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명계의 왕 (4)
‘안 되겠다니?’
이현의 말이 염라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출혈을 보지 않기 위해 아량을 베풀어 확인해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쪽의 실수였음이 확인되었으니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신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다.
‘혹시 이놈…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가끔 있다.
갓 신의 힘을 얻고, 기존 성좌에게 도전하는 자들이…….
물론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그만한 힘도 힘이거니와, 다른 성단들에 보일 명분도 필요하지만… 지금 이현이라면 힘도 명분도 충분한 상황.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기세에서 질 순 없는 노릇. 염라는 이현을 노려보았다.
“무슨 뜻인가. 안 되겠다니?”
“책임자만 처벌하고 넘어가 봐야 의미가 없지. 앞으로 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아.”
“이 염라의 이름으로도 보증이 부족하단 말인가!”
염라가 팔걸이를 치고 벌떡 일어났다.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옆에서 부채질하던 선녀들이 겁에 질려 물러났다.
그러나 이현은 염라를 무시하고, 꿇어앉은 병사 관리자를 바라봤다.
“이봐, 당신.”
“어… 예?”
“왜 실수가 일어났지? 책임자를 처벌하기 전에 재발 방지책은 있나?”
“그, 그게…….”
대답을 못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번 일의 책임을 그냥 부하에게 떠넘기고 끝낼 생각이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닌 시스템이 문제인데…….
우물쭈물하던 관리자가 염라의 눈치를 살폈다. 일단 염라대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답은 해야 하는 질문 같았다.
“그럴 줄 알았지.”
이현이 팔짱을 끼고 염라를 보았다.
“내가 오면서 보니 그 명부라는 거 죄다 종이에 먹으로 쓰고 사람이 검수하던데, 맞아?”
“…그런데?”
“저승에는 컴퓨터 없나? 엑셀로 쫙 정리해서 표 뽑고 하면 편하잖아.”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기 전 이현이 일했던 공장에서조차 쓰던 것이 엑셀이다. 저승에는 죽은 영혼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만큼 그 기술이 알려지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염라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의자에 앉았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엑셀? 팡숀? 그런 것을 도입하자는 자도 있기는 했네만…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어리석은 짓이지.”
“뭐?”
‘이래서 어린 것들이란… 쯔쯔.’
혀를 차는 염라의 모습에 이현은 그만 이마를 짚고 정신을 잃고 싶어졌다.
기본적인 엑셀 표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 다산 정약용 선생도 만들어서 정조께 보고를 올렸다는 설이 남아 있거늘…….
입을 쩍 벌린 이현의 얼굴을 감탄으로 오해한 염라가 양손을 벌리며 으쓱했다.
“라떼는 목판을 뾰족한 돌로 긁어 명부를 작성했다. 요즘 사자들은 많이 나아진 게지.”
“그만.”
이현이 손을 들었다.
“됐고. 오늘부터 컴퓨터 도입해서 명부 관리하지. 인텔리 영혼들 많을 거 아냐? 머리 좋은 놈들 뽑아서 가르치라고 하면 하루면 배우겠지. 일단 소수부터 시작해서 차츰 불려 나가자고.”
염라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현의 말은 엄연한 지배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월권. 왕으로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내 호의를 베풀었더니,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래라 저래라인가!”
“흐음.”
이현이 병사 관리자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이.”
“예, 예?”
“하루에 기입 실수가 몇 번 일어나지?”
“그, 그리 많지는…….”
“그래서 몇 번이냐고.”
염라의 눈치를 보며 관리자가 말했다.
“서너 번…….”
“하루에 서너 번이면 적게 잡아도 열흘에 삼십 명이고 한 달이면 구십 명이군.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영혼이 헛되이 죽고 있다는 말인데… 그마저 실수를 발견한 숫자고 대충 넘기거나 이번처럼 아예 모르고 지난 경우를 합치면 훨씬 많겠지.”
붉은 눈이 한심하다는 듯 염라를 바라봤다.
“뭐 대단한 줄 알았더니 별것 아니군. 왕이라고 자칭하는 자가 백 명 정도의 영혼이 ‘실수로’ 죽는 게 우습나?”
염라는 팔걸이를 꽉 쥔 채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이현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염라대왕이라는 작자가 성군은 못 되는군. 이게 소문나면 다들 뭐라고 할까?”
“이, 이놈…….”
화는 나는데…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다. 여기서 자존심 세우겠다고 ‘흥, 나한테 그건 별것 아닌데?’라고 말하는 순간, 저승은 개판이 나버릴 것이다.
이현이 밖에서 한마디라도 뱉어 봐라. 다들 ‘사실 내가 억울하게 죽은 거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테고… 이후 벌어지는 것은 대폭동.
타나토스나 헬 같은 다른 명계의 왕들에게도 조롱거리로 전락할 테고…….
염라대왕은 볼살을 푸들푸들 떨며 말했다.
“이 몸의 아량을 우습게 보지 말아라! 그렇지 않아도… 내 진즉에 그 엑셀이라는 것을 도입하려 하던 참이었으니.”
부서 중 하나에 시험 삼아 사용해보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
“네놈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내 그걸 하려고 생각 중이었다!”
“오, 그랬어? 그럼 뭐 나중에 따로 확인하러 안 와도 되지?”
“당연한 걸 묻지 말아라!”
염라는 흘긋 이현의 옆에 선 강림을 보았다.
‘하필 저 강직한 놈을 데리고 와서…….’
만약 뱉은 말을 지키지 않으면 쌍심지를 켜고 대들 놈이 강림이다.
‘끙.’
머리털이 빠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이현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렇지.”
“또 뭐냐!”
“이번 실수에 대한 보상으로 꽃을 좀 받아 가고 싶은데.”
그 꽃이 향도 좋고 몸에도 좋다지….
이현의 말에 염라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가져가!”
* * *
“저승까지 기껏 와서 그냥 가는 건 아쉽지 않나! 이 몸이 좋은 술집을 아는데 한잔하고 가지!”
염라궁을 나오는 이현에게 강림이 바싹 붙었다.
‘사나이끼리 교류하는 데 술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이현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됐다니까. 나 애 아빠야. 애 봐야 되는데 술 냄새 풀풀 풍겨서 되겠어?”
게다가 이런 놈의 경우, 술도 경쟁하며 마셔서 한 번 마시면 몇 날 며칠 끝장을 보려고 든다.
길가메시에게도 그런 식으로 한 번 데여서… 이후 절대 그놈과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단호한 거부에 강림이 턱수염을 긁적였다.
벅벅.
사포 긁는 소리가 났다.
“으음, 하긴. 그러면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히겠지… 마누라도 자네만큼 강한가?”
“…없어. 사정이 있어서.”
하지만 빈이를 낳은 존재가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이현도 종종 했다.
‘애를 화산에 버려놓고 간 게 정상적인 여자는 아니겠지.’
걸어가는데…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잠시만, 잠깐만요!”
이현이 돌아보자… 퀭한 얼굴의 도깨비가 달려오고 있었다.
때가 낀 허름한 와이셔츠에 알만 올려놓으면 새집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머리가 영락없이 박봉에 시달리는 회사원이다.
덥수룩한 수염을 보니… 집에는 가는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이현의 앞에 선 그가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그 잠깐 달린 것만으로 힘에 부쳤던 모양이다.
“허억, 허억, 여…염라님의 손님 맞으시죠?”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입장에서 수긍하기 조금 어려워지는 질문이다.
빤히 보는데… 갑자기 그가 납죽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응?”
그가 엎드린 채 말했다.
“제가… 그 따님의 이름을 명부에 잘못 기입한 놈입니다. 죄송합니다!”
“일어나.”
남자가 덜덜 떨며 일어났다.
애꿎은 딸이 죽을 뻔했는데도… 그 죄를 과하게 벌하지 말라고 이현이 탄원해준 덕에 감봉도 안 당하고 상사에게 까이는 정도에서 일이 마무리됐다.
그는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현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람이 일하다 실수할 수도 있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어쨌건 잘 해결이 됐고.
이 얼마나 다정한 말인가…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굴렀다.
일이 힘들수록 사람들의 신경도 예민해져서… 작은 실수에도 고성이 오갔다.
이렇게 따스한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피해자에게 들을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크흑… 감사합니다.”
“그럼 난 이만.”
이현이 몸을 돌리려는데… 남자가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자, 잠시만요!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눈물을 팔뚝으로 슥슥 문질러 닦은 남자가 말했다.
“따님의 실수 건은, 제가 특이 케이스라 기억이 나는데요… 분명히 따님의 이름이 명부에는 올라와 있지 않은데, 제사를 지내던 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누락된 것이라고 여겨 명부에 추가했던 것이고요.”
이야기가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현은 눈썹을 모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따님의 제사를 지내셨거나… 지낸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날 원래 죽어야 했던 같은 나이의 여자애 대신, 따님의 이름이 명부에 올라간 거고요.”
남자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제 추측입니다만… 누군가 죽어야 하는 제 딸을 살리기 위해 명부를 조작해 따님의 목숨을 대신 바치려고 한 것 같습니다. 무, 물론 제가 좀 더 꼼꼼히 확인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니 제 잘못이기도 하지만요…….”
변명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어 원래는 말을 하는 것을 망설였으나… 이현의 관대함이 마음을 돌렸다.
강림이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쳤다.
“아, 대리 저주 말이구만. 옛날엔 종종 있었지. 양반 가문이 제 자식들 안 죽이려고 말이야.”
‘그러니까 누가 빈이를 제물로 바쳤다… 이 말이네?’
이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럼 또 내 딸이 명부에 오를 위험이 있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이 해결됐으니 제사를 아무리 해도 이제 소용없죠. 이제 사자들이 그 집으로 출발할 겁니다.”
“그래?”
이현은 강림을 보았다.
“거기 내가 낄 수 있나?”
어떤 놈이 감히 빈이를 제물로 바치려고 했는지… 얼굴을 봐야겠다. 보는 김에 응징도 하고.
강림이 끄덕였다.
“흠, 내가 그 일 맡아서 가는 김에 자네와 함께 가지.”
“좋아,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