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제국으로 (2)
키르단 제국의 북동부, 노을엄니 산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
인구수가 이백이 안 되는 이 작은 마을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둘 중 하나였다.
세무관.
상인.
그들의 면면도 이미 알려져 마을의 일부가 된 상황에 갑자기 찾아온 독특한 손님은 단숨에 화젯거리가 됐다.
와구와구…….
어른 손바닥만 한 고깃덩어리 하나가 게 눈 감추듯 아이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크게 입을 벌려 와앙 물고는 야무지게 고개를 흔들어 찢어내고, 오물오물 씹다가 꿀꺽.
좁은 집에 옹기종기 모인 탓에 팔짱을 낀 채 기둥에 기대어 그 모습을 보던 마을 사람들이 탄성을 냈다.
“아유, 잘 먹네.”
“세상에. 저렇게 잘 먹는 애가 다 있네.”
늑대의 머리를 한 자, 도마뱀의 머리를 한 자, 피부가 창백하고 눈이 이마에 달린 자 등 다양한 종족들이 하나같이 신기하게 보는 아이…….
이현이 면면들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내 정책이 성공했군.’
제국의 황제로서 군림할 때 다양한 종족이 융화되어 살 수 있도록 여러 정책을 펼쳤다.
딱히 거대한 정의감이나 사명감에 한 짓은 아니다. 일단 측근이던 아낙톤부터가 뼈만 남은 해골이었고, 그 외에도 온갖 기묘한 녀석들이 많았기에 차별과 거부감을 줄여야 했다.
그래도 백 년이 넘게 지난 일이라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며 내심 기대를 안 했는데…….
‘흐뭇하군.’
가족 같았던 측근들과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에 무척 기분이 좋았다.
“빈아, 꼭꼭 씹어 먹어야지.”
“꼭! 꼭!”
아빠의 말을 따라 한 빈이가 기름 범벅인 얼굴로 웃었다. 이현이 천으로 빈이의 입가를 닦아주고는 앞을 보았다.
식사를 대접하고는 정작 본인은 먹지도 않고 멍하니 빈이를 바라보던 농부가 그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아, 그, 뭐라셨더라?”
“수도로 가는 방향이랑 거리가 어떻게 됩니까?”
“여기는 변방이라 수도까지는 꽤 멉니다. 동북으로 800헥토쯤 되죠. 도보로는 힘드실 텐데… 며칠 후면 상인이 오니 그분과 함께 가시죠.”
참 친절한 사람이다. 이현은 가슴이 훈훈해졌다.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그나저나, 애가 워낙 먹성이 좋아서 곳간을 털었군요. 대가는 지불하죠.”
이현이 주섬주섬 돈을 꺼내려는데 농부가 손을 내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애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요. 잘 먹는 모습을 봐서 좋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만류했다.
“그래요! 대가는 무슨!”
“아기 밥 먹인 걸로 대가를 받으면! 우리가 야박하단 말 들을 거요!”
“음… 이것 참.”
머쓱해진 이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는 내 나라, 내 국민이었던 자들의 온정이라… 뿌듯하고 벅찼다.
“그럼 돌아올 때 선물이나 사오죠.”
* * *
은빛의 성벽과 수십 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성.
매끈한 아치 모양으로 깎인 창가에 서서 무료하게 밖을 내다보던 병사 하나가 하늘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저게 뭐야?”
“뭔데?”
함께 경비를 서던 선임이 뒤에서 물었다.
“대… 대장님, 수레를 끈 남자가 하늘을 달려오고 있습니다.”
“하아… 너 뭐 잘못 먹었냐?”
“진짠데…….”
“이 새끼가 근데… 너 뭐 약 처먹었지?”
“지, 진짭니다! 보십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돌아본 선임이 입을 떡 벌렸다. 마침 가까워진 남자가 작은 수레를 끌고 하늘을 달려 반대편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음흠흠~ 프린세스 카리나~ 음흠흠~ 마법별에서 왔지요~ 음흠흠~”
뭔지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성 안쪽으로 향하는데…….
“폐, 폐하가 계신 곳이다! 야!! 뭐 해! 종 울려!”
“네, 넵!”
땡땡땡땡!
후임 병사가 급하게 종을 두드렸다. 이윽고 온 사방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이현은 여유롭게 웃으며 하늘을 달렸다.
“오랜만이라… 감회가 새롭군!”
부하들과 함께 한 땀 한 땀 돌을 올려 지은 건물인데 여전히 번쩍이며 윤을 냈다. 어딘가에는 그가 장난으로 그린 그림도 남아 있을 것이다.
“빈아. 여기가 옛날 아빠 집이야. 멋있지?”
“우아아~!”
빈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걸 보니 분명 빈이도 마음에 드는 것이다.
흡족하게 주위를 살피던 중, 이현은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황금상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나치의 경례와 비슷한 포즈에, 한쪽 손을 허리에 찬 검의 폼멜에 올린 자세.
살아 움직일 듯 정교하니 장인의 솜씨라 감탄할 만했다.
그 얼굴이 매일 거울로 보던 얼굴과 흡사하지만 않았으면 이현도 감탄하며 박수를 쳤을 것이다.
“저거… 나잖아?”
떠날 때는 없던 게 새로 생겼는데… 그게 심히 부끄러운 물건이다.
만들려면 좀 작게 만들지 저게 뭔가. 하필 황금으로 만들어서 아주 번쩍번쩍 빛나고 있으니 수치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부술까?’
하지만 딱 봐도 부하들이 그를 기리고자 만든 물건.
고작 부끄럽다는 이유로 그걸 함부로 부수는 것도 배려심 없는 행동이다.
이현은 일단 황금상을 무시하기로 했다.
“옥좌의 홀이… 저쪽이군.”
창이 난 커다란 돔. 전체에 오리하르콘을 둘러 청색의 빛을 띤다. 마법 장벽으로 가로막혀 허락받지 못한 자는 들여보내지 않으나 이현의 몸은 가볍게 장벽을 뚫고 들어갔다.
스윽.
길게 깔린 붉은 융단 위에 유모차가 부드럽게 착륙했다.
융단의 끝으로 이현이 시선을 던졌다. 뼈를 이어 만들고 새카맣게 도장한, 화려한 옥좌가 보였다.
“여긴… 하나도 안 변했군.”
그때 이현의 앞에 거대한 은색 갑옷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창, 한 손에는 방패. 해진 붉은 망토가 등 뒤에서 펄럭였다.
철벽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오랜만의 침입자군.”
“오.”
이현은 고개를 들어 거구의 기사를 바라봤다. 한쪽 눈에 긴 흉터가 난 사자의 얼굴이 수정처럼 푸른 한쪽 눈에 이현을 담았다.
자신감과 정중한 살의가 담긴 눈이었다.
“아시스.”
아낙톤이 친구처럼 편한 놈이었다면 아시스는 간언을 아끼지 않는 충신.
‘종말’의 이름을 건 휘하의 네 기사 중 가장 방어에 뛰어나고 믿음직한 녀석이었다.
그리운 울림이 담긴 목소리로 이현이 말했다.
“오랜만이다?”
창끝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터엉!
손에서 떨어진 방패가 땅을 치며 벼락같은 울림을 냈다. 빈이가 흠칫, 놀라 유모차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커다래진 푸른 눈이 잠시 멍하니 이현을 바라보았다.
“폐…하?”
“어, 응. 나야.”
어색하고 긴장돼서 딱히 할 말이 안 떠오르는 와중… 아시스가 격한 기세로 무릎을 꿇었다.
철컹.
“폐하를 뵙습니다!”
오면서 본 제국의 모습이나 이 성의 관리 상태로 부하들의 충성심을 간접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부서져라 무릎을 꿇는 모습은 또 감회가 새로웠다.
“…녀석.”
이현은 아시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때 이현의 뒤로 수십의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하나같이 살벌한 기세로 창을 치켜들었는데… 아시스가 재빨리 손을 펼쳤다.
“멈춰라!”
웅성거리며 멈춘 병사들에게 아시스가 외쳤다.
“예언대로 건국 황제께서 돌아오셨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예언?”
어리둥절한 건 이현이나 병사들이나 마찬가지였으나 병사들은 이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경악하더니 일사불란하게 무릎을 꿇었다.
“폐하!”
“폐하!”
“폐하!”
아는 얼굴은 없는데 저쪽은 알아보는 걸 보면 동상 때문인 걸까. 수치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야… 이거, 오랜만이라 좀 오글거리네.”
이현은 휙휙 손을 흔들었다.
“됐으니까 편하게 있어. 아시스! 자질구레한 건 생략하자!”
아시스가 갈기를 휙휙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죠!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폐하의 귀국을 온 제국에 알리고, 환영 연회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항상 순서니 법도니 따지는 귀찮은 녀석이었다…….
원래 이놈이 이렇게 나오면 아낙톤과 함께 대충하는 쪽으로 몰고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놈도 어디를 싸돌아다니는지 없는 상황.
“그런데 폐하… 그 영애께서는……?”
아시스가 어리둥절하게 빈이를 쳐다봤다. 이현은 유모차에 척 손을 올리고 한쪽 입술을 슥 올렸다.
“내 딸이다. 자, 빈아. 인사해. 아빠 친구인 아시스야, 아시스.”
잠시 아시스의 사자 얼굴을 빤히 보던 빈이가 이현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삼식이.”
“응?”
빈이가 활짝 웃으며 아시스를 가리켰다.
“삼식이… 아빠!”
‘아.’
삼식이는 새끼 사자이니 빈이의 눈에는 닮아 보일 만도 하다.
졸지에 유부남이 된 아시스였으나 당혹도 잠시, 이내 환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경하드리옵니다! 황후마마를 얻으셨다니, 이 제국에 큰 축복입니다!”
“어? 아니, 그건 아니고… 좀 복잡한 사정이 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한담…? 설명하려니 매우 복잡 미묘해서 난감했다. 그 말에 아시스가 흠칫했다.
“복잡…….”
잠시 빈이를 보던 아시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설령 법도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얻은 혈연이시라도 충분히…….”
“아냐!”
“아닙니까?”
“아니다.”
그냥 말 돌리자…….
“그런데 다른 놈들은?”
종말의 기사단을 지휘하던 자들은 모두 넷.
전쟁의 아시스.
죽음의 아낙톤.
질병의 베요네타.
기근의 크루엘.
아시스가 여기 있으니 아낙톤을 제외한 다른 두 놈도 여기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물었는데… 아시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전부 제 불찰입니다.”
“뭔 소리야?”
인상을 찡그리고 묻자 아시스가 곤란한 듯 한참을 침묵했다. 보니, 뒤에 무릎을 꿇은 병사들은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비유하자면 부모님이 일 나간 사이 불장난을 하다가 집을 태워 먹은 자식들 같다.
“폐하의 뒤를 이어 황위를 대리하던 아낙톤은 유랑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요네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크루엘이 이를 막는 중입니다.”
“…뭐?”
“지금 이 궁을 지키는 자는 저뿐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현은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아시스를 쳐다봤다.
종말의 네 기사는 비록 처음 시작은 반 장난이었으나 당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던 네 측근을 모아 결성한 것.
힘도 힘이거니와 의심할 수 없이 강한 충성심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베요네타는 좀 스토커 같을 정도로 과한 충성심을 지녀서 때때로 무서울 지경이었는데…….
“크루엘이 아니라 베요네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그 베요네타가? 뭐, 이유는 물어봤어?”
“마지막으로 한 말은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다는 영문 모를 말뿐이었습니다.”
“무슨 막장 드라마라도 봤나……?”
이현은 이마를 짚었다.
데려가려면 베요네타가 좋겠다… 그렇게까지 생각하던 전력인데 반란이라니?
‘혹시 하데스 놈이 무슨 짓거리라도 했나?’
지구와 이곳이 멀기는 하지만 게이트는 그런 실질적인 거리 따위, 의미가 없게 만든다.
위치만 알면 누구나 올 수 있다.
‘아니… 하데스란 놈이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알았으면 못 덤볐겠지.’
한숨이 푹 나왔다.
“일단… 걔네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