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종말의 기사 (1)
사금흐름 산.
산 자체를 둘러싼 거대한 마력의 흐름 덕에 수천에 이르는 바위산이 부유하고 있으며 그 바위산에서 황금색 물이 흐르는 장소.
이현과 아낙톤이 이 차원에 도착한 직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장소였다.
시간이 흐르며 키르단 제국의 성지로 여겨져 아무나 출입할 수 없게 되었으나…….
“여기를 지금 베요네타가 전진기지로 쓰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신임받던 네 기사의 일원 중 하나가 반란을 일으켜 제국을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 사실이 몹시 송구스럽다는 듯 아시스는 아까부터 저자세였다.
이현이 그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됐다. 네 잘못 아니야.”
하지만 갈수록 의문이다.
이현과 네 기사들은 가끔 이 산의 정상에 모여 술을 나눴다.
그만큼 추억이 서린 장소를 전진기지로 쓴다는 점에서 명백한 악의가 느껴지는데…….
그 악의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가볼까. 넌 여기 지켜.”
“안 됩니다!”
아시스가 이현의 팔을 잡았다.
“지금 저기 있는 건 제국 사대 전력의 한 축입니다. 아무리 폐하라 해도 다치실 수 있습니다.”
제국을 세우고, 칠죄종을 점령한 후 저 심우주에서 온 끝없이 탐식하는 공허의 군대도 물리친 강병들. 그리고 그 강병들을 이끈 네 최강 중 하나.
이현도 그 강함을 인정하기에 도움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닌가.
“걱정 마. 난 떠날 때보다 강해졌다. 그리고…….”
이현이 빈이를 바라봤다.
“우리 딸 두고 안 죽어.”
훌쩍 뛴 이현의 몸이 바위산으로 쏘아졌다.
그야말로 인간 포탄.
그렇다면 그 인간 포탄을 요격하는 화살들은 뭐라고 칭해야 할까.
하나하나가 마치 창과 같은 크기를 자랑하는 화살들이 바위산의 안쪽에서 정확히 이현을 노리고 쏘아졌다.
깃도 없이 은색의 물질로 이루어진 화살로, 촉은 회전하는 톱날 같았다.
제각각 금색의 불꽃을 둘렀는데… 그 무시무시한 열기가 삽시간에 주변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고 닿는 모든 것을 증발시켰다.
“이 녀석들도 강해졌군.”
하긴, 긴 세월이었다. 그간 전혀 발전이 없었으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들이 날 못 알아보는 건 좀 너무한데?”
허공에 우뚝 멈춘 이현의 손발이 수백의 잔상을 허공에 수놓았다.
텅! 터더덩!
날아오던 화살들이 죄다 부러지고 튕겨 나갔다. 이현은 발끝으로 마지막 화살 하나를 톡 차서 빙글 돌렸다.
“저긴가.”
화살촉이 한 지점을 향한 순간, 이현의 발이 화살의 끝을 냅다 걷어찼다.
쐐액!
화살이 날아올 때보다 빠른 속도로 바위산을 향해 발사됐다.
콰앙!
바위산에 커다란 둥근 구멍이 생기고, 그 사이로 경악한 얼굴을 한 괴물 두 마리가 나타났다.
풍뎅이 같은 곤충인데 이족 보행을 하고 있다. 두 다리로 선 키는 5미터쯤. 네 개의 팔을 지녔고 두 팔에는 방패를, 다른 두 팔에는 활을 들었다.
조르그.
기사단의 주력을 이루는 괴물들이었다.
“하하! 니들 칙칙한 면상도 오랜만에 보니 반갑구나!”
자신이 뚫은 구멍의 안쪽으로 향하며 이현이 외쳤다. 조르그들의 다면체 같은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폐하?”
허공을 박차고 그들의 앞에 착지한 이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료 기사단원들이 있어서인지 함부로 화살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그래, 나다. 이현.”
“거, 거짓말! 페하께서 떠나신 지도 200년이 다 되어 간다!”
“아니 뭐… 신상 명세라도 밝혀? 나이는 천 살 이후로 안 셌고, 키랑 혈액형은 모르는데.”
“헉! 허술한 모습을 보니 폐하가 맞는 것 같은데……?”
‘이 새끼들… 평소에 날 어떻게 본 거야?’
이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모른 척하고 화살을 배때기에 날렸어야 했는데 실수했다.
살기를 느낀 조르그가 무릎을 꿇었다.
이런 강함을 지닌 남자가 둘이나 있을 리가 없다.
“폐하를 뵙습니다!”
“됐고. 니들, 왜 반란 일으켰어?”
이놈들도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는 머리가 있는데 어쭙잖은 개소리를 듣고 반란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조르그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우물쭈물하던 조르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반란이 아닙니다, 폐하. 이건 폐하의 권위를 찾기 위한 혁명이었습니다.”
“뭔 소리야?”
조르그가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얼굴로 말했다.
“폐하와 아낙톤 님께서 떠나신 후, 저 간악한 크루엘은 감히 황제 폐하의 사문서를 위조하여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려고 했습니다!”
조르그의 손이 돌바닥을 부서트렸다.
“충심이 무엇인지 아는 자라면!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크루엘이 그랬다고?”
원래 야망이 넘치던 놈이었으니 납득은 간다. 놈이 황제를 하든 마왕을 하든 이현은 딱히 상관도 없었다.
다 함께 세운 제국이다. 이현, 그가 먼저 무책임하게 제국을 버리고 떠났으니… 누군가는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측근 중 하나라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하지만 황위의 정당성을 문제로 싸우게 될 줄이야.
‘폐하의 제국을 지킨다’라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냐의 차이였을 것이다.
크루엘은 황제가 되어 제국이 제대로 기능하고 번영케 할 생각이었을 테고, 베요네타는 이현이 이룩해놓은 제국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자 하는 원리주의적 사고였겠지.
‘크루엘이 내 다음 후계자다’라는 내용의 문서는 써준 적은 없으니 베요네타에게도 정당성은 있다.
누가 잘못했다고 하기 어려운 전쟁.
원래 전쟁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지만…….
“내가 화해시켜줘야겠구만.”
가족 같았던 부하들끼리 싸우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렇게 해서 제국이 분열되는 것도 결국 베요네타나 크루엘이 원하는 것이 아니겠지.
“베요네타는 어디 있나?”
“모시겠습니다.”
두 조르그가 바위 위를 폴짝폴짝 뛰어 올라갔다. 이현도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 뒤를 따랐다.
도착한 곳은 바위산 정상.
막사 세 개가 작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이 착지하자 막사 하나에서 벌레떼가 쏟아져 나와 공터에 모였다.
딱정벌레류처럼 보이는 벌레떼가 모이더니 삽시간에 사람의 형상을 이뤘다. 하얀 얼굴과 아찔할 만큼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여성. 새카만 레이스 비스체 위에 검은 망토를 걸쳤는데…….
이현은 그 광경을 보고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베요네타.’
베요네타가 망토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뭐냐! 어째서 경계를…….”
알아본 걸까. 날 선 태도로 일갈하던 베요네타가 우뚝 멈춰서 이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주군?”
말해놓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굳어 있는데… 이현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오랜만이다. 더 예뻐졌네?”
“저… 정녕 주군이십니까?”
“어, 나 맞아. 넌 베요네타. ‘끝없이 탐식하는 공허’에게 멸종당한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 내가 핏빛달의 시기에 구했지. 이 정도면 증거…….”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베요네타가 달려오더니 와락 안겼다.
“주군!”
이현은 얼떨결에 그녀를 안았다. 베요네타가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주군! 주군!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어찌 소녀를 버리고 가셨나요!”
“어, 어어…….”
아, 이 녀석… 이런 말투였지…….
이현은 매우 당황스럽고 민망했다. 이 녀석이야 어렸을 때 주워 기른 녀석이니 친한 삼촌쯤으로 생각해서 이런 행동을 할지 몰라도… 이제는 다 큰 몸.
그것도 상당히 원숙한 성인 여성의 몸이다. 몸에 닿는 감촉이 남다르다. 괜히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현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자자, 일단 진정하고.”
베요네타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첫 번째인가요?”
“응?”
“오셔서 처음으로 절 찾으신 거겠죠?”
물으며 눈에 별이 담긴 듯 반짝이는데… 기대감을 무너트리기가 참 미안해지는 눈빛이었다.
“네가 제일 보고 싶긴 했어.”
대충 지어낸 거짓말에 베요네타의 눈에서 별이 폭발했다.
“아아! 그럴 줄 알았습니다, 주군!”
뒤에 선 그녀의 부하들도 무릎을 꿇었다. 이현은 그녀에게서 몸을 떼고 물었다.
“그런데, 싸움 중이라며?”
뒤늦게 생각이 난 듯 베요네타의 얼굴에 날카로운 살기가 맺혔다.
“아아! 그렇습니다, 주군! 감히 저 크루엘이 주군의 자리를 찬탈하고 모독하고 있으니, 당장 목을 베어 저 은하를 놈의 선혈로 물들여 본보기로 삼으셔야 할 것입니다!”
베요네타가 이를 아득바득 갈며 핏발 선 눈으로 외치는데…….
몰라… 그거 뭐야… 무서워…….
아무래도 쌓인 감정의 골이 만만치 않게 깊은 것 같다. 화해시키기가 생각보다 어렵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빨리 해결하고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
“일단 진정해. 녀석 의견도 들어보고 내가 판단을 내려주지.”
“네, 주군.”
이현이 베요네타와 함께 돌아가니 아시스의 곁에는 푸른색의 슬라임이 있었다. 부정형의 몸체에서 유일하게 딱딱해 보이는 푸른색의 둥근 구체가 이현에게 향했다.
네 기사 중 하나인 기근의 크루엘이었다.
저 푸른색의 구체는 몸의 핵심 기관 같은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는 아티팩트라고 불리는 특별한 보주로, 어마어마한 마력의 힘을 지녔다.
“저… 정말로 주군께서……!”
“너도 잘 있었냐.”
반가움도 잠시, 크루엘의 온몸에서 뭉뚝한 가시가 돋아났다.
“그런데 저 계집은 왜 데리고 오셨습니까?”
“네놈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해 왔느니라. 후후후.”
이현은 베요네타에게 눈을 한 번 흘겼다. 베요네타가 슬며시 눈을 피했다.
“그런 거 아니야. 너, 황제가 되겠다고 했다며?”
슬라임이 몸을 널찍이 펼쳤다.
“폐하께서 이왕 할 거면 제가 좋겠다고 하셨으니까요.”
“…내가?”
“떠나시기 전날 밤, 제가 찾아가서 여쭈니까 그러라고 하셨잖습니까.”
이현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떠나기 전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정확히 어떤 흐름의 대화였는지까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랬을…지도?”
베요네타가 충격을 받은 눈으로 이현을 바라보았다.
“저… 정녕! 저놈을 후계로 지명하셨단 겁니까!”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또 싸움이 날 것이다.
‘자식 넷이 더 생긴 기분이군’
“그래.”
이현이 끄덕였다. 그리고 베요네타의 눈에 충격의 빛이 번지기 전에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크루엘뿐만이 아니야. 베요네타… 아시스… 아낙톤… 너희 중 누가 황위를 이어도 좋았다. 내게는 너희까지 합쳐서 제국이야. 알겠냐?”
내가 좋아하는 녀석들이 제대로 살 수 있는 세상… 그 작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리다 보니 제국이라는 커다란 틀이 생겨났을 뿐이다.
“주군…….”
“폐하…….”
기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 말씀, 저희에게는 선물과도 같습니다.”
“소녀, 다시금 주군께 한없는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현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허술해서 너희들이 서로 피를 보게 한 점은 사과하마.”
만약 제대로 양위 문서를 작성하고 갔으면, 다른 조치를 취했으면 이런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현이 고개를 숙이자 세 기사가 놀라 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폐하!”
“폐하께서 사과하실 부분은 어디에도 없나이다!”
“폐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저희가 미숙했을 뿐입니다!”
다시 고개를 든 이현이 말했다.
“내가 없을 때 제국의 섭정은 크루엘. 크루엘이 바쁘면 베요네타나, 아시스가 대신한다. 불만 없지?”
“예! 폐하!”
“좋아. 그럼… 베요네타.”
이현의 부름에 베요네타가 고개를 들었다.
어쨌든 크루엘과 싸운 사이. 감정의 골이 쌍팔년도 선생들처럼 억지로 악수시킨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베요네타에게 공을 세워 면을 세울 기회를 주면 다른 녀석들도 납득하겠지.
“너와 휘하 질병 기사단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