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지구는 언제나 흐린 뒤 흐림
일본에 갑작스레 나타난 빛의 기둥.
보라색과 푸른색의 요사스러운 조화로 이루어진 기둥은 가까이서 보면 기둥이 아닌 하늘에 난 거대한 균열이었다.
성층권까지 솟구친 게이트.
높이와 달리 폭이 얇은 탓에 기둥처럼 보이는 것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얇을 뿐, 자그마치 백 미터가 넘는 폭이라 어지간한 A급 게이트를 거뜬히 웃돌았다.
“이게 멸망급 게이트…….”
일본의 S급 ‘펑크 사무라이’가 다프트펑크를 닮은 투구 너머로 중얼거렸다.
인류의 역사를 영원히 바꿔 놓은 멸망급 게이트.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창 북적이던 오사카의 한복판에 갑작스레 생긴 탓에 이미 주위는 아수라장…….
대피가 제대로 안 되어 밟혀 죽고 압사당한 이들의 시체도 보이는데… 게이트 공략 이전에는 수습이 어려워 방치한 탓에 지옥과도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한 가지 의문인 점은 아직까지 게이트 밖으로 이탈한 것으로 확인된 괴물이 고작 세 체였다는 점이다.
운 좋게도 현장에 있던 한국의 S급… 불스아이 병장과 쉐도우 로드의 활약으로 금방 정리되었다는 소식.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 같이 사진도 좀 찍고.’
과거 한일 관계는 서로의 정수리에 핵미사일이 떨어지기를 기원하는 관계였지만…….
한류의 파도가 몇 차례 덮치며, 지금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한국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좋았다.
펑크 사무라이는 게이트 근처를 두리번거리다가 쪼그려 앉은 두 남자를 발견했다.
불스아이 병장과 쉐도우 로드다.
그 둘은 유모차를 향해 열심히 딸랑이를 흔들고 있었다.
“꺄르륵!”
빈이가 양손을 흔들며 좋아한다. 세상 무해한 광경이다…….
‘아니, 잠깐. 애를 데리고 있으면 어떡해!’
곧 세계를 지킬 싸움이 벌어질 예정인데 애를 데리고 딸랑이나 흔들고 있다니… 애를 구했으면 당장 어디론가 피신해야 하지 않나!
펑크 사무라이는 상식적인 조언을 설파하고자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데… 애의 모습이 이상하다.
“뿔?”
게다가 꼬리까지! 탐지계 스킬에 뭔가 심상찮은 마력까지 감지됐다.
“이봐요. 그 아이는 뭡니까?”
갑자기 일본어로 뭐라고 외치며 다가오는 펑크 사무라이의 모습에 명우와 지태가 마주 보았다.
“뭐라는지 아십니까?”
“빈이가 뭐냐는데요?”
“빈이를 사냥할 속셈인가…….”
총으로 손을 뻗는 명우를 지태가 제지했다.
“제가 얘기해보죠.”
다년간의 애니메이션 시청 경력으로 단련된 일본어를 사용할 때!
지태는 척 서서 일본어로 물었다.
“제 아는 형 딸인데 무슨 일이셔요?”
펑크 사무라이가 주춤, 물러났다.
“…왜 그런 징그러운 말투로 얘기하죠?”
“제 말투가 어때서요?”
“17살 여고생 같은데요?”
“…….”
애니메이션으로 일본어를 배운 폐해가 나타나 버렸다. 지태는 근엄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시고요.”
“아는 형 딸이면… 그분이 아인이랑 결혼이라도 했다는 뜻입니까?”
일본에도 오타쿠 중에 아인과의 결혼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결혼까지 간 사람은 아직 접한 적이 없지만… 어딘가에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2D 캐릭터와도 결혼하는 시대인데…….
“근데 그 형이라는 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지태가 멍하니 게이트를 보았다.
“게이트에…….”
“…….”
게이트 폭발 때 빨려 들어갔다는 얘기인가…. 갑자기 접한 부고에 펑크 사무라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게이트가 일렁였다.
뭔가가 나온다는 의미. 펑크 사무라이가 재빨리 검을 빼 드는데…….
이현이 툭 튀어나왔다.
“아, 형님!”
“형님!”
S급 헌터 두 명이 집 나간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본 개처럼 쪼르르 달려간다.
펑크 사무라이는 양손에 검을 들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형님, 신이라는 놈은 어떠셨습니까?”
“별것 아니더라. 빈이는?”
“제가 열심히 놀아주고 있었습니다, 형님.”
“오, 땡큐.”
뭐냐, 이 인간은?
펑크 사무라이는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묘한 압박감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게이트가 한 번 더 일렁였다.
파직파직.
전류가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게이트 전체가 번쩍거렸다.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던 빛의 기둥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괴물이 입을 다물듯, 빛이 꺼지며… 게이트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어…? 어? 어어? 다… 닫힌…….”
멸망급 게이트가… 닫힌다.
공략이 완료되었다는 의미. 하지만 헌터 협회의 정보와 계속 이 앞을 지켜온 펑크 사무라이의 기억에 의하면 들어간 사람은 오직 하나.
지금 나온 저 정체불명의 사내뿐.
그렇다면… 저 남자가 홀로 멸망급 게이트를 공략했다는 뜻인가?
“고기나 먹으러 가자. 이 근처에 맛집 찾아봐라. 그 뭐라더라… 스키다시?”
“형님, 스키다시는 밑반찬이고 형님이 찾으시는 건 아마 스키야키일 겁니다.”
“아무튼 그거.”
“이 근처 맛집은 게이트 때문에 다 닫았을걸요?”
“아~ 그 자식 역시 직접 죽일 걸 그랬네.”
“예? 보스 못 잡으셨나요?”
“아니, 잡았어. 죽이진 않았는데, 죽을 거야.”
“아뺘아~”
빈이가 양손을 뻗는다. 이현이 헤벌쭉 웃으며 유모차로 다가갔다.
“오구오구, 우리 빈이가 아빠 기다려쬬? 그래쬬요? 우리 빈이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유모차를 끌고 세 남자가 왁자지껄하게 멀어졌다.
펑크 사무라이는 가면 안쪽에서 두꺼비처럼 눈을 꿈뻑거렸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 *
전 세계로 발송된 일본 헌터 협회의 지원 요청은 당연히 런던에도 도착했다.
사실 어느 곳보다 빨리 런던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미래를 그리는 S급 헌터 퓨처 페인터, 데이먼 호크니의 선구안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호출을 받고 우르르 몰려든 헌터 협회 직원들은 모두 데이먼의 저택 응접실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니… 왜 아침부터 사람을 오라 가라야?”
문을 열고 나온 데이먼의 모습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머리는 새집에 가운은 어깨에 반쯤 걸쳤고 슬리퍼는 한쪽이 없다.
눈이 두리번두리번하는 게 슬리퍼를 찾는 모양이었다.
멸망급 게이트가 열린 이 상황에!
“크흠!”
영국 헌터 협회의 이사가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아, 그거. 근데 내 슬리퍼 어딨지? 못 찾겠네.”
“…….”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저놈이 S급… 예언자만 아니었어도 죽빵을 꽂아서 매달아 놓을 텐데… 그런 눈빛들이다.
데이먼이 손을 휘휘 젓고는 팬티에 꽂아놓았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에이, 됐수.”
발이 휙 슬리퍼를 내던졌다.
“그래서 무슨 일이요?”
“멸망급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뭔가를 보셨을 텐데요?”
지금까지 데이먼이 예측한 재앙은 모두 A급 이상!
능력을 각성함과 동시에 멸망급 재앙을 예언하며 S급이 된 그였다. 그가 이번 재앙을 예언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 봤지.”
담배에 불을 붙인 데이먼이 퉁명스레 말했다.
“한국에 열린 거 말이지?”
“한국이 아니라 오사카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오사카.”
“오사카는 일본인데요?”
“동양은 거기서 거기 아닌가?”
협회 직원들이 서로를 흘끔흘끔 쳐다봤다. 한국이 한때는 동방의 작은 나라로 멸시받았으나 이제는 아니다.
S급 헌터의 전력도 준수하고, K팝 등 문화의 수출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지도에서 짚지는 못하더라도 일본과 구분을 못하는 수준의 사람은 없었다.
‘이런 무식한 새끼…….’
‘이런 새끼가 S급이라니 말세다…….’
그러나 다들 어처구니없어 말이 막힌 와중에 협회 이사는 침착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오사카는 일본의 도시입니다. 지금… 약 32분 전에 멸망급 게이트가 오사카에 열렸죠.”
“내가 본 데는 한국인데.”
데이먼이 양손의 손목을 교차하고 주먹을 살짝 내렸다.
“이런 동상이 있던 곳이었어.”
한 직원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앗! 강남스타일 동상!”
“아, 그래! 갱냄스타일!”
따악!
데이먼이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이사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국에… 멸망급 게이트가 또 열린다는 말입니까?”
* * *
“후후후…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음이 파동처럼 공간을 울렸다.
부서진 행성의 파편들이 울림에 맞춰 진저리를 치는 가운데… 남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아마츠카미가 이번에 욕을 봤군요.”
아마테라스는 석고처럼 하얀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앞에는 거대한 티테이블이 있었다. 그 너머에서 짐승 같은 긴 발톱이 달린 손이 티테이블로 뻗었다.
유리병을 뒤적인 발톱이 새빨간 각설탕 같은 것을 꺼내어 차에 탔다. 금으로 된 수저가 우아하게 차를 저었다.
치익!
고기 굽는 소리가 나며 각설탕이 뿌연 연기와 함께 녹았다.
아니… 그것은 각설탕이 아니었다.
정육면체로 접힌 인간의 몸. 마지막 고통을 대변하듯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차 속으로 녹아들었다.
아마테라스는 혐오스러운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명왕 하데스]
‘명왕’의 이름을 지닌 수많은 신들 가운데에서는 인지도나 신성 면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강대한 성좌.
올림푸스 성단에서도 제우스와 맞먹는 힘을 지녔다는 존재.
겉보기는 흑발에 푸른 눈을 지닌 귀공자였으나… 그 뒤틀린 성품과 흉계가 끝을 모를 자이기도 했다.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하데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츠쿠요미 님은 괜찮으십니까?”
아마테라스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츠쿠요미는 분명 살아 있었다.
그런데 성단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의 발목과 저항의 흔적… 그리고 지독한 악취가 나는 기묘한 점액.
무엇인가에 습격당한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두 성좌가 지키는 성단의 경계를 무시하고 들어와 성좌를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가 죽었음은 분명했다.
이현, 그자가 무슨 수를 쓴 것이다.
“…죽었소.”
하데스가 말했다.
“복수하고 싶으시겠군요.”
“…뭔가 생각이 있소?”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토옥.
찻잔을 내려놓은 하데스가 창백한 얼굴에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제게 그 아이를 데려올 방법이 있습니다. 간단한 방법이죠. 다만… 아마테라스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도움이라니?”
“아마츠카미 성단의 츠쿠요미 님은 몰래 지구에서 화신을 만드셨더군요.”
아마테라스는 소름이 끼쳤다.
하데스는 그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었단 말인가…….
본디 성좌들이 직접 지구에 개입하는 것은 금지. 그것이 성단들의 합의였다.
오로지 ‘게이트’로만 개입할 수 있으며 화신을 만들어서는 안 됐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아마츠카미는 모든 성단의 지탄받을 것이다.
“그… 그건…….”
“제가 화신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붉은 용의 아이’를 당신에게 드리죠. 다만… 제가 그 아이를 충분히 연구하고 나서 말입니다.”
복수와 원하던 것을 동시에 얻을 기회.
고민이 됐으나… 남매를 잃은 고통과 분노가, 더불어 탐욕이 그녀를 이끌었다.
“좋습니다. 그리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