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오만의 끝
악마, 데몬, 카오스…….
여러 차원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불리는 판데모니엄의 괴물들은 본질적으로 정신 기생체였다.
지성을 지닌 생명의 영혼에 달라붙어, 그 감정이 내뿜는 에너지를 섭취하여 성장하고… 마침내 영혼과 육신을 빼앗는 자들.
영겁과도 같은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순간, 판데모니엄에서는 일곱 개의 감정을 섭취하는 악마들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만, 질투, 분노, 나태, 인색, 탐욕, 색욕.
그리고 그들의 정점에 선 판데모니엄의 일곱 군주를 나타내는 말이…….
칠죄종.
영락한 오만의 주인은 본디 바로 그 칠죄종의 일각인 ‘오만’의 주인, 사마엘이었다.
이현이 피식 웃었다.
“여기서 보니까 반갑네. 근데 너 하반신은 왜 그러냐?”
“네가 부쉈잖아!”
사마엘이 갈퀴 같은 손톱으로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푸른 불꽃 같은 콧김이 화륵 뿜어져 나왔다.
이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응? 그게 너였냐? 아스모짜르트 아니었어?”
“아스모데우스다! 그리고 그놈 하반신도 네놈이 터트린 거 맞아!”
이 성서에 적혀 영원히 축복받을 놈!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사해질 놈!
오만이 아니라 분노의 군주가 될 것처럼 분노가 터진 사마엘이 부들부들 떨었다.
아스모데우스와 딱히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같은 칠죄종의 군주이자… 이현이라는 재난을 함께 맞닥뜨린 피해자.
자신이 모욕받은 것처럼 화가 났다.
“여기서 네놈을 볼 줄이야…….”
오래전, 사마엘과 칠죄종은 ‘천상의 탑’을 지배하는 천사들과 전쟁 중이었다.
천사들 또한 악마들과 같은 정신 기생체. 그러나 그들이 섭취하는 감정은 악마들과 같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
부딪치는 것은 필연이었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속된 전쟁에 휘말려, 수백 개의 차원이 파괴당했다.
그러다 여느 때처럼 전쟁을 시작한 어떤 차원에서… 마왕이라 불리던 이현을 마주쳤다.
―이 새끼들이… 왜 남의 집 안방에서 쌈박질이야? 뒤질래?
이현은 자신이 한 번 뱉은 말은 지키는 상남자임을 몸소 증명했다.
천사고 악마고 가리지 않고 줘패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차원이 초토화되며, 영역의 손실로 칠죄종은 크게 힘이 약화됐다.
게다가 메피스토를 필두로 한 다른 악마들이 이현에게 동조하며, 칠죄종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하는 수 없이 자존심을 버리고 손을 잡은 칠죄종의 군주들이 이현을 기습했으나… 이미 약화된 힘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사마엘은 하반신을 잃고 죽은 척하다가 다른 군주들이 이현에게 터지는 틈에 간신히 도망쳤다.
굴욕의 나날.
외진 차원… 작은 마을의 어촌을 점령한 그는 성서를 읽고 몸을 태우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야말로 와신상담.
그런 노력 덕에 새로운 힘을 깨우치며 재기에 성공한 지금… 이놈을 만난 것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크크크… 이현, 아주 반갑구나.”
삼류 악당 같은 대사라서 직접 말할 수는 없지만… 약화 됐던 예전의 그가 아니다.
그가 얻은 새로운 힘은 그야말로 신의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생명체의 마력에 강제로 간섭해 분해하고 조작하는 힘…….
상대가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상관없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면 일개 하등생명체일 뿐…….
저 천상의 탑의 천사들도 이 힘에는 속수무책이리라.
이마에 역오망성이 빛나는 사자의 얼굴이 비릿하게 웃었다. 갈기가 빛살처럼 일렁거렸다.
범인(凡人)의 눈에는 무한하게까지 느껴질 마력의 파동.
사마엘의 양손이 이현을 향했다.
“무력함을 맛보아라……!”
그 순간 이현은 사마엘의 몸에서 뻗어오는 한 줄기 금빛을 보았다. 지렁이처럼 꾸물거리며 늘어나는 금빛의 실은 복잡한 문자에 휘감겨 있었다.
“뭐야, 이건?”
이현의 손이 실을 붙잡았다.
파지직!
전기가 흐르는 소리와 함께 이현의 앞에서 언젠가 보았던 상태창이 흐릿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름 : ?이현???]
레벨 : ???
종족명 : ?인?간??
보유 스킬 : ???
칭호 : [판데모니엄의 친구] [위대한 천상의 순례자] [키르단의 황제] [구원자]
이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빠직!
저항이 깨지며 실이 덥석 잡혔다. 실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들더니 연결된 사마엘의 몸까지 붉게 휘감았다.
상태창이 수은등이 지직거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뒤바뀌었다.
[이름 : 사마엘]
레벨 : 99
종족명 : 악마
보유 스킬 : [붉은 지배] [오만의 영광] [게헤나의 종화]….
칭호 : [영락한 오만의 군주] [지배자]
사마엘이 소스라쳤다. 공격을 쓴 건 그인데, 온몸의 마력이 반대로 이현에게 묶인 것이다.
포승줄에 묶인 죄인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아닛?!”
아니… 이 힘의 실체를 생각하면 상황은 더욱 끔찍했다. 이제 이현은 약간의 조작만으로 그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마력핵을 멈출 수도, 사지를 뽑아 공기놀이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냐. 침착하자. 태도를 보아하니 놈은 이 힘의 사용법을 모른다.’
사마엘은 슬쩍 힘을 다시 운용해보았다. 순간 방심인지 뭔지 이현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우리 빈이 우쮸쮸…….
‘뭐지, 이 끔찍한 기억은… 응? 가만…….’
웃고 있는 빈이의 모습에 사마엘은 경악했다.
“이… 이건…! 이걸 키우고 있었다고?!”
그때 빈이의 모습을 뚫고 이현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요게 남의 기억을 막 넘보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마엘과 연결된 순간 이현은 이 힘의 사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완전히 새로운 힘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느낌이랄까.
검지가 상태창을 툭 짚었다.
“뭐가 많네. 좀 덜자.”
“뭐… 뭐?”
[이름 : 사마엘]
레벨 : 99
종족명 : 악마
보유 스킬 : [붉은 지배] [오만의 영광] [게헤나]
칭호 : [영락한 오만의 군주] [지배자]
“밀어서…….”
스킬 하나가 옆으로 쓱 밀렸다.
“잠금 해제.”
그 순간 사마엘은 심장을 찌르는 고통과 함께 자신의 마력이 허무하게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크악!”
“밀어서 잠금 해제.”
이현이 손가락을 한 번 밀 때마다 스킬이 하나씩 사라졌다.
“크아악!”
사마엘의 거체가 부들부들 떨리며 쪼그라들었다. 몸 곳곳에서 구멍 뚫린 풍성처럼 마력이 새어 나왔다. 뿔이 줄어들고… 갈기의 색이 옅어졌다. 척추 아래에서 타오르던 불도 점차 줄어들며 색도 연한 녹색으로 변질됐다.
“크으윽… 이 괴물놈… 후회할 거다. 크억!”
날개가 사라졌다. 사마엘은 땅을 기면서도… 웃었다.
어차피 이놈은 곧 죽는다. 그런 확신 때문이었다.
“네… 네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네놈이 키우는 그것은 재앙의 열매! 언젠가, 후회하며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크하하하! 끄아악!”
이현은 무시하고 계속 손가락을 움직였다.
[사마엘]
레벨 : 1
종족명 : 마수
보유 스킬 : 없음
칭호 : 없음
사마엘의 뒤에서 회오리치던 붉은 호수가 멈췄다. 피칠갑이 된 육신들이 스러지고 희뿌연 안개 같은 영혼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의 힘에 속박되어 있던 영혼들이 해방되는 것이다.
“뀨.”
마침내 작은 새끼 사자 한 마리가 남았다. 이마 부근에 뿔이라고 하기도 뭐한 작은 돌기 한 쌍이 난 점과, 꼬랑지에서 작은 연녹색 불꽃이 타오르는 점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새끼 사자 같은 모습이었다.
“뭐야, 이건? 인간을 퇴화시키면 원숭이… 뭐 그런 느낌인가? 포켓몬도 아니고…….”
그때 하늘이 맑게 개며, 구름에 가려져 있던 우주의 무수한 별들이 드러났다.
이현은 무심코 별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시공간이 숨을 멈췄다.
언젠가 찾아온다는 우주 멸망의 형태… 빅 프리즈가 찾아온 듯 무시무시하게 차가운 동결.
그 속에서, 무수한 별빛들이 이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영원한 악몽의 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불타는 적색 거인이 호전적으로 웃습니다.]
[올림푸스의 성좌들이 당신을 기억합니다.]
이현은 사마엘을 안고 호전적으로 웃었다.
“뭐야? 이놈 친구들이냐? 미리 말하는데 이거 정당방위야. 사과 안 한다.”
동결은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깨졌다. 별빛에서 시선이 사라졌다.
“인사성 없는 놈들이네.”
사마엘이 아장아장 걸어오더니 이현의 발등에 볼을 비볐다.
그 모습을 보자 불현듯 오늘 빈이를 재우며 보았던 오분영 박사님의 1분 토크가 떠올랐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은 어린아이의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애완동물에게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가리키면서 거울을 보듯이 배우는 거지요.
이현은 사마엘의 겨드랑이를 잡고 안아 들었다.
“흠…….”
“낑.”
사마엘이 그의 콧등을 핥았다. 이현은 씩 웃었다.
“좋아, 네 이름은 이제부터 삼식이다!”
* * *
“허억! 헉!”
남우는 고전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모양의 검을 들고 거칠게 숨을 쉬었다.
새로 산 아티팩튼데… 벌써 이가 다 빠졌다.
그의 앞에 보이는 것은 산양 같은 머리를 한 악마. 검은 투 버튼 정장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손에는 초록색 수정이 장식된 지휘봉을 들었다.
악마가 산양의 안면근육으로는 불가능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바포메트]
중저음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같은 매력적인 목소리가 남우를 조롱했다.
“정말 끈질기군요. 저는 이제 슬슬 지겨워지는데.”
“그러냐! 난 이제 시작인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우는 두려웠다. 바포메트는 강했다.
게다가 무수한 악마를 끊임없이 소환하는 힘…….
본인은 손가락 까딱도 안 하고 마치 게임을 하듯 악마를 소환해… 구역을 지키던 헌터들을 몰아붙였다.
열 명 중에 남은 것은 남우를 포함해 고작 세 명.
그마저… 저놈이 진심을 발휘하지 않고 그저 즐기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바포메트가 지휘봉을 들었다.
“좋습니다. 당신들의 분투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마지막 수하를 막아내면 전 더 이상 당신들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지요.”
“뭐?”
지휘봉의 수정이 빛났다.
별안간, 땅이 흔들렸다.
쿠르르르르!
“으앗!”
상수도와 하수도관이 터지며 곳곳에서 물줄기가 분출됐다. 매캐한 유황 냄새가 별안간 코를 찔렀다. 땅의 갈라진 틈에서 용암처럼 시뻘건 불빛이 비추더니… 뼈마디만 남은 것 같은 거대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구오오오오오오!”
전장 십 미터가 넘는 거대한 악마였다. 이목구비가 없는 회색의 번들거리는 얼굴에, 기아같은 몸. 입이 있어야 할 곳에는 수술 자국 같은 흉터가 사타구니까지 이어졌다.
흉터가 갈라지며, 그곳에서 장어 같은 이빨이 빼곡하게 난 입이 울부짖었다.
“구오오오오!”
[처형자 어나힐런]
어나힐런이 한 손에 든 거대한 대검을 끌고 걸어왔다.
저런 검을 어떻게 휘두르나 했는데… 손이 엄청난 속도로 근처에 있던 작은 악마를 낚아채 대검에 내리꽂았다.
“끼에엑!”
악마가 단숨에 두 동강이 났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상체를 어나힐런이 길쭉한 입으로 던져 씹었다.
우적우적….
남우는 다리가 덜덜 떨렸다.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남우는 물러나려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여기서 물러나봤자, 도망칠 수도 없다. 남우는 양손으로 검을 쥐고 외쳤다.
“덤벼라!”
태양빛이 검에 반짝, 반사된 순간… 어나힐런의 거구가 단숨에 압착됐다.
콰앙!
“어?”
지휘봉을 든 바포메트도, 남우도, 다른 헌터와 악마들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해 멍하니 어나힐런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크레이터처럼 움푹 파인 땅 안에서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옆구리에는 어디서 사마엘… 아니, 삼식이가 짐짝처럼 매달렸다.
태양이 남자의 등을 찬란하게 비췄다.
남우가 눈물이 글썽이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혀… 형님!”
“오. 수고한다.”
손을 들어 인사한 이현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바포메트가 지휘봉을 떨어트릴 뻔했다가 황급히 다시 잡았다.
“온 김에 대강 정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