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제국으로 (1)
도약한 사냥개가 하데스에게 쇄도했다.
고여 있던 물에서 별안간 나타난 악어가 덮치듯, 재빠르면서 예측을 할 수 없는 움직임…….
그러나 하데스는 웃었다.
“이렇게 빠르게 들킬 줄이야…….”
하데스가 머리에 뭔가를 쓰는 시늉을 했다. 갑자기 그의 몸이 사라졌다.
슉.
달려들던 사냥개가 멈췄다. 이현은 눈썹을 올렸다.
“호오……?”
단순한 차원 이동이나 투명화라면 사냥개가 놓칠 리가 없다. 다른 차원으로 숨는 능력도 잡아내는 괴물인데…….
츠쿠요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능력인 듯했다.
그때 박수 소리와 함께 하데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단하군요. 훌륭합니다!”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이곳에 있다는 것.
그런데 소리가 사방에서 반사된 듯이 들려왔다. 대뜸 뛴 이현의 주먹이 하데스가 앉았던 의자를 부쉈다.
콰앙!
의자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지만 피와 살은 느껴지지 않았다.
“쳇. 아닌가.”
“진정하시죠. 전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아동 성폭행범들도 항상 사랑이었다고 하더라.”
이현은 주먹에서 파편을 털며 주위를 살폈다.
느껴지지 않는다. 희미한 마력의 파편이나 냄새조차.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때 타나토스가 말했다.
“과연… 클클… 이게 하데스의 그 유명한 퀴네에인가.”
헬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말을 덧붙였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데스의 투구, 퀴네에는 주위 사람에게서 자신을 완전히 감춰준다고 하지요. 단순히 투명화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조소를 띤 하데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진정하시라니까요. 전 당신에게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 온 겁니다.”
“무슨 제안?”
여유로운 태도가 매우 짜증났으나 일단 이야기를 들어볼 가치는 있었다. 하데스의 속셈이 무엇인지 추측도 할 수 있을 테고, 녀석의 능력에 대한 파악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이현은 경계하며 귀를 세웠다. 하데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딸은 우리가 ‘레비아탄’ 혹은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르는 종족입니다.”
명왕들이 술렁거렸다. 다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현이 염라를 바라보자 염라가 말했다.
“레비아탄의 아이는 우리 신들에게 보약처럼 여겨지네. 신의 힘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린다고 알려졌지.”
“클클클… 탐욕을 부르는 과실이라… 곤란하겠어… 클클…….”
삼식이… 아니, 칠죄종 사마엘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 아이는 멸망의 씨앗이 어쩌고… 후회할 거라고 말했지.’
죽는 놈의 단말마라 생각해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 말이었는데… 하데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도 신이란 놈들이 빈이를 노리고 덤벼들 테고 끝내 큰 싸움으로 번질 것이다.
‘그나저나 이놈은 무슨 능력이지? 소리는 나는데 방향을 찾을 수 없고, 기척도 존재감도 전혀 없군. 투명화, 차원 이동 둘 다 아니야.’
하데스가 말했다.
“당신의 딸을 많은 신들이 노리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싸움을 부르겠죠. 저는 그 아이를 숨겨 분쟁을 막을 생각이었습니다.”
“아, 그러셔? 그것참 고맙군. 그런데 네가 내 딸을 잡아먹으려던 속셈이 아니었다고 어떻게 믿지?”
그때 허공에 게이트가 열렸다. 불길한 검은빛이 일렁거리는 검은빛에서 뭐가 툭 떨어졌다.
인간처럼 보이는 존재의 목.
긴 머리채를 지닌 목이 데굴데굴 굴러와 이현의 발끝을 툭 치고 멈췄다.
여신 아마테라스의 목이었다. 고통과 경악으로 가득한 죽은 눈과 이현의 눈이 마주쳤다.
하데스가 말했다.
“그 아이를 노리던 여신의 머리입니다.”
명왕 중 하나인 이자나미가 벌떡 일어났다.
“어… 언니!”
새카만 눈이 하데스를 노려봤다.
“하데스! 이게 무슨 천인공노할 짓거리요! 어찌 우리에게 이럴 수 있소!”
“…….”
팔짱을 낀 이현이 아마테라스의 잘린 머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기억한다. 일부러 보내주었던 바퀴벌레니까.
“토사구팽인가?”
“제가 다소 과격한 방법을 썼다는 것은 인정하죠. 하지만 저는 당신이 사실을 알면 그 아이를 잡아먹어 힘을 키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몰래 데려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자나미가 버럭 외쳤다.
“개소리! 당신이 우리 언니를 이용했음을 모를 줄 아는가!”
“다 대의를 위한 것이었지.”
“내 올림푸스에 이 일을 알려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오!”
언니의 머리를 챙긴 이자나미의 몸이 휙 사라졌다.
“의도는 좋았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이현이 등받이가 부서진 하데스의 의자에 앉았다.
“그런 말을 하는 놈들이 자기가 희생당하는 소의 입장이 되는 건 싫어하더군.”
“…….”
“이건 어때? 네 목을 바쳐. 그럼 내가 아이를 데리고 지구에서 영원히 떠나주지.”
하데스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억지를 부리는군요.”
피식 웃은 이현이 다리를 꼬았다.
“그럴 줄 알았지.”
“그럼 협상은 결렬이군요.”
하데스는 진심으로 아쉬운 목소리였다.
“네 운명이 육체와 결렬이지.”
이현이 천천히 일어났다.
“나 마왕 이현, 여기서 이름을 걸고 선언한다.”
오만하게 선 이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명왕 하데스는 내 손에 죽는다.”
* * *
“오, 형님! 오셨소!”
이현이 집에 돌아오니 길가메시가 빈이를 등에 태우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부엌에서는 송송송 뭘 써는 소리가 들리다가 멈췄다. 일성이 쑥 고개를 내밀었다.
“현 군, 왔어요?”
“아빠!”
빈이가 환하게 웃으며 길가메시의 등에서 양팔을 쭉 뻗었다. 이제 ‘아빠’ 두 단어만큼은 또렷하게 발음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 빈이, 아빠가 보고 싶었어요?”
“우앙!”
아직 긴 말은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빈이가 방긋 웃으며 이현에게 안겼다. 이현은 빈이의 날개를 파닥이는 등을 토닥이며 길가메시를 보았다.
“별일 없었나?”
길가메시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형님. 빈이… 좀 많이 먹던데… 괜찮소?”
한창 성장하는 시기라서인지, 활동량이 많아서인지 빈이는 성인 남성도 먹기 힘든 스테이크 한 덩이를 한 끼 식사로 먹어 치웠다.
여러 차원을 여행하며 별의별 것을 다 본 길가메시라도 체적 이상으로 음식을 먹어치우는 빈이가 좀 이상해 보이기는 했을 것이다.
“괜찮아. 원래 많이 먹어.”
이현은 포동포동한 빈이의 볼에 볼을 비볐다.
“아유, 우리 빈이! 밥도 잘 먹구 잘 이써써요? 그래써요?”
“형님. 말투가 이상한데… 왜 그런 겁니까?”
“쓰흡. 조용히 해.”
“아빠!”
갑자기 빈이가 주섬주섬 품을 뒤적이더니 고깃덩어리를 이현의 입에 들이밀었다.
“빱!”
“헉.”
식사 시간에 아빠가 없으니 챙겨주겠다고 몰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인가.
이현은 감동으로 왈칵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 빈이… 아빠 주려고 챙긴 거야?”
“냠.”
생긋 웃은 빈이가 이현의 입술에 고깃덩어리를 들이밀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고기지만 이현은 날름 받아먹고 맛있게 씹었다.
우적우적.
당연히 맛도 없었지만 그 어떤 진수성찬을 먹었을 때보다 감동적이었다.
“빈아… 아빠는 너무 좋아…….”
아직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어린아이가 아빠를 챙기다니… 세상에 이런 효녀가 있을까!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렇게 순수하고 착한 아이를 잔인하게 잡아먹으려는 것들이 있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는 너무 위험하다.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님을 안 이상, 빈이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믿을 만한 동료들이 필요했다.
아직 추측일 뿐인 하데스의 능력도 명확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
‘아낙톤은 기꺼이 도와주겠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고… 일단 제국에 돌아가 볼까.’
키르단 제국.
이현이 세우고, 다스렸으나 아낙톤에게 물려주고 떠난 나라.
아낙톤마저 떠났으니 지금은 누가 다스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떠난 지 백 년도 훌쩍 넘었으니…….
다시 볼 염치도 없고, 도와줄지도 의문이지만 빈이를 위해서는 가야 한다.
“빈아. 아빠랑 아빠 친구들 보러 갈래?”
“가?”
빨간 눈이 말똥말똥 쳐다본다. 아마 어디론가 간다는 것만 이해했을 것이다.
“응. 가자.”
“형님. 친구들 보러 갈 거요? 갈 거면 나도 같이 가지! 형님 친구들이라면 강하겠지?”
물어보며 근육을 잔뜩 부풀리고 이를 드러내는 모습이, 만나자마자 주먹을 휘두를 기세다. 도움을 구하러 가는 건데 이놈을 데려갔다가는 욕만 얻어먹을 느낌이다.
이현은 그의 어깨를 턱 짚었다.
“아니. 넌 여기 있어. 듣자 하니 여기를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더라. 넌 그놈들 좀 상대해주고 있어라. 며칠 걸릴 테니까.”
길가메시가 흰자를 번들거리며 웃었다.
“가만히 있어도 싸울 놈들이 온다고? 그것도 괜찮군. 크크. 이곳에는 내 여신님이 있기도 하니…….”
흥분을 주체 못 하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된다!
이 녀석, 그 늑대 여자한테 달려가서 애를 낳아달라는 헛소리를 해대면 분명 큐튜브며 SNS에 오늘의 토픽으로 단단히 자리매김할 텐데…….
다시 돌아오면 수배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금방 갔다 온다. 사고 치지 말고 있어.”
길가메시가 뚱한 얼굴을 했다.
“형님… 그 무슨 애 엄마 같은 말이오? 늙었군.”
“…….”
이현의 주먹이 빈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길가메시의 복부를 가격했다.
* * *
보랏빛의 거대한 벌레가 대지에 몸을 뉘고 있었다.
딱정벌레를 닮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길이가 버스 세 대를 합친 것 같다.
다리는 어디 갔는지 없고, 대신 수십 개의 기둥이 아래를 받치고 상아가 벽을 이뤄 집의 형상을 이뤘다.
그 앞에서 열심히 밭을 매던 농부가 기묘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쩌저적.
하늘이 황금색으로 깨졌다.
“엇?”
밀짚모자를 올린 농부의 그을린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검게 광택이 나는 갈퀴를 무기처럼 쥔 농부가 지그시 하늘을 응시하는데…….
“뺘아~”
“야호!”
웬 남성이 균열에서 작은 마차 같은 것을 밀고 튀어나왔다.
하늘에 길이라도 있는 듯 힘차게 마차를 밀며 달리던 남자가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점점 그에게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갈퀴에 힘을 주고 노려보던 농부였으나 마차에 탄 아이를 보고 전의가 줄었다.
양팔을 벌리고 환히 웃는 아이의 모습이나, 어딘지 헐렁한 남자의 태도가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균열이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농부의 집과 가재도구들도 균열에서 튀어나온 괴물들을 잡아 만든 것이니…….
“휴.”
착지한 남자가 농부에게 척척 다가왔다.
갈퀴를 꼭 잡고 농부가 외쳤다.
“좋은 아침이오!”
남자가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아, 좋은 아침. 여기… 키르단 제국 맞나?”
“응? 맞소만…….”
균열에서 나온 자가 제국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심지어 제국 공용어를 쓰는데…….
‘가만?’
검은 머리에 붉은 눈. 농부는 기시감에 눈을 깜박였다.
분명 익숙한 얼굴인데… 왜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당신은 누구요?”
남자가 씩 웃었다.
“지금은… 여행자라고 해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