 강대한 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에게 상처조차 제대로 낼 수 없다면 무슨 수로 이겨낸단 말인가.
“아악!”
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펑크 사무라이가 날아갔다. 뒤를 이어 독왕이… 아이스 프린세스가…….
하나, 둘 헌터들이 쓰러져갔다. 발레리는 방패를 들고 일어나려 했으나 팔의 재생은 너무나도 더뎠다.
한 팔로는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수가 줄어들자 케르베로스의 공격도 더욱 빠르고 날카로워졌다. 재방에 구멍이 뚫린 듯 거세진 공격의 압력에 헌터들이 점점 수세로 몰리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날아온 수십 발의 금색 섬광이 케르베로스의 온몸을 가격했다.
터덩텅텅!
깨갱!
쇳덩이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케르베로스가 발라당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