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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한 초월자는 딸바보-58화 (58/150)

58화. 부모의 책임 (3)

일사천리.

준모의 지난 하루는 그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차량으로 이동하기를 몇 시간.

날이 점점 추워져 롱패딩을 입었는데도 뼛속까지 한기가 침투했다.

서스펜션이 좋지 않은지, 그만큼 길이 궂은 것인지 덜컹거릴 때마다 충격이 척추를 때려 시큰거린다.

준모는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성애가 낀 창밖을 보았다.

우중충한 하늘빛이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정말로 합법적인 일이 맞기는 할까. 속은 게 아닐까.

의심하고 싶지는 않으나…….

말도 없이 몇 시간을 이동하는 러시아인 운전수를 보고 있으니 의구심이 목구멍에서 춤을 췄다.

“저, 저기…….”

말을 걸려고 하자 옆에 앉아있던 정장의 사내가 본인의 입 위에 조용히 검지를 올렸다.

대체 어디를 가기에 이러나.

점점 두려움이 쌓여가는 찰나…….

갑자기 차가 멈췄다.

러시아어로 뭐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눈보라가 거세게 차 안으로 몰아쳤다.

“헉.”

앞을 가렸던 손을 내리니… 짠 내가 눈송이와 함께 밀려들었다.

부두…….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의 러시아 추코트 반도 끝자락의 부두였다.

한창 하역 중이던 덩치 큰 선원들이 준모를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이… 이거 설마.’

새우잡이 어선.

순간 떠오른 끔찍한 단어에 준모는 홱 몸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왔던 정장의 사내가 핸드폰을 건넸다.

“받으시죠.”

전화를 받자, 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리나?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계약했잖아. 못 무른다?

“새우잡이 어선이라고는 안 했잖아요! 지금 날 어선에 노예로 팔겠다는 겁니까!”

이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임금 1억짜리 노예면 할 만하지. 그리고 새우잡이 아냐. 대게잡이다. 아무나 못 하는 거야.

베링해의 대게잡이는 전 세계의 사나이를 꿈꾸는 자들에게는 인기 있는 직업이다.

게이트 폭발이 터지기 전에도 모든 직업 중 사망률 1위의 놀라운 수치를 자랑한… 그야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표본.

“나… 난 이거 못해요. 돌려보내 주세요!”

듣고 있던 이현은 기가 막혔다.

―이건 뭐… 어이, 7억을 그럼 그렇게 쉽게 갚을 줄 알았어? 난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그럼에도 수락한 건 당신이야.

“그, 그래도…….”

지금 잠깐 전화를 한 것만으로 손이 얼어붙는 것 같다.

이런 추위에 배링해에서 대게잡이라니… 그 악명을 잘 모르는 준모에게조차 지옥의 노예 체험과 동의어로 들렸다.

우물쭈물하는 준모의 태도에 이현이 짜증을 냈다.

하여간 이 도박중독자들의 의지박약에는 정말 신물이 난다.

―당신이 도박 중독인 거 모를 줄 알아?

가슴이 서늘하다… 심장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준모는 손끝까지 덜덜 떨렸다.

빚을 알아낸 시점에서 눈치챘어야 했다. 그가 그 빚이 어떤 경위로 발생했는지도 알 거라는 사실을…….

인간은 어찌도 어리석은지, 눈앞의 거금에 눈이 멀어 당연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아니… 알고도 모른 체했던 것이다.

부디 모르기를 바라며…….

“예? 아… 아닙니다. 중독이라니요! 그냥… 몇 번 재미로 한 게 답니다.”

―어쭈? 거짓말을 하시네? 당신 빚 전부 도박 빚이잖아. 내 돈 빌려서 도박으로 갚겠다는 생각이나 했겠지?

정확히 마음이 찔린 순간 전의가 상실되는 기분이었다.

―난 거짓말은 안 해. 이건 당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야.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당신에게 달렸고.

“…제 아내와 자식들은 다시 볼 수 있는 겁니까?”

―일 년에 세 달 정도는?

어업 기간이 9개월쯤 된다고 들었으니,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참고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당신이 간 그곳은 거대 헌터 길드인 블랙벤더가 운영하고 있어.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해.

블랙벤더의 악명은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고… 특히 준모처럼 도박에 빠져 제 3금융의 손을 빌려본 자들에게는 마피아와 동의어였다.

추위와는 다른 오한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란 말입니까!”

―응, 그러려고 일부러 거기 보낸 건데?

태연한 말에 준모는 말문이 막혔다.

―당신 같은 도박중독자들의 특징이 뭔지 알아? 블랙홀처럼 주변 사람들을 나락으로 끌어당긴다는 거야.

이현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아내를 도박판으로 끌어들이고, 애들은 모텔을 전전하게 만들고… 키워준 아버지에게 빚을 지게 만들려고 했지.

이미 준모는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다.

원래는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로 가차 없이 태워버려도 무방하다만… 일성과의 정을 생각해 재활용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나? 사람처럼 사는 법부터 배워. 거기가 네 배움의 전당이다.

뚝.

전화가… 끊겼다.

망연자실해 핸드폰을 바라보는 준모에게 정장의 남자가 손짓했다.

“가시죠. 바쁘니.”

* * *

전화를 끊은 이현이 거실로 나왔다.

“아뺘!”

거실에 앉아있던 빈이가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불현듯 어떤 감정이 이현의 가슴에 스쳤다.

준모를 대게잡이 어선에 태운 것은 비단 일성과의 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일성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 탓.

나도 일성의 입장이었으면, 설령 준모가 도박에 찌든 것을 알았더라도 돈을 빌려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제 창자를 끊으면 끊었지, 빈이와의 관계를 끊지는 못했을 터.

“현 군.”

뒷짐을 진 일성이 다가왔다.

“준모 씨, 잘 도착했답니다.”

“그런가요…….”

일성은 어쩐지 복잡한 표정이었다.

“현 군.”

“네.”

먼 곳을 보며 일성이 말했다.

“준모가… 뭔가 나쁜 짓을 저지른 거지요?”

준모는 잘 숨겼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나… 함께 필사적으로 대출을 받으러 다니며 일성은 문득 떠올렸었다.

게이트 폭발 이전… 준모의 일로 빚을 독촉하러 온 이들.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준모의 얼굴과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한 눈빛을 어찌 어릴 때부터 키운 부모가 못 알아볼까.

그리고 이현이 내건 제안도…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것이라기에는 너무 혹독했다.

평소 이현의 성정이라면 하지 않을 제안.

그저 알면서도…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해 덮어두었을 뿐.

“…….”

이것이 부모의 감이라는 건가. 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도박 빚이었습니다.”

준모의 행적과 그를 보낸 곳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듣는 동안 일성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도박… 사채… 이현이 숨기려고 한 이유도 납득이 갔다.

“그랬군요.”

“미안합니다.”

일성에게는 하나뿐인 아들… 그것도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자식을 상의도 없이 먼 타향에 보내버렸으니 원망받아도 어쩔 수 없다.

일성은 고개를 저었다.

“게이트 폭발에도 살았으니 운이 좋은 아입니다.”

이현의 재력과 힘이라면 빚을 전부 갚아주고, 새로운 일자리에 집까지 주는 것도 가능했겠지.

그러나 만약 무작정 빚을 갚아주고 취직시키는 선에서 끝났다면…….

준모는 도박에 빠져 다시 빚을 졌을 것이다. 가족들은 다시 파탄에 빠졌겠지.

“도박을 끊으려면, 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편이 최선이겠지요.”

이현은 혹독하지만 정말로 인생을 다시 살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며느리분도 도박 중독 상담을 받게 했고, 일자리도 알선했습니다. 손주분들은 일단 임대 주택 하나를 빌려 머물게 했고요. 언제든 보러 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 과정에 돈은 별로 들지 않았다. 모두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복지 시스템이었다.

지금까지는 사채업자들을 피해 다니느라 받지 못한 복지였다.

혹시라도 일성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말은 안 할 생각이지만… 이현은 7억이라는 돈은 그냥 없던 것으로 칠 셈이었다.

만약 준모가 죽으면 그걸로 끝. 빚은 완전히 탕감될 것으로 칠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에 7억이라는 빚을 떠넘기는 것은 너무 잔인하니.

애 아빠가 할 짓이 아니지.

“고마워요, 내가… 내가 현 군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네요.”

“행여나 대신 갚겠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가족 아닙니까? 저희도.”

그 말에 일성은 가슴이 뭉클했다.

가끔 보면… 이현은 소탈한 것 같다가도 참으로 속이 깊었다.

보통 사람은 어마어마한 힘과 권력을 지니면 타락하여 오만해지기 마련인데… 그는 마치 돈과 권력을 모두 가져보았다가 잃어본 듯, 천 년을 살았다는 것은 정말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술 한잔해야겠네요.”

* * *

이른 새벽.

오랜만에 마신 술이 과했는지, 늙어서 잠이 부족해선지 일성은 텁텁함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거실로 나오자 보일러를 틀었음에도 묘한 한기와… 드라이아이스 같은 안개가 보였다.

집안에 안개라니 기묘한 일이다.

일성은 의문을 느끼며 냉장고로 향하려다가, 문득 심상치 않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현관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헉.”

새카만 갓과 도포. 분을 칠한 듯 하얀 얼굴. 다크서클이 짙은 눈에 푸른 입술…….

저승사자의 모습이었다.

두근두근…….

이 집에 저승사자가 올 이유가 무엇인가.

‘나를… 데리러 왔나.’

아끼던 술을 꺼내 마신 것이 다행이다. 어쩌면 아들놈의 생존을 확인하게 된 것도… 이현이 그들을 책임지게 된 것도… 모두 고독한 늙은이를 안쓰럽게 본 신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일성은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드륵.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저승사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앞에 발이 멈췄다.

저승사자가 한동안 일성을 가만히 보는데… 그 어깨 너머로 이현의 얼굴이 스윽 나타났다.

“뉘쇼?”

“허미! 깜짝이야!”

의외로 소시민적인 비명을 내뱉으며 물러난 저승사자가 이현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찌 산자가 사자를 보는가!”

“앞에 있으니까 보지. 뭐야? 저승사자? 뭔 일로 왔어?”

저승사자를 보고도 무슨 마실 나온 동네 아저씨 보는 태도다. 저승사자는 예상외의 일에 당황하면서도… 저승사자다운 위엄을 회복해 턱에 힘을 주고 말했다.

“영혼을 데리러 왔네. 비키게.”

이현은 눈썹을 모으고 일성을 돌아보았다.

“일성 할아버지 말이야?”

저승사자가 일성을 한 번 흘긋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파란 손톱이 이현의 방을 가리켰다.

“이, 빈. 아기를 데리러 왔네.”

저승사자가 내뱉은 말에 이현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누굴 데리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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