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검은 손길 (1)
두두두두…….
‘뭐지?’
새벽 두 시. 이현은 작은 발소리에 잠에서 깼다.
잠깐 멈췄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두다다다.
선반 쪽이다. 이현은 이불을 덮고 몸을 돌렸다.
두다다…….
우당탕!
발소리와 함께 책상의 물건이 와르르 떨어졌다.
“아잇.”
이현은 이불을 젖히고 눈을 떴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파란 안광 한 쌍이 빛나고 있었다.
담이 약한 사람이면 경기를 일으킬 장면이다.
이현은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대체 어떻게 올라간 건지… 제 몸보다 세 배는 높은 책상 위에 올라간 삼식이가 분유병을 앞발로 건들며 놀고 있었다.
“삼식이 너……!”
이현이 다가가자 삼식이가 앞발로 분유병을 냅다 후려쳤다.
재빨리 분유병을 붙잡자, 이번에는 다른 물건을 앞발로 건드렸다.
“그만해!”
이현은 삼식이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삼식이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 순진무구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벌써 일주일.
일주일 내내 이 모양이었다.
낮에는 잠만 펑펑 자다가 밤이 되면 이 난리를 치니…….
그나마 오늘은 양반이다. 어제는 이불 밖으로 나온 손과 발을 핥고 깨무는 통에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빈이가 자면 삼식이가 일어나 활동하고, 삼식이가 자면 빈이가 일어나니…….
그야말로 고문과도 같은 무한의 보육 사이클!
물론 이현은 일 년 동안 잠을 안 자본 경험도 있다.
그에게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 것은 필요가 아니라 욕구에 의한 행동.
그러나 짜증이 안 나는 것은 아니다.
이현은 삼식이와 눈을 마주치고 으르렁거렸다.
“얌마, 너 솔직히 말해. 이거 복수지?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닌 걸 알지만 묻게 된다.
혀가 날름 코를 핥았다. 파란 눈이 순진무구하게 그를 쳐다봤다.
맑은 눈에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써 있는 듯하다.
왠지 동물학대를 하는 기분이다. 이현은 삼식이를 내려놓았다.
결백을 증명하듯 삼식이는 바닥에 놓인 인형을 안고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그릉그릉.
“하아…….”
키워야 하는 애가… 둘이 됐다.
* * *
“현 군. 사자는 고양이과 동물이잖아요. 고양이과는 원래 야행성이 많아요.”
“아.”
툴툴거리던 이현은 일성의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예, 그러니 밤에 재우기는 힘들 거예요. 그리고 학습은…….”
커흠 헛기침을 한 일성이 말을 이었다.
“제가 최근 뷰튜브에서 봤는데, 거기서 전문 훈련사인 강 선생님이 어렸을 때, 산책도 자주 시키고 사람이나 동물을 만나게 하는 게 중요하다더군요.”
“오!”
굉장히 그럴듯한 말이었다.
‘하긴, 얘도 아기지. 야생동물이고.’
삼식이를 데려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그동안 한 번도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저런 애완동물 용품을 사면서 산책용 목줄도 샀는데…….
이현은 아주 조금 미안함을 느꼈다.
그때 빈이가 아기방을 넘어왔다. 아장아장 기어온 빈이가 이현의 손가락에 열중하던 삼식이의 꼬리를 덥석 잡았다.
“햐악!”
삼식이가 고양잇과 특유의 하악질을 하더니 소스라치며 물러났다. 빈이가 놀라 손을 뗐다가 입을 벌렸다.
“후아!”
화르륵!
아무래도 따라 한 것 같은데 별안간 불이 뿜어졌다!
털이 쭈뼛 설 정도로 놀란 삼식이가 이현을 훌쩍 뛰어넘어 등 뒤에 숨었다.
“부아.”
빈이가 열심히 기어서 삼식이를 따라갔다. 삼식이가 반대로 도망쳤다. 이현을 중심으로 강강수월래가 시작됐다.
‘삼식이가 빈이한테 뭘 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서열정리는 이미 된 것 같으니.
하지만 빈이가 약자를 괴롭히는 데 재미가 들리는 것도 안 좋겠지. 이현은 빈이를 번쩍 안아 삼식이에게서 떼어놓았다.
빈이가 삼식이에게 손을 뻗으며 버둥거렸다.
저와 비슷한 크기의 생물은 처음이라선지 아주 호감이 가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키즈카페라는 게 있었지.’
빈이도 사회성을 학습할 나이이니… 한 번 가보는 것도 좋겠다.
“할아버지, 저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예, 저녁 전에는 와요.”
“산책만 하고 올 겁니다.”
유모차에 목줄을 매단 이현이 설렁설렁 집을 나섰다.
마침 햇빛도 맑은 좋은 날씨였다. 웃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 비슷하게 개를 끌고 나온 주민들도 보였다.
“평화롭군.”
일주일 전에 근방에서 S급 게이트가 열렸다고는 믿기지 않는 평화다.
하긴, 게이트가 금방 닫힌 덕에 사당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남우를 포함한 헌터들이 강남 외의 지역으로 피해가 확대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한 덕도 있고.
‘남우 그 녀석, 수행은 잘하려나.’
남우는 며칠 전 몸이 나은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도로 놀러 갔다.
4박 5일 일정이라는데… 날이 좋다고 놀기만 하면 이제 막 시작한 수행이 죄다 물거품이 될 것이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그때, 이현의 시야에 달려오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대형견으로 분류되는 카네코르소였다.
“응?”
목줄은 달려 있는데, 주인은 안 보였다. 저만치 멀리서 중년의 남자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외쳤다.
“아이구! 번개야! 아이구구! 번개야!”
충혈된 눈에 입에는 침을 흘리며 달려오는데… 두 눈이 삼식이에게 고정된 상태.
“하악!”
긴장했는지 삼식이가 하악질을 하며 털을 곤두세웠지만, 번개라고 불린 개는 아랑곳 않고 달려들었다.
이미 사냥의 흥분에 취한 상태다.
“뭐야, 이건?”
이현의 발이 냅다 번개의 목을 짓밟았다.
“캥!”
카네코르소는 대형견 중에서도 근육량이 높아 경비견으로 인기가 높은 품종이지만… 이현의 발에 눌리니 꼼짝도 못했다. 눈이 마주치자 본능적인 공포에 몸이 굳어 꼬리를 말고 오줌까지 지렸다.
“다… 당신! 우리 번개한테 무슨 짓이야!”
남자가 달려와 이현을 냅다 밀쳤다. 티타늄 동상에 들이받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
원래 운동도 안 하던 몸이라 벽에 던진 고무공이 튕겨 나가듯 제풀에 못 이겨 넘어졌다.
“어이구! 어이구! 이놈이 사람 친다! 어이구!”
이 촌극은 뭐지.
이현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내려다봤다.
“뭐하냐, 지금?”
“이…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싸가지 없이 반말을! 어이구, 동네 사람들! 이거 보소! 여기 이놈이 사람 친다아!”
경비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현은 우뚝 선 채 카네코르소의 목을 밟고 있고, 남자는 넘어져서 까진 손바닥을 허우적거리는 상황.
당장 잘못은 이현 쪽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
이현의 얼굴을 본 경비원은 흠칫했다.
‘전에 그 건달패를 혼내준 헌터잖아!’
한 손으로 사람을 번쩍 들던 괴력이 떠올랐다. 주차 문제로 자주 실랑이를 빗던 놈이 얌전해져서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달리 보였다. 이제 보니 넘어진 남자는 입마개를 안 하고 대형견을 끌고 다니는 것으로 자주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주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 개새끼가 갑자기 내 딸이랑 애완동물한테 달려들어서 막았습니다. 이 인간은 지 혼자 넘어졌고.”
넘어져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뭐얏! 이, 이 새끼가 어디 거짓말을! 증거 있어!”
경비원이 나섰다.
“그럼 CCTV를 확인해볼까요?”
이미 소리를 듣고 나온 주민들이 지켜보는 상황. 남자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경비원에게 삿대질했다.
“야이, 개새끼야! 네가 뭘 알아! 이런 시발, 어디 배워 처먹지도 못해서 경비질이나 하는 새끼가! 뒤지고 싶어!”
일성만큼이나 나이가 지긋한 경비원의 얼굴이 구겨졌다. 틈만 나면 찾아와 갑질을 하는 통에 스트레스가 쌓인 상황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주민들의 싸움에 잘못 개입하면 하청 업체 소속인 그의 목이 잘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사장님, 좀 진정하시고…….”
남자가 허리를 잡고 씩씩거렸다.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저 새끼가 지금 우리 번개 목 밟고 있는 거 안 보여!”
하지만 삿대질하면서도 남자는 이현에게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온몸으로 달려와 밀었는데 도리어 그가 넘어졌으니… 힘으로는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대신 그는 만만한 경비원에게 화살을 돌렸다.
“야, 이 새끼야! 돈 받고 일 하나 똑바로 못해! 입주민이 곤란을 겪고 있는데, 뭐…….”
단순한 생떼가 아니다. 이건 경비원을 볼모로 잡은 협박이다. 보통 이러면 양심이 자극된 평범한 사람들은 경비원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싫어서 먼저 사과하고는 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본 것이 아닌 그에게는 다양한 대처법이 있었다.
이현에 대한 대처법만 빼고.
“현대인은 대가리에 도끼 맞을 일이 없어서 선사시대 인류보다 무례하다더니…….”
이현이 서늘하게 그를 노려봤다.
모처럼 산책을 나왔는데… 시작부터 이런 놈을 만나니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딸아이 앞에서 폭력을 휘두를 수는 없는 일. 이현은 삼식이를 들어 남자의 앞에 가져다 댔다.
“삼식아, 이 아저씨 보이지? 냄새랑 얼굴 잘 기억해둬라.”
“뭐… 뭐?”
짐승은 새끼 때의 발 크기로 컸을 때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는데, 삼식이는 아직 새끼임에도 앞발이 어지간한 성인 주먹만 했다.
삼식이는 원래 악마… 그중에서도 마수로 분류되는 흉포한 부류.
다 크면 앞발 한 번 휘둘러서 머리통으로 공기놀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삼식이가 크르르릉 맹수의 본성을 드러내며 위협했다. 아직 어린데도 상당히 살벌했다.
“다… 당신, 이런 짐승 키우는 게 불법인 거 몰라!”
“개새끼 입마개 안 하고 다니는 건 합법이고?”
“우리 번개는 안 물어!”
너무나 전형적인 변명이다. 그 말을 기다렸던 이현이 흡족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우리 삼식이도 안 물어.”
물기보다는 앞발을 더 애용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몇 개월 후에 아저씨 보이면 반가워서 달려갈 수도 있는데 잘 놀아주길 바라지.”
삼식이가 파란 눈으로 뚫어져라 남자를 보았다. 마치 그를 머리에 각인하는 것 같았다.
“히익!”
남자는 얼른 목줄을 주워들고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경비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 남자는 헌터. 다른 헌터들처럼 폭력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상당히 온건한 방법으로 해결했다. 아직 젊은데도 인성이 참 바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 혹시 저놈이 또 나타나서 지랄하면…….”
삼식이의 목줄이 이현의 손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빌려드리죠.”
경비원은 순간 당황했다.
‘진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