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블랙벤더 (1)
“블랙벤더의 본거지는 크게 세 군데입니다.”
나뭇가지가 흙바닥에 원 세 개를 그렸다.
“용산, 인천, 수원 세 곳인데… 모두 보안이 군대 수준이죠.”
이현은 팔짱을 끼고 눈썹을 올렸다.
“그럼 별것 아니네.”
“…한국 군대 말고 미군이요.”
“오, 짱짱하군.”
한국군 장성들이 들으면 길길이 날뛸 선입관이었다.
하지만 나뭇가지를 들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던 탄일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1분 정도 전에 괜히 입을 털었던 배형이 옆에 이빨 조각을 뱉고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다.
괜히 입 털었다가는 여기가 이빨 요정의 성지가 될 수도 있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는데 A급 수준의 헌터들이 몇 명씩 지킨답니다. 쉐도우 로드는 이 세 곳을 골고루 돌아다니고요. 옆에는 항상 S급인 붉은 수녀가 붙어 있는데, 이 여자도 한가락 한답니다.”
사실 이 정도는 굳이 블랙벤더의 길드원이 아니더라도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뭐라도 되는 듯이 자세히 설명한 것은… 살고 싶은 간절한 희망 때문이었다.
탄일은 이현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제발 가지 마라…….’
이놈이 쳐들어가봤자 블랙벤더의 상급 길드원들을 이길 순 없다.
하지만 이 일이 알려질 것이다.
갓 입단한 놈들이 독단적으로 일을 꾸며서 명예를 더럽혔다… 블랙벤더의 기준으로는 아마 충분히 사형을 내릴 조건이다.
“그렇군.”
이현은 팔짱을 끼고 끄덕였다.
‘꼭 그 사이비 놈들 같군.’
황색의 어쩌구를 받들던 사이비 놈들… 그놈들도 이런 식으로 본거지를 옮겨댔다.
그때는 믿음직한 부하 셋에게 동시 타격을 명령해 일망타진했지만… 여기서는 혼자.
“그 본거지, 위치가 자세히 어디냐?”
“예? 저… 전 모르는데요.”
갑자기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가 압니다.”
나무 위에서 한 남자가 훌쩍 뛰어내렸다.
판초우의를 뒤집어쓴 하회탈의 남자. 탄일은 그를 보고 벌벌 떨었다.
이현이 곰이나 사자라면… 저놈은 음지에 사는 인간들에게는 부기맨 같은 존재다.
홀연히 유령처럼 나타나 나타난 장소를 도살장으로 만들어버리는 놈.
“부… 불스아이 병장!”
이현도 알은체를 했다.
“어, 다단계, 너였냐?”
“…예?”
“집에서부터 따라왔잖아.”
살의는 없어서 내버려 뒀지만, 스토킹의 70%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통계를 생각하면 원래 그냥 봐줄 만한 일은 아니다.
다만 이현은 누가 언제 어떻게 덮치든 격퇴해낼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서는 묘한 선의마저 느껴졌다. 그렇기에 봐준 것이다.
직접 보니 더욱 봐줄 마음이 들었다. 그 덕분에 빈이가 키즈카페에서 요즘 공짜로 재미있게 놀고 있다.
불스아이 병장… 명우는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크게 놀랐다.
S급인 그가 작정하고 미행하면 그것을 눈치채기란 지극히 어렵다. 심지어 명우는 이런 잠행, 암습에 능했다.
단순히 소리를 지우고 기척을 죽이는 수준이 아니라…….
사각을 이용해 몸을 숨기고 빛이나 그림자의 반사까지 신경 쓴다. 저격수로서 활동할 때 배운 것이기도 한 군사 지식의 응용이었다.
그게 단숨에 들통난 것이다.
‘역시 저분은…….’
강하다. 괴물같이…….
게이트에서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명우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냐, 근데 왜 따라왔냐? 이놈들 때문이냐?”
명우가 끄덕였다.
“그들은 B급 현상수배범들입니다. 전부터 추적하고 있었죠.”
본래는 그들을 미행하여 본거지와 곁가지까지 전부 털어낼 생각이었다.
이미 브로커와 접선지까지 파악했다.
만약 빈이가 납치당하더라도 그가 직접 가서 구해올 수도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이현의 실력을 직접 눈으로 다시 보고 싶어 일부러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블랙벤더는 위험한 길드입니다. 전 세계에 망을 펼쳐놓았죠. 마약 밀수부터 장기매매까지 안 하는 범죄가 없습니다.”
명우는 다짜고짜 총을 꺼내 탄일을 겨눴다.
이현이 놀라 그의 손을 밀쳤다.
“뭐야.”
명우가 쓴 하회탈이 슬쩍 옆으로 기우는데…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 같은 움직임이었다.
“아, 정보 때문에 그러십니까? 걱정 마세요. 이놈들보다는 제가 더 많이 압니다.”
“아니… 우리 빈이가 놀라잖아.”
“아, 죄송합니다.”
미친놈들이다. 제정신이 아니다.
공포에 질린 탄일은 덜덜 떨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 목숨을 뭘로 보는 거냐. 장기매매는 했어도 사람 배를 직접 갈라본 적은 없는 탄일이다.
게다가 방금 명우가 꺼낸 것은 진짜 총.
아무리 한국의 치안이 엉망이 됐어도 총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뭐… 네가 안다니 됐네. 그럼 이놈이 말한 블랙벤더 지부들도… 다 알겠네?”
“물론입니다. 내부 설계도도 있죠.”
명우가 핸드폰을 꺼내서 화면을 톡톡 두드리더니 그것을 이현에게 보였다.
화면에는 무슨 건물의 청사진이 보였다.
“오호…….”
“하지만 이걸 드리기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명우의 눈이 빈이에게로 향했다.
“어째서 아인을 키우고 계시죠?”
처음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명우에게 좋은 괴물은 죽은 괴물뿐… 아인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아인들의 감정적인… 사람 같은 반응을 대할 때는 괴롭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괴물, 아인을 보살피는 것은 대마초를 키우는 것과 같은 악의 증식.
어떤 범죄보다도 사악한 행위다.
이현이 지그시 그를 바라봤다. 어처구니없다는 눈길이었다.
“내 딸이니까.”
상상 외의 대답에 명우는 벙쪘다.
“딸이 뿔 좀 달고 태어났다고 버리면 그게 아빠냐?”
엉덩이에 뿔이 났다면 모를까…….
“그게 아닙니다!”
하회탈에 가려진 얼굴 대신 드러난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괴물입니다! 게이트에서 튀어나와 문명을 어지럽히는 해악입니다! 그것을 왜 키우냐는 겁니다!”
이현은 잠시 명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역시 이 녀석은 아낙톤과 닮았다. 원래 유쾌한 성격이던 아낙톤과 달리 유연함이 부족하지만.
“너, 가족이 괴물들에게 죽었냐?”
툭 내뱉은 말에 명우가 끄덕였다.
“눈앞에서 몰살당했습니다.”
“안 됐네. 화내는 이유는 알겠다. 그런데…….”
잠시 골몰하던 이현이 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수염을 쓰다듬던 버릇이 아직 남았던 것이다.
손을 뗀 이현이 말을 이었다.
“갑자기 외계인이 나타나서 프랑스인이 빡치게 했으니까 한국인을 몰살시켜야겠다고 말하면 억울하지 않겠냐?”
“…제가 그 외계인이라는 겁니까?”
“엉.”
이현은 유모차에 척 손을 올렸다.
“지구는 둥그니까 우리 모두 친구라고 치더라도… 차원 단위로 생각해봐라. 우리 빈이는 나도 무슨 종족인지 몰라.”
“아뺘.”
빈이가 유모차 안에서 양팔을 뻗었다. 잠깐 떨어졌더니 불안했던 모양이다.
이현은 빈이를 안고 둥기둥기 하며 말했다.
“가족을 다른 차원 녀석이 죽였다고 다른 차원 놈에게도 화내는 건 좀 이상하지 않냐?”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게이트에서 나온 괴물들은 생김새도 습성도 모두 달랐다.
‘아니…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무력하게 갇혀 있던 괴물들이나… 어린 괴물들에게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죽이려고 하면 언제나 얼음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두통이 일었다. 그 두통은 마지막 남은 양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현의 말을 인정해버리면 자신이 사춘기 소년처럼 철없는 이유로 학살을 벌인 꼴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게이트에서 나왔습니다.”
“게이트 이름은 매번 다르던데?”
“…….”
빈이가 명우를 빤히 바라봤다. 이현은 당당히 빈이를 안고 그에게 다가갔다.
몸에 밴 피비린내가 들킬까 두려운 것처럼 명우가 한발 물러났다.
그러나 이현은 계속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봐라. 우리 빈이가 사람 해치겠나.”
순진무구한 루비색 눈이 명우에게 영롱한 호기심을 발사했다.
지금까지 그를 본 아이들은 본능인지 항상 그를 무서워했는데… 빈이는 전혀 무섭지 않은 듯 그와 눈을 마주쳤다.
뿔이 달렸지만… 참 귀엽고 예쁜 아이다.
빈이가 그에게 한 손을 뻗었다. 아기 특유의 통통하고 말랑해 보이는 손이다.
“응? 여기 아저씨랑 하이파이브하고 싶어? 하이파이브 할래?”
이현이 눈치를 주며 다가왔다. 명우는 얼떨결에 손을 뻗어 빈이와 손바닥을 마주쳤다.
온기가 심장으로 침투하는 느낌…….
오랫동안 잊었던 그리운 기분이었다.
“에치!”
갑자기 고개를 돌린 빈이가 재채기를 했다. 머리통만 한 청색 화염이 뿜어졌다.
경우에 따라 사람을 해치기에 충분할 것 같은 열기다.
이현은 당황해서 빈이를 옆으로 돌렸다.
“이건… 교육 중이야.”
“알겠습니다.”
명우는 무력하게 살해당한 가족들을 위해 분노해 왔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가족들은 그와 같은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사명감도 느꼈다.
그의 분노는 순수한 증오만이 아니라 정의감에 의한 것.
애초에 명우는 완전한 증오의 화신이 될 수는 없는 선량한 인간이었다.
그는 빤히 빈이를 보았다. 커다란 루비색 눈에 그를 담고 있던 빈이가 방긋 순진하게 웃었다.
이런 무력하고 순진한 아이가 다시 우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는데…….
지끈.
다시 두통이 일었다.
하지만 타협을 보는 것이… 그는 두려웠다.
살아남은 자신만 편해지고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쉬운 선택을 하려는 이기적인 회피일 수도 있으니까.
부모님과 동생들은 무참히 죽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현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어… 네가 뭘 하든 네 자유고, 나도 딱히 막을 권리는 없지만… 우리 빈이한테 피해 주면 때린다?”
매우 아프게 때릴 것이다.
그때, 별안간 경박한 신호음이 울렸다.
띠리리리링!
이현의 얼굴이 굳었다.
“아!”
“왜 그러시죠?”
이현 같은 남자가 저렇게 심각한 얼굴을 할 사항이라니… S급 게이트라도 관측이 된 것일까.
아니, S급이 아니라… 멸망급 게이트일지도 모른다.
당황한 명우가 핸드폰을 꺼내 들려는데, 이현이 하얘진 얼굴로 말했다.
“일 났다. 빈이 밥시간인데… 야, 일단 여기 네가 대충 수습 좀 해줘라? 고맙다! 땡큐!”
대답도 듣지 않고, 이현이 유모차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공원을 벗어났다.
얼마나 빠른지 뒤로 먼지가 일 지경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던 명우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탄일이 중대장이 보면 박수를 칠 정도의 완벽한 포복 걸음으로 공원을 기고 있었다.
그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타앙!
“끄악!”
종아리가 뚫린 탄일이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명우가 서늘하게 말했다.
“넌 못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