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S급 (1)
헌터협회의 상공을 장식한 S급 게이트는 지상을 내려다보는 신의 눈 같았다.
그 안에 비치는 우글거리는 악마들은 신이 이 세상에 악의를 품었다는 절망적인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품게 만드는 광경조차… 실은 절망의 편린에 불과하다는 증거를, 삼합회의 산주 량첸이 뒷짐을 지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게이트의 가장 깊은 안쪽에 자리한 붉은 호수.
바람도 없는데 끊임없이 물결이 치며 수면이 일렁인다.
아니… 그것은 물결이 아니었다.
“아아아……!”
“으아악!”
“꺄아아아…….”
아우성치며 비명을 지르는 생명들.
피와 내장을 뒤집어쓰고 새빨갛게 물든, 수를 셀 수 없이 회오리치는 생명의 파도였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는 순간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끔찍한 광경을 보는 량첸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곧 주인님께서 강림하신다.”
지팡이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올 어리석은 S급 헌터들의 피와 살점을 주인님의 양식으로 바치는 것이 우리가 할 일…….”
량첸이 몸을 돌렸다. 아홉 명의 간부가 각기 편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각자 실수하지 말고 S급의 수급을 취하도록 해라.”
“네!”
들어올 S급은 다섯!
헌터협회의 정보원을 통해 누가 참여했는지 파악이 된 상황.
S급 한 명을 두 명의 간부가 요격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간단하지만 확실한 계획이다. 원래도 S급의 힘을 지닌 간부들이, 주인님께 힘을 받아 더욱 강화된 상황!
한국의 S급들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강화된 간부들의 협공을 당해낼 순 없을 것이다.
단, 특히 강력하다고 알려진 S급 쉐도우 로드는 다른 S급들을 모두 처치한 후 협공해 죽일 예정이었다.
기청융이 물었다.
“그럼 이현이라는 자의 대처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량첸의 길게 늘어진 하얀 눈썹이 바람에 휘날렸다. 눈썹 아래에서 눈이 붉게 번뜩였다.
“그자는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 네 말대로 그가 그리 강하다면… 직접 상대할 가치가 있겠지.”
간부를 셋이나 죽이고 기청융의 전의를 잃게 만든 이현의 능력은 경계할 만하다.
그리 강한 놈이니 기청융을 통해 당당히 경고를 전했을 터.
원래 산주도 같이 나서서 S급들을 빠르게 정리할 계획이었지만, 이현은 만전의 상태로 맞이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봤자 S급들의 죽음이 조금 늦춰지는 정도겠지.
량첸은 손주를 돌보는 할아버지처럼 자애롭게 웃었다. 헛되이 발버둥 치다 죽어갈 이들의 생명 앞에 어찌 자애로워지지 않을까!
“자… 시작하자꾸나.”
아홉 명의 그림자가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게이트에 안 가신다고요?”
배낭 하나 가득 짐을 챙겨온 남우는 이현의 말에 놀랐다.
이번 게이트는 S급!
강남과 사당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S급 게이트에서 뛰어나온 괴물들이 날개가 달려 있기라도 하면 지금 도망쳐도 늦을지도 모른다.
참가만 해도 떨어지는 콩고물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나 이현은 진지한 얼굴로 품을 내려다봤다.
“못 간다.”
“아뺘.”
빈이가 이현의 품을 꼭 잡고 매달렸다. 통통하고 하얀 볼을 가슴에 딱 붙이고 있다.
“빈이가… 안 놔줘.”
원래는 지금 낮잠을 자고 있어야 하는 시간인데… 어제 오토바이 소리 때문에 늦게 잔 빈이는 오늘 10시가 다 돼서 일어났다.
평소 기상 시간이 8시고 11시에 낮잠을 잤단 것을 감안하면, 11시가 약간 넘은 지금은 1시는 돼야 자겠지.
“아.”
곤란하다. 남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현은 큰 전력이다. 아니, 세계최강의 전력일지도 모른다.
그런 이현이 공략전에 빠지면 그만큼 전력에 공백이 생기는 것!
희생자도 늘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빈이가 안 놔준다면 어쩔 수 없지…….’
위급상황에 딸과 함께 있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바꿔놓을 수는 없다.
“희수랑 어머니는?”
이현이 빈이와 함께 볼 풀장에 들어갔다. 공을 빈이 손에 쥐여주자 빈이가 홱 공을 던지고는 꺄르륵 웃었다.
올 때마다 새로운 물건이 늘어나는 느낌이다.
“지금쯤 쉘터에 계실 겁니다.”
희수라면 모를까 병들어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는 오랜 이동을 감당할 체력이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대피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비싼 동네라서 근처에 쉘터가 몇 개나 있었고 관리도 잘 된 상태였다.
“그래? 다행이네. 나도 빈이만 재우고 갈 거니까 무리는 하지 마라.”
게이트에서 나온 괴물들이 사당까지 오면 이현도 곤란했다. 빈이가 붙잡지만 않았으면 그냥 아침에 달려가서 후딱 처리하고 나왔을 것이다.
이현은 TV를 틀었다. 뉴스에서 하늘에 뜬 게이트를 조망하는 중이었다.
어느 채널을 틀어도 게이트 얘기뿐이다. 아나운서가 애써 침착하려는 것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이번 게이트 공략에는 S급 헌터 다섯 명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헌터가 참가했습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풍경을 보니 걱정부터 듭니다. 과연 공략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현은 발등을 긁적거렸다.
‘좀 걱정되기는 하네… 빈이가 얼른 자야 하는데.’
“아뺘.”
빈이가 그의 몸을 와락 덮쳤다.
“아이쿠.”
이현이 과장되게 넘어지는 시늉을 하자 빈이가 꺄르륵 웃었다. 이현이 헤벌쭉 입을 벌렸다.
“우리 딸은 어쩜 이렇게 예쁘지?”
얼굴 천재… 얼굴 천재다!
“우리 빈이는 아이돌이 좋아요, 배우가 좋아요?”
아빠가… 아빠가 다 시켜줄게!
이현은 빈이를 안고 신나게 오구오구했다. 오던 잠도 깰 기세였다.
* * *
쿠르릉!
몸을 감쌌던 정전기 같은 기운이 개운하게 사라지고, 대신 먹물처럼 칙칙하고 무거운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명우는 눈을 떴다. 폐허가 된 도시가 보였다.
[길항하는 힘의 회랑]
전쟁에라도 휘말린 듯 부서지고 무너진 건물들. 그러나 드러난 철골과 시멘트 파편들은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무너지다 만 상태로 허공에 떠 있다.
그런 파편들의 위와 건물의 틈 곳곳에서 사악한 마력을 띤 악마들이 돌아다녔다.
“찾아다니면서 죽이는 것도 일이겠소.”
옆에서 먹필도사가 부채를 부치며 말했다.
명우는 앞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게이트 깊숙한 곳에 자리한 마력의 근원을.
“한 마리도 놓치지 말아야죠.”
그때 하얀 옷을 펄럭이며 예슬이, 뒤이어 쉐도우 로드와 붉은 수녀를 포함해 줄줄이 삼십여 명의 A급 이하 헌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먹필도사가 이끄는 길드 ‘칠성검’의 길드원들과 ‘블랙벤더’의 길드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슬이 들어오자마자 양팔을 펼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녀의 등 뒤로 자애로운 미소를 띤 여인의 형상이 나타났다. 갑옷을 입고 금빛 날개를 단 모습이 북유럽 신화의 발키리를 연상시켰다.
[성녀의 축복]
―자신과 지정한 대상 최대 13명의 힘과 스킬 데미지를 강화합니다.
―설명 : 강화되지 않은 한 명은 배신자라고 합니다.
따스한 황금색 빛이 열세 명의 헌터들을 감쌌다.
[각성 : 빛의 파편]
―자신을 제외한 반경 20미터 내의 모든 생명체에게 ‘빛의 파편’을 부여합니다. 빛의 파편은 대상 최대 체력의 50%만큼의 피해를 3번 막아줍니다. 막아준 후에는 사라집니다. 빛의 파편을 지닌 사람은 모든 스테이터스가 10% 상승하고 이동속도가 20% 상승합니다. 또한 모든 공격에 ‘성’ 속성 데미지가 10% 추가됩니다.
―설명 : 오래전 죽은 신의 파편. 그러나 그 자애로운 의지는 여전히 긍휼한 자들을 가호한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예슬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마력을 쏟아냈다.
성가대의 우렁찬 합창 소리와 함께 붉은 하늘을 신성한 금빛이 일렁이는 구름이 덮었다. 구름의 틈에서 천국의 빛이 내려앉았다.
한결 따스해진 느낌이 들며 공기에서 달콤한 향이 났다.
[세페르 에레츠]
―성스러운 영역을 만들어냅니다. 이 영역에서 ‘마’ 속성을 지닌 자들은 피해를 입습니다. 그 외의 모든 생명체들은 최대 체력에 비례한 체력을 2초마다 회복하고 모든 방어력이 5% 상승합니다.
―설명 :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하늘에서 내려온 예슬이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전 이제 당분간 힐링 같은 간단한 보조 마법밖에 못 해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A급들은 거의 S급 수준으로 강화됐다. 헌터들이 아이돌을 마주한 열혈팬처럼 그녀를 바라봤다. 빛의 파편처럼 강력한 보조 마법은 처음 받아보는 이들도 많았다.
도시 하나에 가까운 면적에 영향을 끼치는 마법이라니! 보는 이들에게는 기척처럼 느껴졌다. S급이지만 서포터라고 무시하던 사람들도 인식이 달라졌다.
이 정도면 어떤 면에서는 다른 S급들보다 훨씬 유용하다!
“그럼, 시작하죠.”
명우가 저격총을 꺼내 들었다. 선 자세 그대로 저격총이 수평으로 미끄러지며 불꽃을 뿜었다.
탕! 타탕! 탕탕!
스코프에 눈을 대고 집중하는 것도 아닌데, 총성이 울릴 때마다 먼 거리에 서 있던 악마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그렇게 악마들을 쓰러트린 명우가 담을 넘었다.
금빛의 신성한 빛이 떨어지는 가운데 판초우의를 휘날리며 걷는 명우는 옛 신화 속 용사처럼 보였다.
“흥을 돋워야겠군!”
먹필도사가 스마트폰과 연결된 커다란 스테레오 스피커를 근처 돌 위에 올려놓았다.
―범 올라온다~ 범이 올라온다~
지켜보던 헌터들이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봤다. ‘저거 저렇게 트는 거였냐?’는 눈빛이다.
철면피를 깔고 폐허에 선 먹필도사가 부채를 옆으로 촥 펼쳤다.
그러자 옆으로 먹이 터지며 다섯 개의 분신들이 나타났다.
“먼저 가보겠소!”
“끼얏호!”
“가즈아~”
여섯 먹필도사가 제각기 학과 범 등을 소환해 올라타더니 악마들을 향해 돌진했다.
웨어울프걸이 쭈뼛쭈뼛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완전히 수화해 2미터가 넘는 키로 그러니 뭔가 어색했다.
“다들 수고하세요!”
파지직!
웨어울프걸이 풀쩍 뛰자, 그녀가 뛴 자리에 푸른 전류가 잠시 회오리치며 번뜩였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간 그녀가 건물 하나로 대담하게 뛰어들었다.
잠시 후, 뛰어든 건물의 안쪽에서 번갯불이 사납게 번쩍였다.
콰릉!
쿠르르…….
헌터들이 조금 기대에 찬 눈으로 쉐도우 로드와 붉은 수녀를 바라봤다. 두 헌터가 어디서 났는지 행사에서나 볼 법한 파란 접이식 의자를 꺼내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팔짱을 끼고 앉았다. 은색의 가면 밑에서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우린 입구를 지키지.”
퍽이나 믿음직한 소리다. 하지만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온 블랙벤더의 길드원들도 길드장인 쉐도우 로드를 따라 옹기종기 주변에 앉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헌터들이 먼저 간 S급 헌터들을 따라 열심히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