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명계의 왕 (2)
“오, 여기가 명계인가.”
뿌연 안개가 낀,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
어두침침한 하늘 아래 유일한 길은 지금 이현의 앞에 있는 긴 포장도로 하나뿐.
죽은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면 갈 길이 하나뿐이라 편할 것 같았다.
“…정확히는 저승이라고 부르오. 여기는 아직 저승이 아니지만.”
“그럼 뭔데?”
“우리는 ‘경계’라고 부르지. 뇌사에 빠진 인간이나 유체이탈을 경험한 자들… 길잃은 영혼들이 떠도는 공간이오.”
두 사자는 흘끔흘끔 이현을 보았다.
본디 산 자가 육신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는 곳이거늘… 이자는 너무나도 쉽게 저승사자의 뒤를 따라왔다.
그것도 보통 인간은 튕겨 나갈 사자들의 통로를 통해.
‘이거 인간 맞아?’
‘몰라, 이거 뭐야, 무서워…….’
“그럼 빨리 가지. 오늘 안에 담판을 지을 예정이니까.”
이현이 길을 아는 것처럼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졸졸졸…….
이내 물소리가 들리더니… 어마어마한 넓이의 강이 앞에 나타났다. 그 너머에는 화사한 꽃밭이 있었다.
강의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섰고, 나무의 앞에 마련된 작은 정자에 두 노인이 앉아있었다.
여든은 다 된 외관과 달리, 현기가 가득한 눈을 한 노인들이었다. 각각 남루한 회색의 한복을 입었다.
“현의옹과 탈의파라는 분들이오. 죄업을 심판하는 신들이시니 예의를 갖추시오.”
“저분들의 허락이 없이는 삼도천을 건널 수 없소.”
“문지기라 이 말이지.”
조용한 시선이 이현을 향했다. 정자의 앞에 도착하자 탈의파가 일어났다.
이현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말했다.
“이봐. 볼일이 있어서 그런데 문 좀 열지.”
예의를 갖추라고 방금 말했건만…….
두 저승사자가 탄식했다.
탈의파의 길게 늘어진 눈썹이 꿈틀했다.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이 왔구나. 옷을 벗어라! 네 죄업을 봐야겠다.”
탈의파가 지팡이를 쑥 내밀었다.
무작정 싸울 생각으로 온 것도 아니고… 옷을 벗는 정도야 해줄 수 있다.
이현은 셔츠를 벗어 탈의파가 내민 지팡이에 걸었다.
“자.”
쇳덩이를 올린 듯 지팡이의 끝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탈의파도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으억!”
콰당!
땅이 움푹 파일 정도의 충격. 옆에서 보던 저승사자들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옆에서 보던 현의옹이 황급히 다가와 탈의파를 부축했다.
“여보!”
그러나… 지팡이를 들 수가 없다. 옷이 지팡이를 고정한 것처럼 지팡이를 누르고 있었다.
탈의파의 주름진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이건.”
업의 무게가… 너무나 크다. 탈의파는 지팡이를 놓고 덜덜 떨며 일어났다.
“옷을… 가져가시오. 당신은 우리가 재단할 수 없는 존재요.”
저승사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탈의파와 현의파는 격은 낮으나 그래도 일단은 ‘신’이다. 그런 이들이 재단을 할 수 없는 존재라니… 이현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두렵다.
이 인간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긴장해서 쳐다보는 저승사자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이현이 몸을 돌렸다.
“그럼 건너간다?”
“마음대로 하시오.”
성큼성큼 걸어간 이현이 강기슭에 도착했다.
“오, 이게 삼도천인가?”
“그렇소.”
“돌아가신 할아버지 얼굴은 안 보이네.”
“…….”
“건너가면 되나?”
또 불쑥 앞서나가는 이현을 저승사자가 재빨리 붙잡았다.
“위험하오!”
“뭐가?”
“삼도천은 그냥 강이 아니오. 수면을 잘 보시오.”
“응?”
저승사자의 말을 듣고 이현이 수면을 보니… 찰랑이는 물결 속에 희끄무레하게 사람의 팔다리가 보였다.
이제 보니… 물결인 줄 알았던 것이 전부 뱀…….
그 뱀들이 벌거벗은 채 떠내려가는 수없이 많은 영혼들을 물어뜯고 있었다.
하나같이 아비규환으로 몸부림치고 필사적으로 팔을 뻗으며 육지로 올라오려고 했지만… 전부 허사.
끝없이 떠밀려갈 뿐이다.
“그럼 어떻게 건너는데?”
“본래 저 두 신께서 업을 평가해 그에 맞는 수단을 준비해주시오. 선한 자에게는 다리를, 아닌 자에게는 강을 헤엄쳐 건너가는 형벌을…….”
그럼 현의옹과 탈의파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이현이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없다.
어디 갔는지 두 신이 보이지 않았다.
“내뺐네? 날 들여보내기 싫다, 이건가?”
아마도 현의옹과 탈의파도 이현을 저승에 들여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한 모양이다.
“이봐. 당신들은 가는 길 있을 거 아냐?”
“그 길은 사자만이 통과할 수 있소.”
“까고 있네. 올 때도 그 말했잖아.”
아차, 그랬던가.
직부사자가 감재사자에게 속삭였다.
“일단 들여보내세.”
“뭐? 자네 미쳤나?”
“어허, 들어보게. 들여보내고… 강림도령께 이끄는 걸세. 강림도 원래 인간이었다가 대왕께 그 강함만으로 사자로 임명받은 분 아닌가.”
그렇다.
저승에는 특이한 인간이 하나 더 있었다. 최근에 한 명 더 늘기도 했지만… 그 인간은 아르바이트 같은 것이니 예외고.
“좋은 생각이군. 강림이시라면 저 인간을 제압할 수 있을 게야.”
얘기를 마친 직부사자가 이현에게 말했다.
“그럼 길을 부르겠소.”
그가 강을 향해 외쳤다.
“이리 오너라!”
촤아아!
강 건너에서 돌다리가 고무처럼 길어지더니 기슭에 쿵, 다리를 박았다.
“오… 이거 신기하네.”
“가십시다.”
돌다리를 건너자 이번에는 너른 꽃밭이 나왔다. 꽃밭 너머에는 높은 성벽이 보였다.
“여기부터 저승이오.”
“생각보다 화사하네.”
“꽃은 건드리지 마시오. 삼신께서 매우 아끼시는…….”
뚝.
막 노란 꽃을 꺾은 이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미안.”
꽃밭 한쪽에서 쨍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거기!”
이현은 눈썹을 올리며 그녀를 보았다.
정수리를 기준으로 반은 밀어서 스크래치를 내고, 나머지 반은 길게 늘어트린 검은 머리, 귀, 코, 입술에 피어싱을 하고 목에는 초커까지 찼다.
입은 새카만 가죽옷도 상당히 펑키한 것이… 도무지 이 꽃밭과 어울리는 모습이 아닌데…….
한 손에는 물뿌리개를 들고 가죽옷 위에 앞치마를 두른 게 영락없는 정원사다.
그녀가 화난 얼굴로 다가왔다.
“함부로 꽃을 꺾으면 어떡해! 아저씨들, 영혼 관리 똑바로 안 해요?”
두 사자가 쩔쩔맸다.
“아니, 그게…….”
“이게 우리 잘못은 아니고…….”
본인 때문에 사자들이 욕을 먹으니 이현도 약간 미안했다.
“아, 미안. 꽃이 예뻐서 우리 애 하나 갖다줄까 했거든.”
“애?”
여인이 이맛살을 모으고 이현을 보다가 기겁했다.
“아니, 산 사람이네? 아저씨들! 이게 뭔 일이에요?”
“그러는 너도 산 사람이잖아.”
본 순간부터 느껴졌지만… 생생한 심장의 고동과 마력을 보면 분명했다. 여인이 이현을 아래위로 살피고는 물었다.
“헌터? 난 A급 헌터 바리데기라고 하는데 당신 뭐야?”
바리데기는 세계적인 자신의 명성을 믿었다.
등급은 A급이지만… ‘꽃 시리즈’로 시체의 일부만 있으면 죽은 사람마저 되살리는 그녀의 앞에서는 재벌가의 회장들조차 굽신거렸다.
그러나 이현은 여전히 뻣뻣했다.
“아, A급 헌터 이현인데.”
“당신도 뭐 특별한 스킬이 있는 모양이지? 아무튼 그래도 여기 꽃은 꺾으면 안 돼. 내놔.”
그녀가 장갑 낀 손을 쑥 내밀었다. 이현은 노란 꽃을 빤히 보았다.
빈이 머리에 꽂으면 딱 어울릴 것 같은데…….
“하나쯤은 괜찮지 않아? 꽃 한 송이잖아.”
“아니, 이봐! 그게 그냥 꽃인 줄 알아? 그거 살살이꽃이야! 그거 하나 키우는 데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노력하는데… 그거 한국에서 팔면 1억이 넘어!”
“오…….”
그렇다니 별것 아닌 것 같았던 꽃이 달라 보인다.
하기야 세상에는 별것 아닌 듯해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물건이 많으니…….
“그럼 내가 사면 안 되나?”
“이번 년도 예약 꽉 찼어.”
“흠, 아쉽군. 마음대로 꺾은 건 미안하게 됐다.”
이현은 그녀의 손바닥에 꽃을 얹어 주었다. 어차피 갈 길도 바쁜데 꽃 한 송이 갖고 실랑이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가자고.”
몸을 돌리며 손짓하니, 저승사자들이 목줄 끌린 개처럼 따라간다.
“음.”
“나중에 또 보지, 바리데기 양.”
저승사자 둘을 호위처럼 대동하고 걸어가는 이현을 바리데기가 황당해서 쳐다봤다.
삼신할머니와 계약해서 서천꽃밭을 관리하고, 그 대가로 꽃을 받는 그녀와 달리… 이현은 저승사자들에게 꿇리는 위치가 아닌 듯 보였다.
‘뭐 하는 놈이야?’
이현의 눈앞에서 거대한 문이 열렸다.
드러난 것은 조선시대 한양의 길가를 연상시키는 풍경. 화기애애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복장만이 현대적이었다.
“오, 여긴 뭐냐? 저승사람들 사는 곳?”
관공서가 있을 법한 풍경이다.
“선한 이들이 극락으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곳이오. 자, 이쪽이요.”
저승사자의 안내를 따라가니…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나타났다.
명패에 쓰인 것은 ‘강림’ 두 글자.
직부사자가 문을 두드렸다.
“대장! 대장!”
쿵쿵쿵!
“어떤 놈이 대낮부터 시끄럽게 지랄이냐!”
문이 열렸다.
끼이익…….
험상궂은 남자가 한복 앞섬을 풀어헤친 채 마당에 앉아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에서는 광채가 흐른다.
저승 최강의 남자라고 불리는 강림도령이었다.
행여나 제게 불똥이 튈까, 직부사자가 재빨리 이현의 등을 밀쳤다.
“저분이 우리 상관이니 얘기해보시오.”
“오, 그래?”
강림이 호리병을 들어 꿀꺽꿀꺽 들이켰다.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수염으로 흐른 술을 털이 숭숭 난 팔뚝으로 닦은 강림이 이현을 바라봤다.
“댁은 뭐야? 산자가 어떻게 저승에 왔지?”
“명부가 잘못된 것 같은데 고쳐야겠어. 당신이 할 수 있나?”
다시 술을 마시려던 강림의 몸이 굳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핫! 뭐? 명부를 고쳐? 이거 나 같은 놈이 또 있었군. 재미있는데.”
강림이 술을 내팽개치고 일어났다. 2미터에 가까운 키가 불쑥 일어나니… 산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대청마루에 대충 기대어 놓았던 태도를 든 그가 말했다.
“사실… 명부가 꼭 정확하진 않지. 최근에는 실수도 많으니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어.”
“오.”
이 녀석, 말이 통하는 놈이군.
이현이 반가워하는 찰나 강림이 태도를 뽑았다.
스르렁!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막무가내로 명부를 보여줄 순 없거든.”
칼이 이현의 목을 겨눴다. 강림이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덤벼. 날 꺾으면 명부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