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부모의 책임 (2)
“뺘아!”
작은 범퍼카에 탄 빈이가 이현에게 손을 흔들며 출발했다.
이른 아침부터 키즈카페에 온 상태.
이현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번졌다.
“벌써 한 손 운전을 마스터하다니… 우리 빈이, 레이서의 자질도 있었나……!”
사실 앞뒤로 움직이며 여기저기 박고 있을 뿐… 운전이라고 하면 애석할 실력이었으나… 아빠 필터를 낀 이현의 눈에는 화려한 드리프트와 코너링으로 보였다.
끝을 모를 재능에 감탄이 나올 지경…….
이현은 머릿속 성장계획표에 새로이 레이서를 추가했다.
‘아니지… 레이싱은 취미로도 할 수 있으니… 위험 부담도 있고…….’
교통사고 좀 난다고 빈이가 다치지는 않겠지만, 티끌만큼의 상처도 주고 싶지 않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
이현은 슬쩍 레이싱을 ‘장래’에서 ‘취미’ 분야로 옮겼다.
그때, 그의 뒤에 새카만 정장을 입은 남자가 접근했다.
“이현 님?”
이현은 뒷짐을 진 채 끄덕였다.
“맞는데.”
“쉐도우 로드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여기…….”
그가 건넨 것은 갈색의 서류 봉투.
안에는 다발의 서류와 금색 스마트폰 하나가 들어 있었다.
“로드께서 앞으로 연락은 그 폰으로 해달라고 하십니다.”
“오, 무슨 첩보 영화 같네.”
실없는 소리를 하며 봉투를 받자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그럼 전 이만.”
“땡큐.”
이현은 서류를 펼쳤다.
안에 든 것은 일성의 아들, 준모의 기록.
“흐음…….”
붉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게이트 폭발 이전… 준모는 나름대로 건실한 중소기업의 사장이었다.
그러나 회사가 상승세에 접어든 시기, 골프를 치다가 알게 된 지인을 통해 마작을 접하며 그의 삶은 단숨에 수직하강했다.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고 쫓기던 와중 터진 게이트는 그에게 복이었다.
사채업자들이 괴물들에게 전부 죽은 것이다. 은행 업무가 마비되고 혼선되는 와중에 그의 채무도 사라졌다.
그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다행히 일은 많았고 한 회사를 이끌어본 가닥이 있어 어디서든 필요한 인력이 됐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그는 최근 다시 도박에 손을 대어 빚더미에 올랐다.
이번에는 경륜에 화투… 아내까지 끌어들였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이 자그마치 6억 7천.
제 3금융까지 동원해 돌려막기를 한 탓에 나가는 이자도 무시무시했다.
집도, 차도 전부 팔고 빚만 남은 채 모텔방을 전전하는 상황.
“하아…….”
이현은 한숨을 쉬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건… 갱생불간데.
황제로 키르단을 다스리던 시절에도 당연히 음지에서는 도박이 횡행했다.
치료를 해보려고 노력도 했으나…….
도박 중독은 마약과 같아서, 치료가 거의 불가능했다. 치료가 됐어도 평생 참는 것이지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
괜히 마약과 같은 취급이 아닌 것이다.
차라리 마약을 처먹고 혼자 죽으면 낫지… 도박 중독자들은 반드시 주위 사람들의 돈을 빌리고, 보증을 요구하는 등 광범위하게 민폐를 끼쳤다.
부모가 자식을 팔아 그 돈으로 도박하고, 친구가 평생 모은 돈을 훔쳐 도박하고…….
“어쩐다.”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것이 모토이나… 일성은 이현에게 더 이상 ‘남’이 아니다.
또한 실제 나이로 치면 훨씬 어리더라도… 훌륭한 인품으로 남을 돕고, 베풀 줄 아는 이는 나이에 불문하고 우대하는 것이 그의 원칙.
돈을 빌려주게 둘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또다시 돈을 빌리러 올 테고… 그것이 안 되면 보증을 서달라거나 도장을 훔쳐 대출받는 등의 악순환이 이어지겠지.
사채업자가 집 문을 두드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이현은 황금색 폰을 켰다.
전화번호부에 들어가니 익명의 전화번호가 단 하나 있었다.
전화를 걸자… 잠시 후, 지태가 전화를 받았다.
―네, 형님.
“지태야. 너 혹시 일반인 은행 계좌 정지도 되냐?”
―그거야 쉽죠. 약간의 개인정보만 있으면 됩니다, 형님. 스위스 은행 빼고요.
부탁하는 입장에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이 녀석…….
징징거리는 것과 달리 의외로 암흑가 보스가 적성에 맞는 것 아닐까?
“그럼 부탁 하나만 더하자.”
* * *
“예? 정지라니요?”
은행원이 일성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 보이스피싱 계좌로 확인되셔서 출금이 불가능하세요, 고객님.”
준모와 미순의 얼굴에서 핏기가 하얗게 빠져나갔다.
혼잡한 시간을 피해 일부러 오전에 왔는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가…….
방금 전까지 일성의 명의로 2억을 대출받을 기대로 심장이 뛰고 있었는데…….
“아마 다른 계좌도 전부 정지되셨을 거예요.”
가장 당황한 것은 계좌 주인인 일성이었다.
“내가 보이스… 그거를 할 리가 없잖아요. 내가 나이가 이런데…….”
“그 부분을 저희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요. 요즘 유행하는 신종 사기 수법일 수도 있으니까, 경찰 쪽에 한 번 문의를 넣어 보시는 게 어떠실까요?”
준모와 미순은 급히 일성을 끌고 다른 은행에 가보았으나… 허사였다.
모든 계좌가 일시 정지.
신규 계좌 개설도 불가.
경찰서에 가도 당장은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미안하구나.”
“…….”
경찰서 근처의 카페에 온 준모와 미순은 허탈한 눈빛으로 바닥만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는 일성은 가슴이 쓰렸다.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아들 내외의 태도를 보아하니 당장 급전이 필요한 것이 분명한데…….
입안이 모래를 씹은 것처럼 썼다.
“얘들아. 내가 현 군에게 부탁해보마. 좋은 사람이니, 도와줄 게다.”
준모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현 군이라면 아버지의 동거인인 B급 헌터.
아버지라면 돈을 갚지 못해도 용서해주겠지만… 그가 용서를 해줄까?
사채업자들도 무서운데 헌터까지 쫓아다니면 그때는 답이 없다. 헌터들 중에는 기묘한 초능력으로 사람을 찾는 자도 있다고 들었다.
그가 사채업자들과 협력이라도 하면 그때는 끝장이다.
진짜 시체가 될 수도 있다.
“잠깐만 여기 있어라.”
그때, 일성이 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모는 막으려고 엉덩이를 떼려다가… 다시 붙였다.
‘아냐. 따서 갚으면 그만이잖아?’
꿀꺽.
수십억을 따서 빌린 돈에 이자까지 깔끔하게 갚으면 B급 헌터의 신뢰도 얻는… 일거양득의 기회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 일성의 얼굴이 이상했다.
“예?”
반문하며 준모를 본 일성이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어… 네, XX카페예요. 네, 일단 알았어요. 10분이요? 예에…….”
전화를 끊은 일성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얘들아, 현 군이 차를 보내준다니까 잠깐 기다려보자.”
“아, 예, 아버지.”
잠시 후, 새카만 고급 세단 한 대가 카페 앞에 섰다.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 차림의 남자 두 명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이현이 나왔다.
장정들은 차 앞에 손을 모아 서고… 유모차에 빈이를 태운 이현이 카페에 들어오는데…….
일상복 차림인데도 그 카리스마가 범상치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재벌집 막내아들인가?”
“무슨 드라마 촬영 아니야?”
일성도 놀라 이현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어딘지 모르게 헐렁한 이현과는 다른 느낌이다.
“와…왔어요?”
“예, 할아버지.”
척척 다가온 이현이 일성의 옆에 앉았다. 붉은 눈이 차분히 준모 내외를 응시했다.
“돈이 필요하다고? 얼마랬지?”
“예, 아… 2… 2억 조금 더…….”
이현이 검지로 식탁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렸다.
“줄 수는 있는데… 내가 당신들 신용을 좀 조사해봤거든. 빚이 많던데? 7억쯤? 2억 갖고 되겠어? 이자 내기에도 벅찰 텐데.”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해야죠.”
“난 여기 할아버지는 믿지만, 당신네들은 못 믿어. ‘알아서 한다’는 말만 믿고 거금을 턱 빌려줄 순 없지. 그러니까 다른 제안을 하겠다.”
이어진 말에 준모가 입을 떡 벌렸다.
“지금 있는 빚, 내가 전부 갚아주지. 이자는 연 2%.”
“저… 전부 말입니까?!”
B급 헌터쯤 되면 재력이 유명 연예인들 못지않다고는 들었지만… 그런 거금을 아무렇지 않게 전부 갚아주겠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단 말인가.
이현이 창밖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정장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서류 가방을 들고 오더니… 식탁에 올려 척 열어 보였다.
“헉.”
안에 빼곡하게 들어찬 5만 원권.
그 압도적인 박력에 겁이 날 지경이었다.
이현이 말했다.
“대신… 내가 지정한 사업체에 가서 일을 해줘야겠어. 다소 위험하지만, 합법적이고 페이는 세지. 평균 연봉 1억.”
“헉.”
지금이야 티비에서 무슨 헌터가 100억을 번다, 재벌은 1,000억을 번다, 하여 억을 우습게 보는 이들이 많으나… 현실적으로 연봉 1억은 쉽게 말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작지만 사업체도 운영해본 준모의 입장에서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일 년에 1억을 안정적으로 벌 수 있으면 누구나 혹하기 마련.
“어떻게 일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7년만 빡세게 일하면 빚은 청산할 수 있어. 하겠나?”
꿀꺽.
위험하다… 하지만, 사실 지금도 언제 사채업자가 들이닥칠지 모르니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인 상황.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미리 알려주면 안 갈 수도 있으니, 안 알려줄 거야. 하지만 1억을 버는 만큼 꽤 힘든 일이라는 것만 알려주지. 생체실험당하는 것도 아니고 전쟁터에 용병으로 팔려 가는 것도 아니니까 안심해.”
사실 이현은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일성의 아들이라 봐준 것이다.
비슷한 망상을 하고 있던 준모가 뜨끔했다.
‘B급 헌터가 보증하는 연봉 1억의 일자리…….’
일단 당장 빚을 모두 변제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당신이 어떻게 돈을 갚을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내가 제안하는 일보다 좋진 않을 거야.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나?”
이현의 말이 쐐기를 박았다.
그라고 죄책감이나 양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돈을 빌리려고 하며 몇 번이나 후회하고 고민했고… 모텔방에서 잠자는 아이들을 두고 나올 때는 눈시울이 시큰했다.
크게 따서 빚만 갚으면 앞으로는 건실히 살겠다… 잠들 때마다 다짐했던바.
“하겠…습니다!”
“좋아.”
이현이 서류 가방 위로 손을 내밀었다. 준모가 그 손을 굳게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