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어떤 인연 (2)
데스나이트 아낙톤.
그는 멸망한 차원을 외로이 떠돌던 유일한 생존자였다.
이현을 만나기 전에는 백 년간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던가.
원래는 그를 소환한 네크로맨서와 함께 살았는데… 모종의 사고로 네크로맨서가 죽으며 혼자 남겨졌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차원에 가서도 스토커처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골치였다.
자고 일어났더니 옆에 새하얀 백골이 있었을 때는 아무리 무신경한 이현이라도 공포를 느꼈다.
같은 남자끼리 뭐 어떠냐고 하는데… 골격만 남은 시점에서 본인의 몸이 이념과 차원을 초월한 기피의 대상이 되었음을 인정시키기가 그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어쨌든 유쾌하고 좋은 녀석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진즉에 전도유망한 개껌 지망생으로 팔아넘겼겠지.
결국은 황제 자리도 떠넘겼을 만큼 신뢰했던 녀석이었다.
감회에 젖은 이현의 눈을 보고 지태는 눈앞의 남자가 아낙톤이 말한 ‘그분’임을 확신했다.
“아낙톤 님은 제 은인입니다.”
지태는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이현에게 전달했다.
팔짱을 끼고 경청하던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단 말이지. 윌슨의 정체라…….”
빈이가 태어난 알, 윌슨.
그 정체를 알고 싶어서 부하들에게 그 정체를 알아보라고 시킨 적이 있었는데…….
결국 떠날 때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지구에 온 후로는 빈이가 태어나서 더 이상 윌슨은 중요하지 않게 됐고…….
하지만 아낙톤이 윌슨의 정체를 알게 됐다는 말을 굳이 전하라 했다면, 분명 중요한 일이리라.
이현도 궁금했다.
빈이는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외로이 화산 속에 홀로 있었을까? 가족은 있을까?
수많은 차원을 다닌 이현도 빈이와 비슷한 존재는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아낙톤을 찾아가 봐야겠군.”
지태의 말에 따르면 아낙톤도 차원을 떠돌아다니는 중인 것 같지만…….
그가 다스리던 키르단으로 가서 기다리면 아마 만날 수 있겠지.
빈이도 한 번쯤 키르단에 데려가 신하들과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고 싶었다.
“이야기 전해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그런데… 아까 납치는 무슨 얘기신가요?”
“응? 아.”
찾아온 목적을 까먹을 뻔했다.
“네 부하라는 녀석들이 내 딸을 납치하려고 했거든.”
“따님을요?”
“너 뭐 나쁜 짓 많이 한다며?”
지태는 양손을 흔들며 부정했다.
“아뇨! 절대요! 맹세코! 그런 적 없습니다!”
확신에 차 외쳤던 목소리 뒤로 소심한 목소리가 눌어붙었다.
“밑에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네가 머리잖아. 꼬리가 하는 일을 모르는 게 말이 되냐?”
몰랐으면 그건 그것대로 무능이다.
“그건 그런데 말이죠…….”
지태가 시무룩하게 의자에 앉았다.
“실은, 제가 좀 복잡한 상황이라서요.”
“네가 길드장인데 뭐가 복잡해?”
“그렇기는 한데…….”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이야기지만… 이미 버츄얼 유튜버 활동도 들킨 마당이다.
그동안 사실을 숨기며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기에 누구에게라도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이상하게 오해를 받아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전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마피아가 어쩌고 대통령이 어쩌고, 하나도 몰라요!”
지태는 머리를 쥐어뜯듯이 쥐었다.
우연히 들어간 게이트에서 당시 A급 헌터였던 붉은 수녀를 구했던 것이… 실수였다.
“그 여자가 마피아 보스의 딸이라고 어떻게 알겠냐고요.”
처음으로 사람을 구해서 허세를 좀 부리기도 했다.
이후 계속 따라다니는 그녀를 떨쳐내지 못하는 사이, 허명에 점점 살이 붙었다. 3년이 지나자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상태였다.
“해명하면 붉은 수녀가 저를 어떻게 할 것 같고…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에요. 다들 무시무시한 인간들뿐이라서 잠자는 사이에 목이 잘릴지도 몰라요!”
블랙벤더의 길드원 대다수가 킬러, 마피아, 고문기술자, 도둑에 용병 등 음지의 인간들.
까놓고 말해 정상인은 지태뿐이다.
그런 이들이 A급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으니… 얕보였다간 끝장이었다.
칼날 위를 걷는 나날…….
목이 바짝 말라 지태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상하게 운이 나빠서… 최근에는 동귀어진시킬 생각으로 삼합회를 공격했더니, 이미 간부들이 다 죽어 있어서 삼합회를 통째로 접수해버렸어요.”
“오우… 그건 좀 대단한데.”
자세히는 몰라도 조직 하나를 쉽게 접수했다는 뜻 아닌가.
이현의 감탄에 지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 저는 이게 감당이 안 된다고요! 헌터가 되기 전에는 누구랑 싸워본 적도 없다고요.”
그냥 평화롭게… 퍼플큐링으로서 춤이나 추면서 도네이션이나 받고 살고 싶은데…….
이제야 잘하는 걸 찾았다는 기분인데, 세상이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하지만… 모두 솔직하게 말하고 나니 조금은 스트레스가 풀렸다.
갑옷 하나를 벗은 기분이다.
“그럼 내 딸 납치하려던 놈들은 네 힘으로 조절이 안 된다는 뜻이냐?”
“예? 아뇨, 그건… 그놈들은 아마 말단일 테니 알아보면 그만이죠. 길드 소속 킬러 보내드릴까요? A급인데.”
방금 전까지 오들오들 떨던 놈이 험악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본인은 모르지만 블랙벤더의 길드장으로서 오래 행세하며 나름대로 익숙해진 것이다.
“네가 해결해주면 나야 편하지. 며칠이나 걸리냐?”
“보통 이틀 정도면…….”
“그럼 폰 번호 알려줘.”
지태가 양손으로 공손히 핸드폰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래, 나 그럼 간다.”
이현이 벽을 짚자, 새카만 공간이 열렸다.
어떻게 들어왔나 했더니… 저런 마법이 있었구나.
“자… 잠깐만요!”
몸을 돌리는 이현을 지태가 붙잡았다.
게이트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었던 아낙톤은 강대한 힘을 지닌 초월자였다.
아마 이현도 그와 최소한 동등한 힘을 지녔을 것이다.
비록 오늘 처음 만났더라도, 비밀을 아는 자는 그가 유일하고…….
그라면, 오랜 고민에 답을 내려줄 수 있지 않을까.
“응?”
“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절한 눈빛을 마주한 이현이 눈썹을 모았다.
“어떻게 하냐니? 뭘?”
“앞으로 계속 길드장을 해도 괜찮을까요?”
츄리닝 바지가 지태의 손에서 구겨졌다. 이현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하고 싶을 대로 하면 되지.”
“하지만 제가 당장 그만두면…….”
어두운 방… 붉은 수녀가 부른 고문 기술자와 함께 사이좋게 인체의 신비를 탐구할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 얼굴을 보고 이현이 귀를 후비며 물었다.
“내가 계속하라면 할 거냐?”
싫다.
마음의 소리가 먼저 질색했다. 이현이 표정을 읽고 피식 웃었다.
“거봐라. 뭐 별 수 있냐? 관둘 수 없으면 계속해야지. 소질도 있잖아. 뭐 홍어삼합도 접수했다며.”
“삼합횐데요…….”
“약한 게 들킬까 봐 걱정되면, 강해지면 되잖아?”
이현은 게이트로 한 발을 넣고 말했다.
“아낙톤 걔도 처음부터 강하진 않았어. 넌 아낙톤이 준 좋은 갑옷도 있으니까 남들보다 좋은 조건에서 시작하는 거 아니냐?”
“그… 그건… 제가… 그걸 할 수 있을까요?”
세상은 타고난 자질이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게이트가 열린 후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마력을 깨우치는 것조차 재능의 영역이다.
범인들은 괴물들에게 손 한 번 대보지 못하고 갈대처럼 쓰러졌다.
수련해서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공포와 스트레스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축 늘어진 어깨를 두드리듯 이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널 못 믿으면 누가 믿냐?”
모두가 떠받들며 환상으로 압박할 뿐… 진실한 말은 한 적이 없는데…….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솔직한 말이 가슴을 진하게 울렸다.
게이트로 사라지며 이현이 한마디를 남겼다.
“이틀 후에 다시 올게.”
* * *
사당에서도 보기 힘든 람보르기니 아벤다토르의 시저 도어가 열리며, 하이힐을 신은 늘씬한 다리가 빠져나왔다.
입술 아래에 있는 고혹적인 점이 살며시 위로 올랐다.
“여기가…….”
선글라스를 벗은 미모의 여인은… 헌터 협회 한국 지부의 이사, 유지애.
나이는 스물 여덟로 젊지만, 최근 두 번의 S급 게이트에 대한 대처를 성공적으로 주도하며 주가를 올리고 있는 커리어우먼의 대명사였다.
최근에는 뉴욕타임즈에까지 얼굴을 올렸다.
당연히 그녀의 일정은 빡빡하다.
바늘 하나 넣기 어려울 정도인 개인 시간을 쪼개서 여기까지 온 이유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현.
S급 게이트 ‘길항하는 힘의 회랑’을 공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남자.
또한… 증거는 없지만, 그전의 S급 게이트도 공략한 사내.
그가 B급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크나큰 전략적 손실이다.
오늘 굳이 시간을 쪼개 찾아온 이유는… 그를 S급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지애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당당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판초우의를 걸치고 등에는 긴 보따리를 멘 사내.
S급 헌터 불스아이 병장.
“어?”
뜻밖의 만남에 당황한 그녀가 먼저 곤혹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 돌아본 명우도 지애를 보고 당황했다.
“이사님?”
“병장님?”
잠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 보던 중, 지애가 먼저 접근해 악수를 청했다.
“게이트 공략전 이후로 처음 뵙네요. 개인적으로도 감사를 드려야 마땅한데 경황이 없었네요.”
“누구에게 감사 인사 들으려고 하는 일은 아니니 괜찮습니다.”
명우가 가볍게 악수를 했다가 손을 뗐다. 이런 담백한 태도가 지애에게는 더 편했다.
시대착오적인 차림으로 날아다니는 누구와 비교하면 훨씬 남자답지.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지애의 물음에 명우가 엘리베이터를 보며 말했다.
“…지인이 이곳에 삽니다.”
“그런가요?”
혹시 싶지만… 설마 그 정도 우연이 있을까.
“이사님께서는?”
“저는 뵐 분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탄 명우가 15층을 눌렀다. 지애의 입술이 씰룩했다.
이쯤 되면 우연으로 생각하기가 힘들다.
“병장님 혹시… 뵈러 오신 지인이 이현 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이사님도?”
“네.”
지애는 약간 불안해졌다.
불스아이 병장에 대한 어두운 소문은 당연히 그녀도 알았다.
온갖 증거가 그를 살인 사건 용의자로 모는데… 잡혀가지 않는 것은 헌터 협회가 그를 비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그가 킬 카운트에 이현을 추가하기로 결심한 건 아닐까?
띵.
불안감에 휩싸인 사이 어느새 15층에 도착했다.
지애가 앞서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네~ 나가요.”
문이 열리고… 은색의 가면이 나타났다.
명우에게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네놈……!”
놀란 지애가 커진 눈으로 읊조렸다.
“쉐도우 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