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삼인일색
한 남자가 초승달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정말로 달에 앉은 것은 아니다.
불이 꺼져 까맣게 암전된 빌딩의 옥상에 앉은 모습이, 그렇게 보일 뿐.
그러나 하얀 옷을 입고 긴 은발을 나부끼는 신비로운 용모는 그에게 그만큼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귀검 백혼.
S급 헌터이자 삼합회의 간부였다.
어두운 공장을 내려다보며, 백혼이 입을 열었다.
“놈이 근거지를 옮겼다.”
백혼의 뒤에는 두 남녀가 앉아있었다. 파라솔이 꽂힌 식탁에 앉아 여유롭게 음료를 마시는 중.
그러나 그들의 기운 또한 백혼에 뒤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들 또한 삼합회의 간부였으니.
마치 소녀처럼 보이는 용모인 간부, 홍아가 음료를 한 번 쪽 빨은 후, 물었다.
“어디로?”
백혼이 한 손을 기도하듯 들고 말했다.
“사당이라더군. A급의 제보이니 틀림없다. 멍청하게 덤볐다가 깨졌다더군… 일심정념… 일심정념…….”
“뭐, 그놈에게 간부 둘이 깨졌다는 소식은 안 퍼졌으니까. 방심했겠지.”
그녀의 앞에서 야수 같은 회색 머리의 남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에 들려 있던 맨주캔이 단숨에 구겨졌다.
그 또한 간부인 야인 철휘!
“흥! 갈수록 흥미롭군! 그놈, 꼭 싸워보고 싶어!”
홍아가 피식 비웃었다.
“방심하다가 깨지는 거, 딱 너 같은 인간이 하는 짓 아냐?”
“뭐야?”
살벌한 기운이 퍼지려는 찰나, 백혼이 고개를 돌렸다. 은발 사이로 눈이 서슬 퍼런 광채를 빛냈다.
“그만! 지금은 불스아이 병장이 우선이다. 임무에 집중해! 일심정념……!”
그때 공장 어귀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판초우의를 입은 우울한 분위기의 사내였다.
백혼이 눈을 빛냈다.
“놈이군.”
“오.”
긴 소매를 아이처럼 펄럭이며 난간으로 다가온 홍아가 반짝반짝거리는 눈으로 아래를 살폈다.
“그래? 어때? 잘생겼어?”
백혼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심정념… 잘생긴 남자를 갖고 노는 그 악취미는 지금 발휘할 때가 아니다.”
“알아. 리더처럼 명령하지 말아 줄래?”
불스아이 병장이 아인 수집 공장을 습격한다는 행동 패턴은 이미 알려졌다.
한국에는 마지막 남은 아인 수집 공장으로 놈이 올 것은 당연한 순리!
그를 제거하기 위해 세 간부가 한꺼번에 모인 것이다.
백혼이 다시 기도했다.
“나라고 하고 싶어 하는 줄 아나? 최소한의 지침도 세울 줄 모르는 너희이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는 거지. 일심정념…….”
“아. 저기, 공장 들어갔다.”
“계획대로 간다.”
홍아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자신의 만두 머리를 장난스럽게 주먹으로 때렸다.
“미안, 계획이 뭐였지?”
“…내가 옥상으로 가고 홍아 넌 외부, 철휘는 내부다.”
철휘가 훌쩍 옥상에서 몸을 날렸다.
“좋아! 선수필승! 크하하하핫!”
“선수필승이랬지? 후회하기 없기다, 고릴라!”
“…이놈들을 데리고 포위진을 짜겠다고 한 내가 잘못일지도 모르겠군. 일심정념!”
막 공장의 입구에 들어서던 불스아이 병장… 명우는 갑자기 폭발한 세 개의 마력을 느끼고 몸을 긴장시켰다.
동시에 천장을 부수고 한 남자가 난입했다.
190에 가까운 거구를 부푼 근육으로 꽉 채운, 야수 같은 인상의 남자! 상의는 회색의 털가죽만 걸치고 검은 가죽바지를 입었다.
“난 삼합회 간부! 야인 철휘다! 죽어랏!”
거구가 복도를 꽉 채우고 달려들었다!
[각성 : 일기당천]
―방어력과 피해량을 힘 스테이터스에 비례해 증가시킵니다. 주위에 있는 공격 대상의 수에 따라 증가량이 커집니다.
―설명 : 고독한 싸움에서 승리한 자… 힘을 얻으리니.
명우가 몸을 뒤로 날렸다.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에서 뿌연 연막이 퍼졌다.
철휘의 주먹이 헛되어 허공을 갈랐다.
네 가닥의 인계철선이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잔재주를!”
끼긱!
철선이 강철에 부딪힌 것처럼 철휘의 몸 위를 미끄러졌다. 인간의 피부가 철선과 부딪치는데 황당하게도 불꽃이 튀겼다!
그야말로 불굴의 전차 같은 방어력!
철휘가 씨익 웃으며 양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퍼엉!
마력이 실린 충격파가 연막을 단숨에 날려 보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순식간에 몸을 낮추고 그의 아래로 접근한 명우였다.
너클을 낀 주먹이 그의 턱을 후려쳤다!
콰앙!
피를 토하면서, 동시에 휘두른 주먹이 명우의 옆구리에 박혔다.
콰직!
“컥?!”
“큭!”
두 남자가 거의 동시에 비틀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철휘는 부어오른 턱을 잡고 명우를 노려보았다. 급소를 맞아 살짝 뇌진탕이 온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놈도 무사하지는 못하다. 명우는 오른쪽 옆구리를 부여잡고 힘겹게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감촉으로 미루어보아 최소 갈빗대 두 개는 나갔다.
“장거리가 주특기라고 해서 얕봤는데… 크큭, 미안하군. 제법 하는구나!”
명우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바로 했다.
가히 초인적인 정신력! 칭찬할 만하지만… 몸의 밸런스가 무너진 것이 한눈에 보였다.
“자, 그럼 다시 해볼까!”
철휘는 어지럼증을 억지로 참으며 명우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판초우의가 펄럭였다.
타앙!
“윽?!”
황급히 몸을 젖혔지만, 강렬한 통증이 어깨를 스쳤다. 삼각근이 도려낸 듯 원형으로 파여 있었다. 철휘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고작 총알이 어째서?’
하위의 헌터라면 모를까… C급 이상만 되어도 어지간한 소총탄은 맨몸에 맞아도 끄떡없다.
하물며 S급쯤 되면, 미사일에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 것이 현실!
그런데 고작 권총의 탄알에 몸이 뚫리다니!
‘놈의 스킬인가?!’
명우가 다시 총을 들었다.
[각성 : 마탄의 사수]
―사용하는 모든 투사체에 마력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투사체는 한 번 맞춘 대상을 유도합니다. 연속 사용 시, 일곱 번째 투사체는 민첩 스테이터스에 비례해 강화된 데미지를 입힙니다. 유도율은 지능 스테이터스에, 데미지는 민첩 스테이터스에 비례합니다.
―설명 : 유혹에 약한 사수여. 마탄을 장전하라. 우리 곧, 지옥에서 재회하리라.
탕! 탕탕!
연속 사격!
그러나 날아드는 속도가 총알과 같다면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다.
철휘는 빠르게 주먹을 내질렀다.
[강인한 주먹]
―300초 동안 주먹을 힘 스테이터스에 비례해 강화한다. 주먹에 맞은 상대가 상태이상 ‘그로기’에 빠질 가능성이 5% 증가한다.
―설명 : 강철 같은 주먹!
두두둥!
북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총알이 납작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철휘는 곧장 몸을 날렸다.
콰아앙!
주먹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발생한 충격파만으로 폭풍이 일고 콘크리트 벽이 철근 채로 날아갔다.
뿌옇게 먼지가 피어오르며 파편이 온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런 난잡한 상황이야말로 명우가 유도한 바였다.
탕! 탕!
연기를 뚫고 날아든 총알이 철휘의 몸을 헛되이 두드렸다.
[거인의 체력]
―모든 방어력과 지구력을 일시적으로 20% 상승시킵니다.
―설명 : 아쉽게도 거인처럼 커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하하! 안 통한다!”
육탄전에 필요한 강화 스킬을 전부 사용한 상태! ‘주인님’께 받은 마력으로 강화된 몸은 S급 헌터의 공격조차 손쉽게 튕겨내는 듯했다.
기척을 숨기고 나타난 거대한 저격총이 뒤에서 철휘를 노렸다.
타앙!
‘마탄의 사수’의 특수효과로 강화된 일곱 번째 사격! 그 전의 사격은 모두 이 한 발을 위한 전주에 불과했다.
두 배로 굵어진 파란 섬광이 단숨에 철휘의 복부를 꿰뚫었다.
“크억!”
피를 토하며 주저앉은 철휘의 머리를 노리고 명우가 마지막 한 발을 준비했다.
“일심정념.”
파슉!
날아든 빛이 총과 함께 명우의 가슴을 노렸다. 명우가 홱 몸을 젖혔다. 허벅지까지 눕힌 채 오로지 종아리와 허리 힘만으로 버티고 누운 것이다!
그 자세로 명우가 총을 쏘았다.
타앙!
날아든 총알을 유리 같은 일본도가 반으로 갈랐다. 홱 검을 휘두른 백혼이 배를 잡고 주저앉은 철휘를 보고는 쯧 혀를 찼다.
“대단하군… 주인님께 힘을 받은 철휘를 제압하다니…….”
회복은 하고 있지만, 워낙 중상이라 재생이 더딘 듯했다.
명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님?”
은발 아래에서 조각 같은 하얀 얼굴이 무심한 시선을 쏘아 보냈다.
“알 것 없다. 일심정념.”
[검성]
―손에 든 물체에 ‘절단’ 속성을 부여합니다. 도검류 무기는 힘과 지능 스테이터스에 비례하여 데미지와 내구력이 강화됩니다. 마력은 소비하지 않습니다.
―설명 : 달인의 손에 쥔 나뭇가지는 검보다 날카로워질 수 있다.
그의 검이 빠르게 허공을 휘저었다. 낚시라도 하는 듯 가벼운 움직임.
그러나 그 효과는 파괴적이었다.
차랑!
명우가 몸을 피한 순간, 방울 같은 소리가 울렸다. 하얀빛이 복도에 마치 그물과 같은 불규칙적인 모양을 비쳤다. 빛이 번쩍이더니 복도가 그물 모양으로 종이상자처럼 잘렸다.
파슛!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왼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팔을 움켜쥐고 밖으로 나온 명우를 웃음소리가 덮쳤다.
“꺄하하하핫!”
날아든 것은 거대한 뿅망치!
그러나 장난스러운 외견과 달리 그 힘은 무시무시했다. 망치가 단숨에 총을 부서트리고 명우를 땅에 내리꽂았다.
뿅!
그 와중에 들리는 장난스러운 소음에 명우는 기가 막혔다.
콰앙!
“커헉!”
피를 토하며 경직된 몸을 향해, 홍아가 골프를 하듯 뿅망치를 휘둘렀다!
“죽으세요~”
명우는 이를 악물고 몸에 힘을 줬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발끝조차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다구리라니! 정의의 사도로서 묵과할 수 없군!”
망치가 명우를 덮치기 직전, 한 남자의 목소리가 밤을 울렸다. 새카만 호랑이가 망치에 몸통 박치기를 시전했다.
쿠웅!
“뭐야?!”
충격에 빙글 몸을 돌린 홍아가 새로이 느껴지는 마력을 노려보았다. 구수한 음악이 울렸다.
―범 올라온다~ 범이 올라온다~
명우의 옆에 새카만 학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위에는 부채를 든 선비가 고고히 서 있었다.
선비의 얼굴을 본 홍아의 볼이 빨개졌다.
“뭐야… 존잘남이네?”
비틀비틀 일어나는 명우를 먹필도사가 흘끔 보았다.
“이것 참… 순찰하다가 뭔 소란인가 했더니… 청문회 각오하시오.”
먹필도사가 부채를 크게 내저었다.
“퇴(退!)”
문어가 뿜은 먹물처럼 새카만 기운이 공장 전체를 덮을 듯이 번졌다. 광범위 공격 스킬이라고 판단한 홍아와 백혼이 재빨리 뒤로 피했다.
그러나…….
한 차례 공장을 뒤덮었던 먹물은 순식간에 씻은 듯 사라지고, 먹필도사와 명우의 모습도 녹아내린 듯 없어졌다.
“사라졌어!”
“도주인가!”
완벽하게 함정을 파고 기다린 작전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남자의 난입으로 실패했다. 이 사실을 산주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백혼은 벌써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홍아는 잘생긴 남자를 보고 신이 난 눈치였다.
“뭐해! 빨리 추적하자! 나 쟤 마음에 들었단 말이야!”
“아니… 그놈은 꽤 강했다. 이 이상 일을 벌일 수는 없어.”
중국이라면 모를까 한국은 치안이 꽤 강한 편이다. 게다가 곳곳에 CCTV도 있어… 자칫 잘못하면 거사 이전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어차피 놈이 한국의 S급이라면… 내일 거사에 반드시 오게 돼. 불스아이 병장도 치명상을 입었으니 쉽게 회복하지 못할 테지.”
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홍아가 히죽 웃었다.
“그럼 아까 그놈 또 나타나면 나한테 알려줘. 알았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