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전조 (1)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명우는 눈을 떴다. 그러나 눈앞은 여전히 어둠이었다.
끔찍한… 동시에 그리운 감각이 그를 사로잡아 어둠 속에 얽매여 놓았다.
투정 부리는 목소리가 저절로 목울대를 울렸다.
“아! 아빠! 아들 마지막 휴간데, 선곡 센스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또다!
명우는 가슴을 찢는 흉통을 느끼며 앞을 보았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운전하는 아버지… 조수석에는 어머니가 보였다. 옆에는 일곱 살 난 여동생이 앉았다.
아버지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오히려 좋지 않냐? 이제 막 가소롭지 않냐? 막 입대하는 놈들 생각나서 재밌고.”
“타인의 불행에 기뻐하는 건 악취미라고요.”
“하하하!”
휴가 나온 아들을 직접 데리러 온 아버지는 기뻐 보였다. 어머니도…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도 핑크롱이라고 불리는 분홍색 인형을 안고 신이 났다.
“가기 전에 요 앞 갈빗집 가서 갈비 먹고 갈까?”
“아이, 됐어요. 위수지역 사람들, 다 군인 등쳐먹고 사는 거 몰라요?”
“인마…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떡하냐. 다 힘들게 먹고 사는 사람들 아니냐.”
트럭기사… 지금은 택시 운전사… 안 해본 일이 없는 아버지는 노동자 계층들에 대한 과도한 호의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그런 아버지를 명우는 항상 존경했다.
“아빠는 사람이 너무 착하시다니까.”
“착하기는, 인마… 당연… 어엇?!”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때는 왔다.
별안간 휘몰아친 거센 바람! 시야가 형형색색으로 일그러지고 멀미가 날 듯 어지럽다.
차가 뒤집힐 것처럼 흔들리다… 정말로 뒤집혔다.
쿠쿵!
“꺄악!”
“으악!”
정신을 차리니, 그곳은 아마존을 연상시키는 밀림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5년 전 처음 일어난 동시다발적 게이트 폭발!
그 재앙에 휘말린 것이다.
‘안 돼! 도망쳐!’
항상 그랬듯…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명우는 외쳤다.
간절하게, 절절하게, 이 악몽에서 그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면 아마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였다.
명우는 힘겹게 차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인한 뇌진탕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는 수풀 속에 누운 채 힘겹게 숨을 골랐다.
그때, 숲에서 괴물들이 나타났다.
“캬르르륵!”
“쿠루루루!”
[리저드맨]
도마뱀의 머리와 어울리지 않게 인간처럼 두 발로 선 괴물들…… 새파란 혀를 날름대며 다가온 그것들이 우르르 차로 달려들었다.
“아악!”
“꺅! 여보! 세연아!”
“엄마아! 으아앙!”
학살이 벌어졌다. 도시락통에서 반찬을 꺼내듯, 리저드맨들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강제로 낚아챘다.
‘안 돼! 안 돼!’
그리고 어린 여동생… 세연이까지… 리저드맨 하나가 쑥 팔을 집어넣어 낚아챘다.
시야가 까맣게 일그러졌다.
“안 돼!”
명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옆에 있던 여자가 펄쩍 뛰었다.
“어머나! 깜짝이야!”
하얀 병동이었다. 명우는 멍하니 옆을 보았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간호사는 아니다. 가운이 아니라 코스프레 같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누구…시죠?”
“S급 헌터 성… 아니, 예슬이라고 해요. 불스아이 병장님 치료를 돕고 있었어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실종되었다가 다시 복귀한, 길드 ‘칠성검’ 소속의 S급 헌터.
보통 이런 코스프레를 한 이들은 대부분이 헌터기는 했다. 전투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차림새를 굳이 고집할 이유는 일반적으로 없다.
그러나 헌터라면, 옷 자체가 아티팩트인 경우가 많다. 저 르네상스 말기에 튀어나온 것 같은 드레스에서도 마력이 느껴졌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실례지만 다시 좀 누워주시겠어요?”
“예.”
명우가 눕자, 예슬이 양손을 그에게 향했다.
[힐링]
―마력을 소모해 부상을 치유합니다. 질병, 독, 선천적 장애에는 효과를 발휘하지 않습니다. 절단된 신체 부위도 복구할 수 없습니다.
―설명 : 지이이이이이잉.
노란빛이 명우의 몸을 감쌌다. 명우는 욱신거리던 갈빗대의 통증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점차 꿈에서 얻은 가슴의 고통만이 선명해졌다.
“여긴 어디죠?”
“헌터협회예요. 먹필도사 님이 데려다주셨고요.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사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슬은 이미 명우가 삼합회로 추정되는 자들에게 습격당했다는 이야기를 먹필도사에게 들었다.
삼합회는 나쁜 놈들이고 그들에게 습격당했다면 착한 사람…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했다면 헌터로 생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명우는 가는 곳마다 살육과 파괴를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이 피해를 입은 적도 종종 있었다. 어떤 국가에서는 테러리스트로 지목당하기도 했다.
사실 예슬은 이렇게 명우를 치료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럼 다음부터는 사적인 일에 다른 사람이 휘말리지 않게 주의해주세요.”
명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유념하죠.”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었음을 느낀 명우가 홱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할 일이 많다. 놈들이 공장에 함정을 파놓고 있었다면… 원래 그곳에 있던 아인들은 다른 곳으로 옮겼을 터. 아직 중국까지 옮기진 못했을 테니 전부 제거해야 한다.
괴물들이 인간의 터전에 둥지를 틀고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사실을,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사례하죠.”
“잠깐만요!”
밀랍인형 같은 얼굴로 쳐다보는 명우에게 예슬이 말했다.
“협회 상공에서 S급 게이트의 전조가 포착됐어요. 내일쯤 열릴 것 같대요.”
“S급……!”
그것도 헌터협회의 상공이라면 강남 한복판에서 재앙이 시작된다는 의미다.
‘예지몽이라도 꾼 것인가…….’
명우는 피식 웃었다.
아인과 이탈한 괴물 사냥이 벌레 청소라면, 게이트 공략은 알집의 제거다.
하물며 S급 게이트라면… 양봉업자가 장수말벌의 둥지를 발견한 것과 같다.
놓칠 수 없다. 또다시 새로운 눈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명우는 침대 한쪽에 고이 모셔진 자신의 장비와 무기들을 보았다.
“S급들 포함해서 다른 헌터들도 많이 부른다고 해요. 이번 게이트는 역대 최대 공략이 될 거래요.”
“그렇군요.”
다른 S급들은 기여도 같은 경쟁을 하는지 모르지만… 명우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다면 악마의 힘이라도 빌릴 것이다.
“무기 좀 조달하고 오겠습니다.”
명우는 훌쩍 방을 나섰다.
몸은 아직 피곤하고 욱신거리는 곳도 많았지만… 증오와 원념이 가솔린처럼 혈관에 에너지를 공급했다.
죽어야 하는 괴물이 너무나 많았다.
* * *
부아아아앙! 푸드드드! 바아아앙!
과시하는 것 같은 배기음이 도로 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12시가 가까운 시각… 갑작스러운 소음에 도로 근처 아파트에서 짜증 섞인 인기척들이 들려왔다.
시속 200km가 넘는 속도로 도로를 미끄러지는 것은 새카맣게 도장된 오토바이!
오토바이를 조종하는 자는 삼합회의 간부 중 하나인 소축(小丑) 기청융이었다.
검은 레이서 슈트를 입은 그는 잔뜩 신이 났다.
“하하하하!”
이제 내일이면 거사가 시작된다.
지금보다 더욱… 힘이 곧 권력이 되는 세상이 펼쳐지고, 불로불사의 힘을 손에 넣게 될 터!
산주는 가능한 자중하라고 말했으나, 도무지 내일까지 그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나온 것이다.
삼합회의 간부들은 모두 욕망에 충실했지만, 기청융은 그들 중에서도 미쳐 있다고 평가받을 만큼 탐욕스러웠다.
그리고 그가 욕망하는 것은 바로 살육……!
특히 약한 자가 짓밟히며 내는 비명은 그를 언제나 절정에 이르게 만들었다.
이렇게 스피드를 즐기는 것도 그 나름대로는 인내하는 것이었다.
부아아아아!
강남에서 시작된 폭주가 어느새 사당까지 이르렀다.
거사는 강남에서 시작되니… 오늘은 서울을 한 바퀴 도는 걸로 만족해야겠다.
그는 잠시 멈춰서 마후라를 거세게 울렸다.
부릉! 부르르르! 바아아앙!
“히~ 하!”
그리고 다시 신나게 질주하기 위해 스로틀을 올렸는데…….
오토바이가 꿈쩍도 안 했다.
“응?”
끼기기긱!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퀴가 지면을 공회전하며 격렬한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무 타는 냄새가 마력으로 민감한 후각을 자극해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뭐야?”
홱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들어왔다.
웬 놈이 리어카울을 붙잡고 있었다.
한 손으로.
그것뿐인데, 180마력을 자랑하는 오토바이가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무… 뭐야?!”
아니… 묻자마자 기청융은 알 수 있었다. 새카만 흑발에 붉은 눈. K드라마에 주연으로 나올 법한 잘난 상판은 소녀팬이라면 백 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모습이었다.
이현이 살벌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려.”
밤이 새벽으로 바뀌는 시각…….
이놈의 오토바이 소리가 아주 쩌렁쩌렁하게 집을 울렸다. 일부러 방음이 잘되도록 2,000만 원이 넘는 고급 샤시를 달았는데 이놈의 개조된 마후라 소리는 소용없다는 듯이 뚫고 들어왔다.
아파트 고층일수록 소리가 잘 울리는 탓도 있겠지.
덕분에 잘 자던 빈이가 깨어나고 이현의 분노도 깨어났다. 그냥 쌩 지나갔으면 굳이 잡으러 올 생각도 안 했을 텐데, 과시하듯이 제자리에서 여러 번 소리를 울려 성질을 건드렸다.
“안 내려? 부순다?”
한국어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분위기로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재미있군…….”
기청융은 흥미를 느끼며 내렸다. 그는 이현이 자신을 일부러 찾아보고 왔다고 생각했다.
‘삼합회 간부를 하나하나 제거할 생각인가… 역시 간부 중에 배신자가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정보와 동선이 이렇게 빨리 이현의 귀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 기청융은 싸울 준비를 하며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간부의 면면을 훑었다.
한국에는 지금 산주를 포함하여 아홉 명의 간부가 전부 들어와 있다.
그들 중 셋은 불스아이 병장을 잡기 위해 갔으니 제외한다고 치면…….
‘할로우맨이겠군.’
간부 중 하나인 할로우맨은 유일한 중국계 미국인으로 미국 쪽의 유통망을 꽉 잡고 있었다.
그가 의심 가는 이유는 하나. 같은 중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핸드폰으로 재빨리 산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할로우맨은 첩자.]
“얌마. 야밤에 오토바이를 그렇게 시끄럽게 몰면 안 되지. 마후라 개조는 불법인 거 몰라?”
이현이 뭐라 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기청융은 곧장 스킬을 준비했다.
어차피 싸울 거라면 선수필승이다!
삼합회의 히트맨들은 차나 오토바이 등을 타고 가다가 기습적으로 사격을 하는 전법을 애용했다. 기청융은 바로 그 히트맨 출신이었다.
[각성 : 혈마옥]
―체력과 마력을 소비해 피로 이루어진 구슬을 소환합니다. 지능 스테이터스에 비례하여 소환 개수가 늘어납니다. 지능 스테이터스에 비례한 속도로 움직입니다. 혈마옥은 모든 물리, 마법 방어력을 30%(지능 스테이터스에 비례해 증가) 무시합니다.
―설명 : 혈액형에 따라 색깔이 달라집니다.
붉은 구슬 스무 개가 기청융의 주위에 떠올랐다. 이 혈마옥을 자유자재로 조정해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것이 기청융의 전법!
그가 날리는 혈마옥은 기관총의 탄알만큼 빠르고, 마력이 실려 있기에 헌터들이나 괴물들이 몸도 스펀지처럼 뚫어버린다.
100미터 거리에서 발사된 총알도 막아낸 경험이 있는 정교하고 강력한 스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