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전조
보글보글…….
된장찌개가 구수한 냄새를 내며 끓었다.
송송송…….
호박을 썰어 된장찌개에 넣은 일성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번졌다.
‘슬슬 현 군이 돌아올 때가 됐는데…….’
그는 요새 즐거웠다.
이렇게 즐거운 나날이 있었나!
결혼 후 드문드문 문자를 보내던 아들은 게이트 폭발 이후 완전히 소식이 끊겼고…….
홀로 집에 돌아와 밥을 해 먹기를 5년.
가끔 보호비를 내라며 문을 두드리는 조폭들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제, 기다리면 돌아올 사람이 있다.
심심하면 이야기할 사람도 있고…….
“하빼!”
발목에 뭐가 툭 걸렸다. 아래를 보니, 빈이가 그의 발목을 잡고 일어나는 중이었다.
몸을 일으킨 빈이가 뒤뚱거리며 웃었다.
“하빼!”
일성이 빙그레 웃었다.
빈이의 존재는 이현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큰 축복이었다.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참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최근에는 사람이나 물건을 짚고 일어날 수도 있게 돼선지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그래서 더 귀여웠다.
‘우리 진태도 이런 시절이 있었는데…….’
진태. 연락이 끊긴 외동아들의 이름이었다.
“하빼.”
빈이가 그의 다리를 두드렸다. 일성에게 마력이 없었으면 멍이 들었을 힘이었다.
아마 들어달라는 것이다. 빈이는 사람에게 안기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할아버지가 어쩌지. 지금은 요리 중이라 위험해서 안 되는데.”
빨간 눈이 시무룩해졌다.
아직 어린데도 똑똑한 빈이는 부정적인 분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그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려서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일성은 된장찌개의 불을 줄이고 빈이를 안았다.
“그럼 할아버지가 조금만 안아줄게요~”
영차.
일성의 품에 안긴 빈이가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빤히 바라봤다.
통통한 손이 찌개로 뻗었다.
“브아.”
“어이구, 안 돼요.”
빈이가 일성을 한번 보고 다시 손을 뻗었다. 이글거리는 가스불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브아.”
만지고 싶다는 뜻이다. 일성은 아예 몸을 돌렸다.
빈이가 화상이라도 입으면 이현을 볼 면목이 없다.
그때 빈이가 홱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늦게 인기척이 들려왔다.
“허허, 우리 빈이가 아빠 잘 알아보네. 응?”
“아뺘!”
빈이가 방긋 웃으며 현관으로 양손을 뻗었다.
들어오던 이현이 그 얼굴을 보고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아유, 우리 따아아알!”
“아뺘!”
빈이를 안아 드는 이현을 보며 일성의 가슴이 따스하게 젖어 들었다.
“그런데 현 군, 오늘은 어디 갔다 왔나요?”
게이트 공략은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지 않는데…….
이현이 빈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 남우랑 집 좀 보려고요.”
“집 말이군요…….”
일장춘몽.
꿈에서 깬 기분에 일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랬다.
‘현 군은 언젠가 갈 사람이었지.’
진짜 가족도 아니다. 빈이도 더 좋은 곳에서 잘 살아야겠지.
이사 갈 생각에 기분 좋을 이현에게 부담을 안겨줄 순 없다.
일성은 부엌으로 향하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좋은 집은 찾았나요?”
“사당이 살기가 좋을 것 같더군요.”
된장찌개며 고봉밥에 김치 등이 척척 놓였다. 빈이를 둥기둥기 하던 이현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예.”
“할아버지도 함께 사시죠.”
일성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이현이 담담히 말했다.
“이곳에서 혼자 사시기도 적적하실 텐데요. 돈은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니… 같이 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집을 구할 때부터 생각한 일이었다.
집에 없을 때 빈이를 돌봐줄 사람도 필요하고… 가족은, 있는 것만으로 좋으니.
일성이 붉어진 눈시울로 물었다.
“내가… 그래도 되겠어요?”
이현은 빈이를 무릎에 앉히고 물었다.
“우리 빈이도 할아버지랑 같이 사는 거 좋지?”
빈이가 일성을 보고 꺄르르 웃었다.
“하빼!”
“빈이도 좋다네요.”
“허허허.”
일성은 주름진 손으로 이현의 손을 잡았다.
“내가… 현 군에게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 도리죠.”
식탁을 내려다본 일성이 허허, 웃었다.
“이거, 오늘은 된장찌개로는 부족하겠네요. 이렇게 좋은 날이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준비할 걸 그랬어요.”
“이걸로 충분합니다. 그렇지, 빈아?”
“뺘.”
이현은 된장찌개를 한술 떠서 후, 후 불었다.
고기를 양손으로 들고 먹으려던 빈이가 그 모습을 따라 했다.
“후, 후. 푸!”
별안간 푸른 화염이 빈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화륵!
주먹만 한 화염이었지만, 이현은 물론 정면에 있던 일성도 깜짝 놀라서 몸을 젖히고 굳었다.
빈이가 토끼처럼 눈을 뜬 두 남자를 보고 꺄르륵 웃었다.
“푸푸!”
“지금… 불… 뱉었지요?”
“할아버지도 보셨군요.”
심지어 상당한 고열이었는지 빈이가 든 고기도 살짝 더 익은 것이 보였다.
두 남자가 빤히 쳐다보자 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현은 눈썹을 모았다.
“그동안 너무 기름진 걸 먹였나……?”
“현 군,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 * *
보통 비밀 조직, 음지를 지배하는 거대한 그룹의 수장이라고 하면 베일에 감싸여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인식이지만…….
‘산주(山主)’라 불리는 삼합회의 주인, 량첸은 그렇지 않았다.
산주 량첸은 정재계의 최상위에 우뚝 서서 세계 유수의 권력가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의 본거지는 중국 십 대 명산이라고 불리는 삼청산 깊은 곳.
그 옛날 진시황의 황궁처럼 우아하고 화려한 궁에는 사자며 호랑이는 물론 게이트에서 나온 괴물도 키우는 정원이 있었으며…….
거대한 헬기 포트와 활주로도 자리했다.
심지어 삼합회의 문양이 새겨진 전용기도 가졌다.
지금, 그 전용기가 삼청산의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쿠르릉…….
개인기의 문이 열리며 두 남자와 한 노인이 내렸다.
짧은 머리에 각진 거구의 중년 남자와 하얗고 호리호리한 청년…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한푸를 입은 노인이었다.
노인이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안 온 간부는 없겠지?”
호리호리한 청년이 대답했다.
“전부 모였습니다, 산주님.”
거구의 남자가 각진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으신 이유가 뭡니까?”
따악, 딱!
지팡이의 땅을 짚는 소리가 매서워졌다.
“서희와 마인이 죽었다.”
두 남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둘 모두 고용된 S급 헌터. 삼합회 간부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과는 함께 게이트를 공략한 적도 있는 사이였다.
“그거 아깝군요. 마인은 몰라도 서희는 좋은 여자였는데… 암살입니까?”
“혹시 영귀라는 놈이……?”
“자세한 건 모두의 앞에서 가르쳐주마.”
지팡이는 그저 장식인 듯 노인은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커다란 검은 문. 문의 중앙에는 삼합회의 문양이 큼지막하게 박혔다.
양옆에 서 있던 미인들이 문을 열었다.
광택이 나는 긴 탁자에 아홉 남녀가 있었다. 탁자 위에 가로로 누워 포도를 까먹던 남자가 산주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 산주님!”
온몸이 근육질인 야성적인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이놈! 산주님께 무슨 결례되는 태도냐!”
“뭐? 꼽냐?”
소녀 같은 외모의 여자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차갑게 말했다.
“원숭이랑 고릴라, 둘 다 시끄러.”
“이년이 말하는 꼬라지 보게?”
“이년?”
여자가 일어나려는 찰나, 량첸의 지팡이가 바닥을 때렸다.
쿠웅!
시커먼 색을 띤 마력이 폭풍처럼 장내를 휩쓸었다. 소름 끼치는 기운에 간부들의 몸이 굳었다.
삼합회의 수장 량첸이 간부 열둘을 통솔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부도, 권력도 아니었다.
순수한 힘!
“서희와 마인이 죽었다.”
간부들이 한 차례 술렁거렸다. 탁자 위에 누웠던 남자도 폴짝 뛰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어떤 놈이……?”
량첸의 손짓에 호응해 벽에 빛이 떠올랐다.
어딘가 사악한 미소를 띤 이현의 얼굴이었다.
“블라디미르를 죽인 놈이다. 일주일 전… 이자를 죽이기 위해 서희와 마인을 보냈지.”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한 패배.
“서희와 마인의 마지막 보고에 의하면 놈은 불스아이 병장과 협력하고 있었다.”
“그놈과…….”
불스아이 병장의 이름을 모르는 간부는 없었다.
그는 양지보다 음지에서 더 이름을 날렸다. 게이트에서 나온 것은 괴물이고 아인이고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자!
삼합회에서도 몇 번이나 암살자를 보냈지만…….
거취가 명확하지 않아 그를 찾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탁자에 앉아 있던 ‘검은 뱀’ 왕팡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주인님이라는 분께서 그리 대단하시면 왜 직접 나서지 않습니까?”
간부들은 량첸은 따랐지만… 그의 뒤에 있는 ‘주인님’이라는 존재는 믿을 수 없었다.
량첸도 딱히 믿어서 따르는 것은 아니기는 하다. 하물며 주인님이라는 존재는 여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니….
“후후후….”
그때, 량첸의 뒤에서 음침한 웃음소리와 함께 피어오른 마력이 허공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독을 태우는 것 같은 불길한 빛이 타오르며 균열이 점점 크기를 키웠다.
쩌적!
보랏빛으로 일렁이던 균열이 갈라지며 안에서 금색 눈이 빛났다.
“팔팔하군. 하지만 개는 짖을 때를 알아야 하는 법.”
균열의 안쪽에서 갈퀴처럼 휜 거대한 손톱이 왕팡을 가리켰다. 그러자 무형의 기운이 왕팡의 몸을 옥좼다.
“헉!”
세포 구석구석을 맴돌던 마력이 멈췄다. 마력이란 생명의 근원… 마력이 멈추자 손끝은커녕 숨 한 조각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언제나 자연스레 피부를 감싸 보호하던 마력마저 사라지고, 사악한 마력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혹한의 추위에 알몸으로 선 기분이었다.
“으… 으으….”
괴물의 손가락이 홱 위를 가리켰다.
왕팡의 몸이 트램펄린에서 퉁기듯 위로 솟구쳤다.
쾅! 쾅!
왕팡의 몸이 끈 풀린 인형처럼 사지를 덜렁거리며 연달아 천장과 탁자에 번갈아 쳐박혔다.
그야말로 악마의 인형놀이! 피와 이빨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쿠웅!
탁자가 부서지고 나서야 인형놀이가 끝났다. 간신히 의식만 남은 왕팡의 몸이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으으….”
모두가 조용해졌다.
간부들은 모두 S급 헌터에 준하는 강함을 지녔다. 방금 당한 왕팡은 그 가벼운 입과 달리 실력만큼은 간부들 사이에서도 수위에 있던 자였다.
그런 자가, 제대로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자의 손가락질에 개미처럼 농락당한 것이다!
“자아, 그럼… 이제 짖는 법을 알았느냐. 아니면 아직 부족한가….”
오만한 목소리에는 또래 아이를 왕따시키는 아이들만큼의 악의도 치기도 없었다.
그에게는 방금 그 행위가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길을 가던 중 밟은 벌레를 무심히 잊어버리듯….
모든 간부가 조용히 머리를 조아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그야말로 절대자!
그 사실을 알고도 대항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좋아. 그럼 상을 주마.”
게이트에서 불타는 역오망성이 천천히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