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오사카 레이드 (1)
오사카 국제공항.
보잉 767―300이 활주로 위를 미끄러졌다.
비행기의 측면과 날개에는 블랙벤더의 문양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약 밀매에, 살인까지 손을 대는 집단으로 알려진 것치고는 상당히 당당한 모습이다.
하긴… 블랙벤더임을 알아도 감히 누가 시비를 걸 것인가.
“웰컴 투 재팬!”
탑승용 계단 위에서 쉐도우 로드가 양팔을 벌리며 유쾌하게 외쳤다.
그 뒤로 한 팔에는 잠든 빈이를, 한 팔에는 봉투를 든 이현이 나타났다. 선글라스를 끼고, 평소와 달리 말끔한 차림이다. 빈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오며 이현이 물었다.
“라멘 먹을까, 라멘?”
“아~ 형님. 일본 하면 초밥이죠~”
“초밥은 우리 빈이가 못 먹잖아.”
“그렇구나… 근데 그 봉투는 뭐예요?”
이현은 비행기에 탈 때는 없던 비닐 봉투를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캐리어며 다른 짐은 미리 보내놨으니, 다른 짐은 없을 텐데…….
“응? 스튜어디스들이 주던데? 가면서 먹으래.”
슬쩍 보니 초콜렛에 과자에 음료수까지 다양했다.
이게 존잘남의 삶이라는 건가… 심지어 유부남인데!
지태는 우수에 젖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게 인싸의 삶인가.”
지태도 스스로 그럭저럭 생겼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선물 공세는 붉은 수녀에게 말고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매일 시커먼 복장으로 온몸을 감추고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다니는데 어떻게 선물을 받겠나. 맨얼굴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현이 피식 웃었다.
“너한테 잘 보이려던 거겠지.”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한 번도 그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더 말하면 비참해질 뿐이다.
지태는 묵묵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들 뒤로 명우가 날카롭게 사방을 훑으며 내렸다.
“보안은 확실한 겁니까?”
“저 못 믿으세요?”
“…….”
돌아온 당연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에 지태는 상처를 받았다.
이래 봬도 여린 감수성의 남자건만…….
방송에서 헌터 이상형 월드컵을 하면 제일 먼저 탈락시켜주지!
가면 안쪽에서 음흉하게 웃는 지태에게 이현이 물었다.
“그런데 숙소는 어디냐?”
“오사카 시내에 있는 S호텔이요. 5성급이에요.”
“싸울 수도 있는데 그런 데서 머물러도 되냐?”
“아이, 형. 그러니까 더 좋은 데서 묵어야죠. 으리으리하고 민간인 많은 데서 머물면 야쿠자도 함부로 행동 못 해요.”
야쿠자 놈들이 아무리 막 나가더라도 국가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행위는 쉽게 할 수 없다.
하물며 상대는 블랙벤더.
암살이라면 모를까 대규모 행동은 벌이기 어렵다. 국가와 블랙벤더, 두 집단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짓이니.
“일리는 있네.”
떠들며 나오니, 공항 밖에선 리무진이 대기 중이었다. 이현이 감탄했다.
“돈이 좋긴 좋아.”
“형, 그러니까 저희 블랙벤더에 들어오시는 건 어때요? 펜트하우스랑 리무진 정도 드릴 수 있는데.”
친구도 가족도 없는 지태 입장에서 이현은 매우 소중한 인맥이었다.
최근 그와 터놓고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 꽉 막혀있던 가슴에 시원한 바람구멍이 하나 뚫린 기분이었으니…….
명우가 즉시 나섰다.
“그런 사악한 집단에 들어가셔선 안 됩니다.”
“아니, 거 사람을 앞에 두고 사악하다느니 뭐니 하는 말은 너무한 것 아닙니까?”
지태가 항의에 나섰다가…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고 슬쩍 이현 뒤에 숨었다.
역시 저 사람은 너무 무섭다…….
“아, 근데. 숙소 가기 전에 여기부터 가자. 이거 이거.”
이현이 양팔을 벌리고 한쪽 다리를 무릎을 굽혀 들었다.
“한번 보고 싶었거든.”
이왕 일본에 왔는데 관광도 안 하고 가면 서운하다.
의도야 어찌 됐든 빈이와의 첫 해외여행이니…….
“아… 그 마라톤 아저씨요? 그럼 거기 가시는 김에 가까운 덴덴타운도 가시는 거 어때요? 거기도 볼거리 많거든요.”
아키하바라와 더불어 오타쿠의 성지라 불리는 덴덴타운…….
방구석 오타쿠인 지태에게는 일본에 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평소에는 눈치가 보여서 절대 갈 생각도 못 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이현을 핑계 삼아 갈 수 있다!
“덴덴타운? 그래, 가자.”
“으흐흐…….”
지태가 웃는 모습은… 무척이나 수상쩍었다. 지켜보던 명우의 눈이 의심으로 물들었다.
분명 뭔가 사악한 간계를 꾸미고 있다!
형, 형, 하며 살갑게 구는 것도 다 무슨 속셈이 있어서일 터…….
의심이 든 명우가 또 딴지를 걸었다.
“형님, 관광하기에는 빈이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지태가 날카롭게 눈빛을 보냈다.
‘덴덴타운에서 뭔가 저지를 셈이군…….’
이현이 피식 웃었다.
“아. 괜찮아. 내가 꽉 안고 있을 거니까.”
아버지의 품만큼 안전한 장소도 없지. 이현은 새근새근 잠자는 빈이를 내려다보았다.
집에서는 그렇게 울더니… 비행기에서는 계속 안고 있어선지 몰라도 한 번도 울지 않고 잘 자서 참 예뻤다.
“상대는 야쿠자입니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요.”
“어허, 제가 야쿠자를 잘 아는데 걔네 그렇게 막가는 애들 아니에요. 괜찮아요.”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의견을 이현이 단숨에 잘랐다.
“나타나면 찾아가는 수고 덜고 좋지, 뭐 어때.”
* * *
떠들며 걸어가는 이현들을… 선글라스를 쓴 남자 한 명이 골목에 숨어 몰래 보고 있었다.
그는 이현들이 라멘 가게에 들어간 직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카이초. 접니다. 그자가 공항에 왔습니다. 네, 전용기로 왔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계속 위치 보고하겠습니다.”
카이초… 두목.
일본에서 그렇게 불릴 수 있는 사내는 이제 단 한 명, 나카지마 지로뿐.
남자, 히데키는 시케구치구미의 여섯 행동대장 중 하나로, A급의 헌터이기도 했다.
다른 행동대장들은 모두 S급이나… 그는 탐색과 은신에 특화된 능력이 높이 평가받아 행동대장 자리에 앉았다.
“한가롭게 라멘이나 먹다니… 겁을 상실한 놈들이군.”
벽을 꿰뚫어 이현을 보던 히데키가 피식 웃었다.
블랙벤더의 위명은 그도 잘 알고 있었으나… 이곳은 일본.
일본 전역을 지배하는 시케구치구미의 본거지.
여기서 쉐도우 로드를 제거하면, 시케구치구미는 잘하면 블랙벤더를 통째로 접수할 수 있다.
두목은 아인 아기의 납치가 최우선 목표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비차 잡고 장군도 부르면 좋은 일 아니겠나.
“크크크…….”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보군.”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히데키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정수리에 서늘한 것이 닿았다.
차가운… 쇠의 감촉.
“움직이지 마라.”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히데키의 등 뒤에서 하회탈이 그림자에서 솟구치듯 서서히 올라왔다.
그 모습을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통해 본 히데키는 까무러칠 노릇이었다.
분명히 셋이 함께 라멘가게에 들어가는 것을 봤는데…….
“부… 불스아이병장!”
“소리를 내면 죽는다. 움직여도 죽는다. 알아들었으면 끄덕여라.”
어색하고 딱딱한 일본어였으나… 그래서 더 무서웠다.
히데키는 끄덕였다. 명우가 물었다.
“시케구치구미인가?”
“…그렇다.”
“목적은?”
“그, 그건…….”
씨잉!
쇳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철퍽.
뭐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히데키가 눈을 내리니… 사람의 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화끈한 열이 귀에서 올라왔다.
“크악!”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귀를 짚은 순간, 이번엔 칼날이 목에 닿았다.
“움직이면 죽인다고 했을 텐데. 마지막 경고다.”
“크… 으윽!”
괴물이다.
공격의 낌새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이기기는커녕…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
살아남으려면 초등학생이 된 것처럼 성실히 대답해야만 했다.
자존심도 공포 앞에는 무력했다.
“다… 당신들을 감시하라고 명령받았다.”
“아기를 훔쳐 가려고?”
“자세한 목적까지는 몰라! 나, 나는 말단이라 그냥 감시만 명령받았다!”
씽!
이번엔 손끝으로 열이 스쳤다. 손가락 네 개가 과자봉투에서 쏟아진 과자 조각처럼 바닥에 투두둑 떨어졌다.
“끄윽!”
비명을 지르면 죽는다. 히데키는 간신히 참았지만… 고통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스산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넌 시케구치구미의 행동대장 시게 히데키, 나이는 스물일곱. 여자친구는 노조 아야… 영업용 이름은 ‘유키’였나?”
히데키는 기절할 지경이었다.
‘이… 이놈, 대체 뭐지?’
“너희 시케구치구미 조직원 상위 서른 명의 이름과 인적 사항은 전부 파악했다. 거짓말할 생각은 마라.”
무섭다.
이 정보력. 그리고 서슴없이 인간의 신체를 절단하는 잔혹함.
도무지 양지의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불스아이병장이 미친놈이라고는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런 놈을 헌터로 두다니 한국 헌터 협회는 미친 새끼들이다.
결국 히데키는 거짓말을 포기했다.
이놈이 가진 정보가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이상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두… 두목이 아이를 납치할 적당한 기회를 찾으라고 하셨다.”
“너희 두목은 왜 아이를 노리지?”
“그, 그건 나도 몰라! 정말이야!”
칼날이 목을 살짝 벴다. 히데키의 눈에서도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진짜야! 믿어줘! 내, 내가 아는 건 그분 뒤에 다른 뭔가가 있다는 것 정도야! 그… 그래, 츠쿠요미! 츠쿠요미라고 했어! 신… 신이라고…….”
“츠쿠요미… 신?”
“제… 제발 믿어줘, 정말이야. 이게 내가 아는 전부야.”
히데키가 눈물에 콧물까지 질질 흘렸다. 출혈보다 수분 부족으로 먼저 죽을 기세다.
“믿지.”
명우가 끄덕인 후… 단숨에 히데키의 목을 그었다. 동시에 스킬, 쥐불놀이가 발동했다. 뿜어져 나오는 피와 시체가 단숨에 불타 재가 됐다.
하회탈 아래로 음울한 음성이 말했다.
“하지만 범죄자는 죽인다.”
명우는 골목을 나와 다시 라멘가게에 들어갔다.
“빈이 아앙~”
이현이 수저 위에 잘 말아 올린 라멘을 빈이가 앙, 물었다.
“앙!”
“아유, 잘 먹네!”
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이현이 명우를 돌아봤다.
“화장실을 오래도 갔다 온다?”
“…정보를 얻었습니다.”
“뭔데?”
“나카지마 지로는 츠쿠요미라는 신에게 명령을 받아 납치를 명령했다더군요. 광신도의 헛소리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들 것 같습니다만…….”
“아니.”
이현이 수저 위에 라멘을 돌돌 말며 말했다.
“그렇게 말했으면 진짜 그 츠쿠요미라는 놈이 있다고 생각해야지.”
“신이… 말입니까?”
“응. 내가 신이라고 하는 놈들 흔하잖아?”
황당한 말이지만… 이현이 뱉는 말이라 걱정스럽다.
“그만큼 강한 자일까요?”
S급 이상으로 평가받는 나카지마 지로. 그런 자가 ‘신’이라 우러르며 따르는 자라면… 그 강함이 결코 평범한 수준이 아닐 터.
“대충 쌔겠지. 걱정 마라. 그런 놈들 셀 수도 없게 잡아봤으니까. 별것 아냐. 우리 빈이 아~”
“앙~”
태평하게 빈이에게 밥을 먹이는 이현을 보며 명우는 눈썹을 모았다.
하긴… 딸아이까지 데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
아마,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