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한 초월자는 딸바보-40화 (40/150)

40화. 퓨처페인터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게밖에 얘기할 수 없는 성과였다.

역대 최고의 마력이 계측된 S급 게이트, ‘길항하는 힘의 회랑’.

다섯 명의 S급과 백여 명의 A급 이하 헌터들이 힘을 합쳤다고는 해도…….

공략대가 돌입한 후 불과 한 시간여의 짧은 시간 만에 공략에 성공한 것이다.

“희생자나 부수적인 피해를 고려해 봐도 S급 게이트치고는 이례적입니다. 덕분에 한국의 헌터 협회와 헌터들에 대한 평판도 굉장히 좋아지고 있고요.”

PDA를 든 비서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협회 직원들은 욕먹는 게 일이다.

특히 사무직들은… 일선에서는 헌터들에게 지들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면서 사람을 사지로 몬다고 욕먹지, 대중들에게는 헌터들이 벌여 놓은 일 수습한다고 욕먹지, 윗사람들에게는 실적으로 쪼임 받지…….

그렇다고 증권사 직원들처럼 돈을 펑펑 버는 것도 아니다. 이것도 나름의 사명감이 있으니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저번 S급 게이트였던 ‘출입이 금지된 봉마사’에 이어 역대 최악의 S급 게이트인 이번 게이트까지 최저한의 피해로 막아내며, 헌터 협회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길 한복판에서 저 헌터 협회 직원이라고 자랑스럽게 외칠 수도 있지 않을까.

목구멍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이번 작전에 참여한 헌터분들의 자서전이나 피규어 같은 2차 상품에도 당연히 프리미엄이…….”

흥겹게 얘기하던 목소리가 오므라들었다.

옆을 걷는 여성의 표정 때문이었다. 보브컷에 새하얀 피부, 입술 아래의 점이 매력적인 이 여성은 헌터 협회 한국 지부의 이사, 유지애.

실무에 있어서는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평소 주위에 싸늘한 눈발을 불러일으켜 사실 모종의 얼음 계열 스킬을 보유한 것이 아니냐는 뒷담화를 듣는 그녀에게는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비서는 공포까지 느꼈다.

“저… 이사님?”

“아?”

멍하니 허공을 향하고 있던 지애의 검은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아, 그렇죠, 네. 혹시 기여도 랭크는 갖고 있나요?”

“네, 여기 있습니다.”

비서가 재빨리 PDA를 조작해 건넸다.

[3위 : 이현]

기여도는 헌터들에게 발급되는 헌터 카드가 수집하는 정보와 목격 증언을 토대로 산정된다.

목격 증언에 의하면 이현은 S급들도 고전을 면치 못한 적을 단숨에 물리쳤으며…….

최종 공략까지 홀로 해냈다.

이후 게이트를 나와 바포메트라는 A급 마물까지 처리.

1위가 되고도 남는 기여도인데… 고작 3위에 랭크됐다.

헌터 카드가 제대로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상해!’

지애는 이현에 대한 목격 증언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었다.

다름 아닌 S급들의 증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쯤은 감이었다.

그는 강하다. 초월적으로.

이전 S급 게이트 때 나타나 지하국대적을 물리친 의문의 남자도 이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왜 B급에 머무르지?’

그와 같은 전력이라면 당연히 S급… 아니, S급 위에 새로 랭크를 파서 둬야 할 정도다.

새로 등급을 만드는 것은 이미 홀로 S급 게이트를 공략한 쉐도우로드의 선례도 있어, 본사에서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안건이었다.

다만 현재 기술로는 S급 이상의 마력을 측정하기 어렵고… 실적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해 지지부진일 뿐.

‘역시 한 번 더 그를 만나봐야겠어.’

헌터는 인류의 보루.

전력을 적확하게 배치해 소모를 줄이고 유지하는 것은 협회의 지상과제다.

‘그 힘의 비밀을 알아내 반드시 유용하게 써주겠어!’

지애는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빛냈다.

* * *

런던 교외.

관광지로 유명한 해안절벽인 세븐시스터즈의 언덕 중 한 곳에는 대저택 하나가 있었다.

본래 관광지의 경관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건축이 금지된 장소이지만….

‘S급 헌터’의 이름은, 법을 가뿐히 뛰어넘어 저택을 세웠다.

물론 보통의 경우, 아무리 S급 헌터라도 무수한 비난의 화살을 받을 선택이었으나… 저택의 주인인 ‘데이먼 호크니’는 달랐다.

그가 지닌 스킬의 특수성과 막대한 전술적 가치가 법을 다시 세운 것이다.

데이먼의 이명은 ‘퓨처 페인터’.

그는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개자식이지.”

리처드 모스는 창밖으로 시가 연기를 길게 뱉었다. 옆에 공손한 자세로 앉아 있던 경위가 눈을 놀라 그를 쳐다봤다.

“경감님!”

경위인 레이첼은 연한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난 미인이었지만… 그 녹색 눈동자는 어쩐지 천진한 맑음이 있어 요즘 시대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런 느낌이 필요했기에 리처드가 그녀를 데려온 것이다.

리처드는 고전 영화의 탐정처럼 기른 수염을 비웃듯 끌어올렸다.

“뭐? 사실이다. 그놈은 개자식이야.”

“경감님 말이 사실이더라도… 그런 말씀은 보통 예언자를 찾아가는 도중에는 안 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뱉은 말이 데이먼이 본 ‘미래’에 있다면 문전박대를 당할 테니까.

리처드가 코웃음을 쳤다.

“걱정 마라. 놈이 우리 대화를 봤더라도 널 보면 쫓아내지는 않을 거야.”

“저를요? 저를 왜요?”

“그놈은 여자를 좋아하거든.”

짜게 식은 레이첼의 얼굴을 본 리처드가 다시 한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뭐라더라… 옛날 종교인들이 그랬듯이 성교를 통해 의식을 확장? 뭐 그런 식으로 말은 한다만 다 뻥이야. 전혀 별개니까, 놈이 그딴 식으로 꼬드겨도 모르는 체해라.”

“경감님. 제가 바보예요?”

“들어는 봤겠지만, 놈은 미래를 그려. 한 달에 한두 번.”

시가가 허공에 붉은 선을 그렸다.

“초현실주의 호러 같은 그림이지. 실력은 뭐 그럭저럭해. 우리 같은 매지션들 눈에는 영화처럼… 놈이 본 광경이 재생되지.”

매지션. 영국에서는 마력을 사용하는 자들을 그렇게 불렀다.

레이첼이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재생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튀어나오기도 한다던데요…?”

“걱정 마. 그림에서 튀어나온 괴물은 실제도 아니고, 데이먼이 통제하니까.”

얘기를 나누는 사이 그들이 탄 검은색 포드가 저택에 도착했다.

관목과 키가 작은 풀로 잘 관리된 정원이었다. 잘 깔린 포석 위에 깔끔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비서인 톰이었다.

차에서 내리는 리처드를 보고 톰이 정중하게 말했다.

“늦으셨군요, 리처드 씨.”

“후….”

리처드가 담배를 길게 내뿜은 후 말했다.

“영화도 안 봤나? 경찰은 현장에 항상 늦는 법이지.”

‘그걸 경찰이 당당하게 말하면 안 되죠.’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는 레이첼을 무시하고 리처드가 당당히 걸어갔다.

톰이 얼른 옆에 따라붙었다.

“가시죠.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택의 내부는 정원만큼이나 호화스러웠다.

거울처럼 비치는 대리석에, 벽 한 면이 전부 해수어항이다. 거기서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떠다니는데… 레이첼은 단숨에 주눅이 들었다.

‘S급 헌터들의 재력이 어지간한 기업 총수 못지않다더니….’

반면 리처드는 담배를 뻑뻑 피며 바닥에 재가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 않았다.

물어내라고 나오면 감당할 수도 없을 거면서.

심지어 상대는 본인 공인 성질 더러운 S급 헌터인데….

이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

악취미스럽게도 안내받은 방의 문은 로뎅의 ‘지옥의 문’을 빼다 박은 형태였다.

더더욱 악취미스럽게 메이드복을 입은 소녀들이 그들을 반겼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기묘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붉은 원목 가구에, 바닥에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가죽으로 만든 카펫이 깔렸다.

‘저 번쩍거리는 샹들리에, 설마 황금인가?’

무슨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다.

그런 방의 가운데, 한 남자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다가왔다.

“늦었잖나!”

하얀 머리를 미역처럼 늘어트린 남자다. 마법사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가운을 걸치고, 곰돌이 푸가 그려진 반바지 차림. 다가오자 독한 아크릴 냄새가 물씬 풍겼다.

리처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데이먼. 자네… 괜찮나?”

원래도 히피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놈인데… 잠도 제대로 안 잤는지 S급 헌터인 놈이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꼈다.

원래라면 옆에 선 레이철에게 추파부터 정상일 놈이, 레이첼은 안중에도 없다.

미친놈이 정상적으로 행동하니 오히려 더 무섭다!

데이먼이 리처드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거, 이걸 얼른 봐줘야겠어, 리처드.”

데이먼이 방의 한구석에 마치 저주받은 토템처럼 치워놓은 캔버스를 가리켰다. 하얀 천으로 가려놨는데… 손도 대기 싫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가리킨 손끝이 덜덜 떨렸다.

“상관없는데, 뭐 이상한 거 튀어나오지는 않겠지?”

“그건 아냐.”

털썩 소파에 앉은 데이먼이 위스키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리처드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캔버스의 천을 치웠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것은 한 남자의 초상화였다.

흑발에 붉은 눈. 덥수룩한 수염이 걸인 같은 행태인데… 알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런데 살짝 시점을 기울이자… 어릴 적 과자에 들어 있던 입체 그림처럼 초상화가 기괴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영상이 그를 꿰뚫었다.

“으아악!”

시야가 유체이탈을 한 듯 지구를 날았다. 허공에 생긴 균열이 순식간에 그를 빨아들였다.

이름 모를 행성이 보였다. 지구와 비슷했지만 대륙의 모양이 달라,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행성의 표면에 수십 개의 게이트가 열렸고… 기괴한 괴물의 군대가 수억 단위로 강림했다.

그런데 별안간 대륙에서 금빛이 번쩍였다. 튀어나온 것은 한 남자.

분명 대륙에 비하면 한없이 작을 남자인데도… 전 차원을 집어삼킬 듯 커보였다.

그가 주먹을 내질렀다.

쿠웅!

주먹을 중심으로 물결 같은 파동이 번지며 별빛을 일그러트렸다. 파동에 닿은 괴물들이 단숨에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남자가 게이트에 뛰어들었다.

안쪽에는 악의를 형상화한 듯 흉측한 괴물들이 끝도 없이 있었다. 게이트에서 나온 강력한 괴물들조차 그 괴물들의 일개 수하에 불과했다.

모든 생명의 끝을 보는 듯한 광경.

그런 괴물들이, 남자의 주먹질과 발차기에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세계가 몇 번이고 멸망하는 전투의 끝에… 피에 젖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황금으로 된 옥좌에 앉았다.

그의 발치에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무릎을 꿇었고… 이어서 무수한 괴물로 이루어진 군대가 부복하며 한 단어를 외쳤다.

“마왕!”

“마왕!”

“마왕!”

남자가 다시 일어나 몸을 돌렸다. 풍경이 삽시간에 지구로 바뀌었다.

어느새 남자는 갑옷 대신 셔츠를 입고 유모차를 끌고 가는 중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걷어차인 듯 시야가 돌아왔다.

“맙소사… 이… 이게 대체?”

그간 몇 번이나 그림을 봐왔지만, 이토록 강렬하고 압도적인 광경은 처음이었다.

잔 두 개에 술을 따르며 데이먼이 대답했다.

“그 괴물이 지구에 올 거야… 아니, 이미 왔을지도 모르지. 흐흐흐… 알겠나? 우리가 지금 누리는 평화는 살얼음 위에 이루어져 있던 거야.”

“있다면, 어디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나?”

데이먼이 반문했다.

“어떻게? 그런 괴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리처드는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맙소사’

인간의 형체를 한 괴물. 멸망급 게이트… 아니, 그 이상의 재앙.

‘마왕…!’

데이먼이 건배를 청하듯 잔을 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인류를 적대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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