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얼음과 불의 노래 (2)
블라디미르는 뱀파이어로서 긴 시간을 살았다.
그리고 어느 날 꿈결처럼… 계시처럼 이 스킬을 터득했다.
피의 크리스마스.
블라디미르의 몸에서 피가 기화되는 것 같은 아우라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크… 크크크크…….”
힘이 끓어오르다 못해 손끝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느낌!
S급의 피까지 마신 덕에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힘이라면 누구라도 죽여 피 주머니로 만들 수 있을 터!
그의 몸이 붉은 빛줄기를 남기며 이현에게 쏘아졌다.
“하압!”
짐승과 같은 발톱이 돋은 손이 이현의 몸을 수직으로 할퀴었다.
번뜩!
손톱의 궤적을 따라 붉은 빛줄기가 대지를 할퀴었다.
콰르릉!
붉은 빛이 지나간 건물들이 단숨에 예리한 날에 잘린 듯 절단됐다.
“하하하하하!”
힘이 해방되는 쾌감에 블라디미르가 광소를 터트리며 양손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참격이 그물처럼 이현을 감싸는 듯 보일 지경!
덥석.
동강 나는 몸을 블라디미르가 머릿속으로 그린 순간, 이현이 통통 튀는 걸음으로 가볍게 참격을 피해 접근했다.
“아니?!”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다니!
이현의 발이 놀란 블라디미르의 복부를 샌드백처럼 걷어찼다.
퍼엉!
복부가 뒤로 터지며 내장과 피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슈르륵!
그런데… 흩뿌려진 내장과 피가 허공에서 저절로 모여들었다.
이현이 눈썹을 올렸다.
삽시간에 한데 모인 핏덩이가 블라디미르를 재구성했다.
부활에 가까운 재생!
블라디미르가 손을 들어올렸다.
[왈라키아의 창]
―피를 소모해 땅에서 창을 소환합니다. 창들은 지정한 대상을 자동으로 공격합니다.
―설명 : 꼬치구이 하나 완성이요.
대지에서 솟구친 수십 개의 붉은 창들이 이현의 복부를 찌르고 솟구쳤다.
하늘로 날아오른 몸! 무방비하게 뜬 몸을 향해 블라디미르가 손을 내질렀다.
붉은 참격의 뭉치가 상어의 주둥이처럼 이현을 물었다!
콰직!
“하하하핫!”
핏물이 폭발하며 하늘에 붉은 꽃을 피웠다.
쏴아아….
핏빛 비가 내렸다. 블라디미르는 오만하게 웃으며 하늘을 주시했다.
“어디 봐?”
“헉!”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몸을 돌린 순간, 이현의 주먹이 그의 턱을 후려쳤다.
퍼억!
머리가 척추째 뽑혀 투포환마냥 날아갔다.
이현은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날아가기 시작하며 재생된 머리가 떨어지는 순간 발끝까지 완벽히 재생됐다.
척.
착지한 블라디미르가 부득, 이를 갈며 이현을 노려봤다.
‘멀쩡하다니……!’
방금 전까지 일방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조각나고 파헤쳐진 건물들이 그가 받았을 충격을 방증했다.
게다가 끊임없이 결계에 마력과 체력을 빼앗기고 있을 터!
그럼에도 멀쩡하다는 것은…….
이현이 식탁에서 꺼낸 말이 떠올랐다.
―늑대가 양이랑 사이좋게 지낸다고 하면 믿겠냐?
블라디미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양은… 이놈이 아니라 나라고……?’
하지만 설령 이놈이 더 강하더라도 물러날 순 없었다.
평화를 위해. 사랑하는 한나를 위해서!
“죽여버리겠다!”
블라디미르의 몸이 무수한 박쥐로 흩어졌다.
달을 향해 원을 그리며 모여든 박쥐들이 다시 그의 모습으로 뭉쳤다.
그가 막을 열듯 양팔을 벌렸다.
[성녀의 축복]
―자신과 지정한 대상 최대 13명의 힘과 스킬 데미지를 강화합니다.(종족 패널티로 강화 효과가 약화됩니다. 지속적으로 데미지를 받습니다.)
―설명 : 성녀가 왜 남자 열세 명을 강화했을까.
S급 헌터 예슬에게서 흡수한 스킬!
블라디미르의 뒤로 흐릿한 여인의 형상이 나타나더니 그의 몸에 금색의 빛무리를 뿌렸다.
이미 넘쳐흐르던 힘이 이제는 폭발할 것처럼 충만해졌다.
블라디미르는 씩 웃고 자신이 지닌 최강의 스킬을 발동했다.
[쥬데카의 강림]
―지정 범위의 수분을 빼앗아 빙결시킵니다. 내성 저항을 30% 무시합니다. 피해량과 지속 시간은 민첩과 지능 스테이터스에 영향을 받습니다.
―설명 : 종말까지 안전하고 싱싱하게 보관해드립니다.
카드득!
파란 섬광이 일시에 도시를 휩쓸었다.
가로등이 터졌다. 도시 전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지며 온갖 벌레와 쥐들이 놀라 쏟아져 나왔다.
“카앗!”
블라디미르가 양손을 번쩍 펼쳤다. 새파랗게 이글거리는 파동이 그의 발밑에서부터 대지를 내달렸다.
쩌적!
땅의 균열에서 세차게 수증기가 새어 나오더니 이내 날카롭게 얼어붙었다.
건물에도 하얗게 서리가 끼며 유리창이 산산조각으로 깨져나갔다.
필사적으로 달리던 벌레와 쥐들은 체내의 수분이 얼어붙음과 동시에 팽창해 안구며 배를 뚫고 핏빛 폭발을 일으켰다.
하늘을 나는 벌레들도 예외 없이 언 채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야말로 지옥에서 강림한 한기!
블라디미르가 펼쳤던 양손을 이현에게로 향했다.
도시를 형이상적 오브제로 변질시키던 한기가 이현을 중심으로 응축됐다.
대기가 고통을 호소하듯 진동하며 불길하게 따닥거리는 소리를 내는 와중, 이현이 중얼거렸다.
“얼음이라. 그럼 난 불로 할까.”
이현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조여들었다.
찌지직!
그 손에 세계가 찢어졌다.
붉어졌던 세계가 껍질이 깎이듯 뜯어져 이현의 손아귀에 응축됐다.
차원을 나뉘고 있던 결계가 찢어지는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안 그래도 창백한 블라디미르의 얼굴이 더욱 하얘졌다.
스킬이… 결계가 강제로 파괴당하고 그 마력을 빼앗긴다니!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다!
삽시간에 제 색을 되찾은 세계에서 이현의 주먹이 밝게 백열했다.
손안에 응축된 마력의 열량이 타오르며 빛을 발하는 것!
그 강대한 힘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에 블라디미르는 전율했다.
“얍.”
이현이 손바닥을 펼쳤다.
화륵! 콰아아!
용의 숨결과 같은 고열량의 화염이 단숨에 냉기를 몰아내고 블라디미르를 덮쳤다.
공기마저 타오르는 강렬한 열기에 블라디미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긴 백색광이 하늘을 가로지르다가 서서히 옅어졌다.
이현의 신형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연기를 뿜는 소사체 두 구가 보였다.
서로를 안은 채, 둘 다 상체만 남은 상태.
상대적으로 작은 소사체의 아래에 깔린 블라디미르가 새카맣게 탄 얼굴로 말했다.
“한…나… 한나… 만은… 살려…줘…….”
바직바직.
말을 하는 작은 동작에 피부가 석탄처럼 떨어져 나갔다.
이현은 묵묵히 블라디미르를 내려다보았다. 불길이 덮침과 동시에 한나가 블라디미르를 안았다. 아마 본인이 방패가 될 생각이었겠지.
‘내가 나쁜 놈 같네?’
어차피 둘 다 사람의 피를 빨던 뱀파이어. 양심의 가책 따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죽어가는 놈에게 적선도 해주지 못할 만큼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한나는 이미 죽었다.
죽기 전에 마음이라도 편하도록 작은 거짓말 정도는 해줄 수 있다.
“그래, 살려주지.”
“크륵.”
안심한 듯 마지막 숨을 토한 블라디미르가 툭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 어…….”
두 뱀파이어의 몸이 천천히 재로 화했다.
이현은 색을 되찾은 보름달 아래, 반파된 성을 바라보았다.
‘지하에도 사람이 있었지, 아마…….’
* * *
S급 헌터 예슬은 죽음을 결심했다.
속박된 채 피를 빨리기만 3년…….
횟수만 치면 1년에 한 번꼴이었지만, 그때마다 헌터들이 죽거나 납치됐다.
블라디미르라는 괴물의 존재를 알아채고 제거하러 온 정의로운 헌터들…….
블라디미르에게 스킬을 내어줌으로써 헌터들의 죽음에 일조하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구출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에 더 많은 희생을 낳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블라디미르가 지나가듯 흘린 말이 환청처럼 떠올랐다.
―네가 죽으면 다른 S급을 납치하면 그만이야.
자살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놈이라면 정말로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죽을 수 없었지만…….
‘이제, 됐어.’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들린 폭음과 진동은 블라디미르가 또 누군가와 싸웠음을 의미했다.
누군가가 또… 무의미하게 죽었거나 컬렉션이 되어버린 것이다.
피가 빨려 탈진한 몸을 억지로 일으킨 예슬은 이 사이에 혀를 끼웠다.
폭음이 울린 건 그 순간이었다.
콰앙!
사람들을 가둔 금고의 문에 새빨간 구멍이 뚫렸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
군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총을 든 수십 명의 군인들이 들어오더니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손전등 빛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예슬의 앞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A급 헌터 백민호입니다. 괜찮으세요?”
“어…? 헌터……?”
“구해드리러 왔습니다. 조금만 참으…….”
민호가 예슬의 얼굴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혹시… S급 헌터 성녀 임예슬 님?”
“네… 제가 맞아요. 근데 어떻게…? 뱀파이어는…….”
“뱀파이어요? 아뇨, 저희는 신고를 받고 온 겁니다. 어떤 헌터가 이 장소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더 위협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헌터의 부축을 받아 감옥에서 나온 예슬은 멍하니 바닥만 바라봤다.
블라디미르, 그 괴물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사람들을 풀어주기로 했을 리가 없는데…….
“밖에 어마어마한 전투 흔적이 있더군요. 뱀파이어는… 죽은 게 아닐까요?”
“전투 흔적이라고요……?”
들것에 실려 나온 예슬은 헌터가 말한 전투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악이 몸을 지배했다.
반파된 도시, 곳곳에서 치솟은 얼음과 케이크처럼 잘려 나간 건물들…….
이것이 전투 흔적이라면 S급 이상의 괴물이 싸운 것이 분명했다. 그녀도 블라디미르와 싸워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가 누군가와 싸웠고… 패배한 것이다.
그녀의 피를 빼앗아 갔음에도 불구하고!
예슬은 멍하니 물었다.
“여기를 발견했다는 그 헌터…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예? 그건… 협회에서 자세히 듣지 않아 저도 모르겠습니다.”
예슬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달을 보았다.
‘대체 누가…….’
그 모습을 한 여자가 CCTV로 지켜보고 있었다.
블라디미르의 비서였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답지 않은 무표정으로 CCTV를 보던 그녀가 핸드폰을 들었다.
뚜르르… 뚜르르르…….
잠시 후, 거친 중국어가 전화를 받았다.
―뭐냐?
“량웨이입니다. 블라디미르 님께서 죽었습니다.”
―…뭐라고?
량웨이가 털썩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컴퓨터에는 부산에서 마카오로 가는 비행기 티켓 구입 페이지가 띄워져 있었다.
“한국의 B급 헌터 이현이라는 자가 죽인 것으로 보입니다. 헌터들 때문에 자세히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정황상 블라디미르 님의 사망은 확실한 듯 보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 이현이라는 놈, 설마 블랙벤더 소속인가?
블랙벤더!
진저리를 치게 되는 이름이었다.
한국의 음지를 다스리는 패권을 두고 오랫동안 그들을 견제해온 길드.
그들이 아니었다면 삼합회는 진즉에 한국을 장악했을 것이다.
“무소속입니다. 일단 자료는 전부 보냈습니다만… 철수할까요?”
그녀의 임무는 블라디미르의 감시.
그를 삼합회에 들였던 것은 단지 강함 때문이었을 뿐…….
믿을 수는 없었기에 삼합회에서는 일부러 그녀를 잠입시켰던 것이다.
남자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아니, 남아라. 그 이현이라는 놈을 좀 더 관찰할 필요가 있다.
삼합회에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는 헌터라면 조기에 제거해야만 한다.
블라디미르를 치울 정도로 강하다면 더욱이 경계해야 할 터!
“그럼 이곳의 자료는 전부 지우겠습니다.”
티켓 페이지를 지운 그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래, 우리가 개입하고 있었다는 흔적이 있어서는 안 되니.
“다음 연락은 한 시간 후에 하겠습니다.”
빠직.
량웨이가 반으로 쪼갠 핸드폰을 대충 던지고 일어났다.
펑!
컴퓨터가 스스로 터졌다.
불이 꺼진 방안에 남은 것은 스산한 침묵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