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얼음과 불의 노래 (1)
“헉!”
희수는 번쩍 눈을 떴다.
호화로운 방이었다. 샹들리에와 붉은 벨벳 커튼.
누워있던 침대도 생전 본 적 없이 커다란 것이었다. 깔려 있는 시트는 깔끔해서 눈이 부실 지경.
‘혹시… 말로만 듣던 이세계 환생?!’
희수는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붉은색 원목 문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저 문을 열면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줄지어 앉아 있고 ‘성녀님! 일어나셨습니까!’하는…….
‘그럴 리가.’
쉴 때마다 틈틈이 본 로맨스 판타지가 대뇌피질을 어지럽혔음이 틀림없다.
희수는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기억을 차분히 더듬었다.
탈의실에 서 있던 남자, 갑자기 붉어진 시야.
어떤 여자를 본 것도 같은데…….
희수는 숨을 멈추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커다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은 하나. 창문은 없다.
그리고 구석에 보이는 냉장고. 잘 보니 에어컨도 있다.
“…이세계는 아니네.”
아니, 요즘에는 이세계 환생물도 다양해져서 문명이 현대처럼 발전한 세계도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희수는 살금살금 방을 가로질러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문밖은 또 다른 방이었다. 화려한 원목 가구들이 자리한 거실 같은 풍경. 벽난로까지 있었다.
그 방의 가운데에 세 남녀가 스마트폰에 열중 중이었다.
“마피아, 솔직히 거수하자.”
“나 아니라니까. 나 회로실에서 퀘스트 중이었어.”
“구라 아니야? 내가 회로실 지나갈 때 없었던 것 같은데…….”
“님, 회로실 안 지나갔잖아요. 님이 마피아 아님?”
세 남녀는 희수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 그들 중 둘의 모습이 익숙했다. 탈의실에서 희수를 납치한 이들이었다.
희수는 숨을 멈추고 방을 살폈다.
소파 너머 문이 보였다. 저기로 나가면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어, 일어났니?”
갑자기 고스로리 차림의 여자가 아는 체를 했다.
희수는 얼른 문을 걸어잠갔다. 밖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잠그면 네가 못 나오지.”
또각또각.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희수는 문에서 얼른 물러났다.
“네가 문을 잠가도 난 들어갈 수 있고.”
별안간 검은 안개가 문틈으로 스며들어왔다. 안개가 순식간에 여자의 모습을 갖췄다.
그녀가 양손을 우스꽝스럽게 펼쳤다.
“짜잔, 난 실크라고 해.”
“뭐… 뭐뭐…….”
그녀가 씨익 웃었다.
“그래, 언니는 사람이 아니야. 뱀파이어야.”
“뱀파이어라면… 그 피를 빠는 그거…요?”
“응,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게이트에서 이탈해 현대 사회에 스며든 괴물.
도시 전설에서는 길드 블랙벤더의 길드장 섀도우 로드가 끊임없이 괴물들을 소환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 여자… 아니, 저 방의 다른 괴물들도 그런 괴물들이 아닐까.
하지만…….
희수는 주먹을 움켜쥐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우리 오빠는 헌터에요. 엄청 강하거든요? 죽고 싶지 않으면 그쪽이야말로 저 풀어주는 게 좋을걸요?”
오빠가 약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럼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 뱀파이어들은 오빠가 약하다는 사실을 모를 거야.
희수의 실낱같은 희망을, 실크의 웃음이 깨트렸다.
“아하하하핫! 너 정말 귀엽구나? 그래, 네 오빠… C급 헌터 김남우 말이지?”
검은 실크로 된 장갑으로 보랏빛 입술을 가리고, 그녀가 킥킥 요염하고 섬뜩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그래… 병원에 있잖니, 네 오빠? 거기는 헌터 협회 소속 헌터들이 지키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지.”
협회의 헌터들이 대거로 지키는 병원을 털어버리면 그건 곧 협회와 국가에 대한 도전!
여자아이 하나를 납치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래서 널 대신 납치한 거야. 후후… 알겠니? 네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희수에게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무도 널 찾지 못해. 넌 여기서 못 나가.”
쐐기를 박듯 실크가 말했다.
“넌 여기서 죽는 거란다.”
콰쾅!
그때, 별안간 천장을 뚫고 한 남자가 희수와 실크 사이에 착지했다.
새카만 머리 사이로 붉은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오. 딱 왔네.”
실크는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 몇 번이나 사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환이 감시하고 있었을 텐데……?’
어쨌든 왔다면 할 일은 하나다.
그녀는 지체할 것 없이 외쳤다.
“놈이다!”
문을 열고 두 사중주가 들어왔다. 그들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살기를 불태웠다.
“죽여!”
인질로 삼으려고 했던 희수가 말려들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실크의 소매에서 수십 마리의 박쥐떼가 튀어나와 이현에게 달려들었다.
[블랙 퍼레이드]
―식인 박쥐를 소환해 대상을 공격합니다. 박쥐의 마릿수는 지능에, 공격력은 힘 스테이터스에 영향을 받습니다.
―설명 : 이 스킬을 배트맨이 좋아합니다.
바로 옆에서 두 뱀파이어가 각각 스킬을 발동했다.
[블러드 바인드]
―혈액으로 강력한 밧줄을 만들어 적을 속박합니다. 강도는 지능 스테이터스에 비례합니다.
―설명 : 고지혈증에 걸리면 강해질지도?
[본 스피어]
―뼈로 된 창을 소환해 정면으로 투사합니다. 지능 스테이터스에 비례해 소환 개수가 늘어납니다.
―설명 : 사용할 때마다 누군가의 뼈가 줄어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현의 몸을 끈적한 붉은 끈이 옭아맸다.
팔에 힘을 줘 끈을 끊은 이현이 바닥에 한쪽 발끝을 박았다.
“꺼져.”
이현이 발을 앞으로 걷어찼다.
쿠아앙!
실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별안간 앞에 나타난 거대한 벽이었다.
“으헥?!”
강력한 충격이 그녀를 포함한 사중주를 덮쳤다.
성이 폭발했다. 산산조각 난 파편이 밤하늘을 회백색 파도로 덮었다.
콰르르르…….
희수가 감았던 눈을 뜨자 휘영청 뜬 달이 눈에 들어왔다.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서 끼릭끼릭 불안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현이 찬 곳을 기준으로, 성의 일부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뱀파이어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꿈인가?’
뒤를 돌아보면 멀쩡한 방이 있다.
꿈은 아니다. 꿈은 아니기는 한데…….
‘이게 말이 돼?’
희수는 파리가 들어가도 모를 만큼 입을 벌리고 멍하니 이현을 바라봤다.
오빠인 남우만 해도 냉장고를 번쩍 들었다 놓는 괴력을 선보였었기에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게 됐다고 자부했는데…….
이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수준!
같은 호모 사피엔스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괜찮아?”
이현의 물음에 희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현은 그녀를 위아래로 살폈다.
“…다쳤어?”
“예? 아, 아뇨! 괜찮은데…….”
따르르릉… 따르르릉…….
그때, 벽에 붙은 전화기가 울렸다. 이현은 뚜벅뚜벅 다가가 전화기를 들었다.
안에서 프랑스어가 어울릴 법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 부하들을 전부 죽이다니 훌륭하군. 대단한 힘이야. 어때? 힘쓰느라 배고플 텐데 식사나 들지 않겠나?
“그러던가.”
이현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상대가 완벽하게 함정을 팠다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다면 오히려 편하다.
그냥 가서 족치면 되니까.
―위층으로 올라오게.
뚝.
전화가 끊겼다. 이현은 희수를 내려다봤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희수가 얼른 그의 옷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럼 꽉 붙들어라.”
이현은 희수의 허리를 안았다.
‘헉! 설마 공주님 안기?’
라고 생각했는데.
짐짝처럼 옆구리에 꼈다. 희수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래 봬도 명색이 아이돌인데…….
“머리 조심해라.”
이현이 훅 날아올랐다. 단숨에 위층으로 올라온 그가 다시 희수를 내려놓았다.
복도를 지나 문을 열자, 커다란 식당이 나타났다.
중앙에 놓인 긴 식탁의 끝에 블라디미르가 앉아 있었다.
정장을 입고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한 손에는 와인을 들었다. 옆자리에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한나가 앉았다.
“앉지.”
이현은 말없이 앉았다. 그의 앞에 스테이크와 와인이 놓였다.
희수가 이현의 등받이 뒤에 쪼그려 앉아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블라디미르가 빛나는 눈으로 그를 살폈다.
“난 삼합회의 간부이자 뱀파이어 로드인 블라디미르라고 한다.”
“그래? 난 애아빠인 이현이다.”
이현의 얼굴은 진지했다. 블라디미르는 잠깐 흔들린 정신을 붙잡고 말했다.
“소녀를 납치한 것은 사과하지. 자네가 내 성을 박살 내고 부하들을 죽인 걸로 쌤쌤하지 않겠나?”
이현이 팔짱을 끼고 묵묵히 그를 바라봤다. 블라디미르가 말을 이었다.
“동의해준다면 제안할 것이 있네. 나와 동업할 생각은 없나?”
“동업?”
블라디미르가 각진 턱을 우아하게 끄덕였다.
원래 이런 제안을 꺼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직접 본 이현은 생각보다 훨씬 강자였다.
그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블라디미르는 전투광이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
굳이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다.
아니, 인생에 있어 싸움 따위 없는 편이 훨씬 좋다!
“그래, 수익은 7:3… 아니, 자네라면 6:4도 좋네. 어지간한 S급 헌터보다 많이 벌면서 위험은 전혀 없지. 물론 앞으로 자네의 주위 사람들에게는 손대지 않겠네.”
블라디미르의 손에서 와인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현의 눈에 한순간 빛이 스쳤다.
그것은 와인이 아니었다.
붉은 피. 산 자의 생명이 그의 손에서 돌고 있었다.
귀를 후빈 이현이 손가락을 후, 불었다.
“늑대가 양이랑 사이좋게 지낸다고 하면 믿겠냐?”
“…하긴, 그렇군.”
블라디미르는 단숨에 피를 들이켰다. 그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피의 탐욕]
―흡혈한 대상이 지닌 스테이터스의 10%만큼 스테이터스가 상승한다. 또한 하루 동안 대상의 스킬 하나를 복사해 사용할 수 있다. 한 번에 하나의 대상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 뱀파이어와 악마에게는 사용할 수 없다.
―설명 :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혈액을 구하세요.
지금 그가 들이킨 피는 S급 헌터 예슬의 피…….
이현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온 힘을 다해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놈… 아무리 강해보았자 네놈은 인간. 필멸의 생명이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맛 보아라……!”
“상관없는데…….”
이현의 신형이 훅, 사라졌다가 블라디미르의 앞에 나타났다. 그의 주먹이 블라디미르의 복부를 가격했다.
“밖에서 하자.”
퍼억!
“크아악!”
블라디미르의 몸이 성벽을 뚫고 사라졌다.
“헉! 여보!”
비명을 지른 한나가 블라디미르가 사라진 자리로 뛰어갔다.
이현은 희수를 돌아봤다.
“그 스테이크 먹지 마. 내가 이따 더 좋은 거 사줄게.”
성 밖으로 나온 이현은 기척을 느끼고 하늘을 바라봤다.
둥근 만월에, 박쥐와 같은 형태가 둥실 떠올라 있었다.
만월의 힘이 재생력을 강화시켜, 방금 맞은 상처는 생채기조차 남지 않았다.
블라디미르가 한 손을 들었다. 달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아니… 달뿐만이 아니었다. 구름이… 밤이… 세상이 점차 붉어졌다.
[각성 : 피의 크리스마스]
―체력과 마력을 소비해 차원을 나누는 결계를 설치합니다. 시전자는 모든 스테이터스와 모든 내성이 30% 증가합니다.
결계 내에서 시전자가 허용하지 않은 모든 생명체는 지속적으로 체력과 마력이 고갈됩니다.
고갈된 양의 절반만큼, 시전자는 체력과 마력을 회복합니다.
지속 시간은 지능 스테이터스에 비례합니다.
―설명 : 내가 바로 신세계의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