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블랙벤더 (2)
용산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블랙벤더의 거점은 13층의 빌딩이었다.
원래 새누리교라는 사이비 종교의 교회였지만… 교주가 악마에게 조종당해 천 명이 넘는 신도를 제물로 바치고 A급 게이트를 열어버린 사건으로 인해 건물이 헐값에 매각됐다.
당연히 사는 사람이 없어 허물게 된 것을, 블랙벤더가 사들여 거점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한때 거대 종교의 성지였던 만큼 역세권에 조망도 굉장히 좋은 건물이다.
블랙벤더는 이 건물을 인수받은 후, 별다른 구설수 없이 운영하며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았다.
원래 십자가가 걸려있던 자리에 걸린 블랙벤더의 상징, 리본을 문 흑사자는 근처 집값을 수호하는 헌세권의 상징이 됐다.
황사 때문에 뿌연 달빛 아래, 새카만 캐딜락 CT6 한 대가 빌딩으로 들어섰다.
차가 오는 것을 본 경비원이 야광봉을 흔들며 다가왔다.
짙게 선팅이 되어 있던 앞유리창이 내려가며 운전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남자의 얼굴은 뱀파이어처럼 창백하고 냉정했다.
그가 출입증을 내밀며 말했다.
“길드장님이시다.”
“헉! 넵! 어이! 문 열어!”
텅 빈 지하주차장에 주차하는 차의 앞으로 열 명의 길드원이 우르르 모였다.
모두 각이 잡힌 열중쉬엇을 취했다.
운전수가 문을 열자 먼저 가터벨트를 한 매끈한 흰다리가 나왔다.
붉은 수녀.
차갑고 도도한 눈빛이 길드원들을 훑었다. 부길드장으로서 실질적인 업무는 그녀가 거의 대행하기에, 길드원들에게는 현실적인 공포의 대상이었다.
들리기로는 쉐도우로드와 내연 관계이기도 하다는데…….
그런 얘기를 공공연히 꺼낼 만큼 겁 없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블랙벤더의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상당히 격동적인 사춘기에 빠진 애들이나 입을 것 같은 복장으로 다니고 있지만… 그 사실이 그들의 순진함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일각에서는 사탄 숭배자로 취급받는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복장은 모두 아티팩트.
다시 말해 그들은 외부에서는 항상 전투에 대비하는… 상시전투태세인 것이다.
붉은 수녀의 에스코트를 받아 은색의 가면을 쓴 남자가 내렸다.
쉐도우 로드.
한국의 이면을 지배하며… 미국 대통령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무시무시한 남자가 뭔가를 말할 것처럼 길드원들을 바라보았다.
긴장이 고조됐다.
블랙벤더는 말이 길드지… 조직화된 폭력집단… 마피아에 더 가깝다.
서열화된 수직적인 계층 구조로, 상부의 명령이 곧 법.
앞에 모인 길드원들은 모두 A급의 실력자들이었으나… 쉐도우 로드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스킬을 사용한다면 전멸은 순식간일 것이다.
그때 쉐도우 로드의 가슴이 부풀었다.
“푸에취!”
갑자기 가면이 흔들리며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당황한 길드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데, 은색 가면 아래에서 마초 영화의 배우를 연상시키는 굵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가지.”
“네, 길드장님.”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인 17층에서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것은 쉐도우 로드와 붉은 수녀 단둘.
17층은 전체가 펜트하우스로, 수영장과 운동 설비를 포함해 온갖 유흥 설비가 가득했다.
이 층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쉐도우 로드와 붉은 수녀, 청소부로 고용된 자들뿐.
“어서 오십시오.”
쉐도우 로드가 뚜벅뚜벅 걸어가며 말했다.
“난 회의를 할 테니…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길드장님!”
별안간 붉은 수녀가 달려가 그의 가슴에 안겼다.
은색 가면 안쪽의 눈은 차가웠으나… 붉은 수녀의 눈은 반대로 열을 띠었다.
“전 어디서 기다려야 할까요? 여기서? 아니면 침.대.에.서?”
“그그그… 그건, 크흠!”
말을 더듬던 쉐도우 로드가 다시 목소리를 깔았다.
“오늘은 너도 피곤할 테지. 돌아가 봐도 좋다.”
“하지만…….”
쉐도우 로드의 손이 그녀의 볼에 얹혔다.
“널 실망시키기는 싫다.”
붉은 수녀의 볼이 빨개졌다.
“네, 길드장님. 아니… 로드.”
붉은 수녀의 눈이 방의 안쪽을 흘끔 향했다. 언젠가 그곳을 자신에게 보여줄 날이 기대됐다.
블랙벤더의 미래는 이곳의 가장 깊은 방… 오로지 쉐도우로드만 들어갈 수 있는 방에서 결정된다.
당연히 보안도 가장 철저하다.
오직 쉐도우 로드만 갖고 다니는 카드키로만 열리며… 이후에도 동공 스캔까지 해야 들어갈 수 있다.
붉은 수녀가 아는 것은 각국을 지배하는 마피아의 거두들과 대통령, 악마와 괴물들이 그 안에서 쉐도우 로드와 소통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우웅.
복잡한 절차를 거쳐 방에 들어간 쉐도우 로드의 등 뒤로 문이 전자음을 내며 자동으로 닫혔다.
방은 세 개의 모니터가 연결된 멀티 모니터와 컴퓨터, 촬영 도구, 동작 센서 등이 즐비했다.
쉐도우 로드는 가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20대 중반의 젊은 남자. 반달 같은 눈과 선량한 이목구비가 잘생긴 미청년이었다.
악명에 어울리지 않는 얼굴로,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피곤하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
쉐도우 로드… 유지태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음산한 웃음이 번졌다.
“크크크…‧ 그럼 시작해볼까.”
지태는 컴퓨터를 켜고 능숙하게 앱들을 조작했다.
이내 멀티 모니터의 중앙 화면에 파란 머리를 늘어트린 2D 미소녀가 나타났다.
매트가 깔린 방의 가운데에 지태가 섰다. 그가 손을 흔들자 미소녀도 손을 흔들었다.
최신형 모션 센서가 그의 동작과 표정을 감지해 화면에 송출하는 것이다.
엉덩이를 쭉 빼거나 가슴을 강조하는 등 특정 층의 수요가 높을 것 같은 여성스러운 동작을 반복하던 지태가 앱을 켰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아아.”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거치자 귀여운 여자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좋아. 방송 시작.”
멀티모니터의 왼쪽에 채팅창이 나타났다. 까맣던 중앙 화면에 ‘NOW ON’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뷰튜브 구독자 백오십만의 거대 버츄얼 뷰튜버 ‘퍼플큐잉’
블랙벤더의 길드장 쉐도우로드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안녕하세요~ 큐잉큐잉~ 큐잉이 와쪄요~”
살랑살랑 손을 흔들자 채팅창의 글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퍼플큐잉의 주 콘텐츠는 대화와 게임.
대형 뷰튜버다운 능숙한 진행과 순발력으로 두 시간 동안 방송을 진행한 지태의 몸이 땀에 젖었다.
그러나… 즐겁다!
이 인기! 관심!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모른다.
이 사이버 공간에서 그는 완전한 자유.
가끔 성별을 의심하는 댓글이 올라오기 마련이었지만… 애청자들에게 두들겨 맞고 사라졌다.
블랙벤더의 힘을 이용해 몰래 정보를 조작하기까지 한 덕에, 그의 진짜 정체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길드의 누구도… 내연녀로 의심받을 만큼 최측근인 붉은 수녀조차 이 사실을 모른다.
“큐잉~ 여러분 저 잠깐 물 좀 먹고 올게요. 어머! 화장실이냐니! 난 정보생명체라 생리 현상 없다니까!”
헤드셋을 벗은 지태는 미리 준비해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 목말라.”
“여기 물.”
“감사.”
자연스럽게 물을 받아 마신 지태는 물병을 들고 굳었다.
딱딱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옆에 선 이현을 발견하고 물병을 내던질 만큼 기겁했다.
“뜨악! 뭐야! 당신 누구야!”
순식간에 벽에 붙은 지태에게 이현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중간에 말을 걸어보려고 했는데 너무 열심히 해서 건드릴 수가 없더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큰일이다.
블랙벤더의 쉐도우 로드가 사실 퍼플큐잉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겉잡을 수 없이 추락할 것이다.
‘입을 막아야 해. 하지만 어떻게?’
살인멸구.
그것이 최선이겠지만…….
‘난 못해!’
알려진 악명과 달리, 지태는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싸워본 적 자체가 드물다.
갑옷이 없는 지태는 고작해야 D급의 마력을 지닌 헌터….
사람들은 지태가 S급 게이트를 홀로 공략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홀로 게이트에 빨려 들어갔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 게이트에서 그를 구해준 괴물은, 지성을 갖고 있었다.
―난 아낙톤이라고 한다. 생긴 걸 보니 너… 혹시 인간인가?
핏줄 같은 금색으로 장식된 새카만 갑옷을 걸친 해골. 붉게 타오르는 안광이 무시무시한 그 괴물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끄덕였던 것 같다.
아낙톤은 S급 게이트의 보스였던 거대한 괴물을 단숨에 스테이크처럼 조각낸 괴물이었다.
설령 자신이 물고기였더라도 뇌세포를 풀가동해 인간을 흉내냈을 것이다.
―그렇군. 주군과 같은 종족을 구하다니… 이것도 운명인가.
혼자 뭐라고 중얼거린 아낙톤이 내민 것은, 검은 갑옷.
지태를 S급의 자리에 올려놓은 막강한 아티팩트였다.
―이것을 받아라.
―이… 이게 뭔가요?
―그것을 입으면 어느 차원에서든 네 힘을 무시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제게 이런걸…….
―글쎄… 한때 나약했던 자가 은혜에 바치는 경의라고 해두지.
갑옷을 입자마자 전신에 흘러들어오는 막강한 힘.
그것은 마치 마약과 같아… 순식간에 지태를 도취시켰다.
그러나 더욱 강해진 감각으로 아낙톤의 힘을 느낀 순간, 도취감은 사라지고 허탈함만 남았다.
강해진 그보다, 아낙톤은 더욱 강했던 것이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갑옷을 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전언을 부탁하고 싶군.
―전언이요?
―너희 세계에… 언젠가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지닌 막강한 자가 나타날 것이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아낙톤이 말했다.
―아니, 이미 나타났을지도 모르겠군… 그분에게 말해다오. ‘윌슨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아낙톤은 사라졌다.
그 후 게이트를 나오니, S급 게이트를 혼자 공략한 헌터라며 협회에서 모셔갔다. 협회의 테스트는 모두 갑옷을 입고 통과했다.
의도치 않은 사이 순식간에 유명해져… 정신을 차리고 보니 최강의 S급이라며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야… 근데 기술이 진짜 좋아졌네. 여자 목소리가 나던데 어떻게 하는 거냐?”
이현이 모니터를 바라봤다.
무섭다. 모든 걸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 소리라도 질렀다간 이 남자가 죽겠지.
지태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일단 평소처럼 허세를 부리는 수밖에 없다.
“내… 내가 블랙벤더의 S급 헌터 쉐도우로드인 건 알고 온 거냐?”
“당연하지. 너랑 이야기하려고 왔는데.”
암살은 아니구나.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이래놓고 ‘칼과 칼의 이야기!’라고 외치며 달려들 수도 있으니…….
“무슨 이야기……?”
“네 부하란 놈들이 내 딸을 납치하려고 했던데… 네 명령이냐?”
강력한 살기가 이현에게서 피어올랐다. 동시에 루비처럼 붉게 빛나는 눈.
공간 전체가 몸을 압박했다.
“나… 난 몰라. 최근에 납치를 지시한 적은 없다.”
“그래?”
압박이 순식간에 걷혔다. 지태는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 남자…….
검은 머리에 붉은 눈… 그리고 강한 힘.
아낙톤이 말한 그 남자가 아닐까.
“혹시… ‘아낙톤’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이현의 얼굴이 굳었다.
아낙톤.
그의 가장 충실한 종복이었고, 친구라고 할 수 있었던 몇 없는 자의 이름이 뜬금없이 튀어나왔다.
당황스럽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