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한 초월자는 딸바보-23화 (23/150)

23화. 납치

핸드폰이 울렸다.

연습실 한쪽에 앉아 쉬고 있던 희수는 깜짝 놀라 핸드폰을 들었다.

걸려 오는 전화에 ‘부고’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놀라는 것.

그녀의 오랜 버릇이었다.

화면에 선명하게 뜬 ‘남우’라는 글자에 희수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희수가 전화를 받았다.

“응, 오빠.”

―어, 희수야. 잘 있어?

희수는 앞을 보았다. 또래의 소녀 여럿이 스트레칭을 하며 떠드는 중이었다.

“나야 잘 있지. 오빠는?”

―나도 잘 있어.

“잘 있기는… 서지도 못하면서.”

헌터라는 위험한 일을 하면서 남우는 수도 없이 다쳤다.

하지만 괜찮냐는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괜찮아’.

참 바보스럽고 미련해서… 걱정만 시키는 오빠였다.

오빠가 의식불명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희수는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올 게 왔구나.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깨어나면 다시는 헌터 따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영웅이라고 불리는 오빠가 자랑스러웠다.

헌터들은 이익만을 좇고 주변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 그런 이미지를, 남우가 깨트린 것이다.

―희수야! 연습 열심히 해!

“응, 고마워.”

희수가 전화를 끊자 지켜보던 연습생들 둘이 다가왔다.

“혹시 전에 그 존잘 오빠야?”

연습실에서 ‘존잘 오빠’라고 하면 한 명을 지칭한다.

오빠의 친구, 이현.

한 달 전, 불시에 찾아온 이현이 소녀들의 마음에 일으킨 폭풍은 제법 거셌다.

강한 헌터라는 말에 더 매력적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못생겼다면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말투도 잘생기니 ‘시크하네’가 됐다.

“아냐. 우리 오빠.”

“아…….”

실망을 금치 못하는 친구들을 보며 희수는 혀를 쯧쯧 찼다.

불쌍하긴 한데… 어쩌겠어. 그렇게 태어난걸.

남매의 평가는 냉정한 법이었다.

“아, 말 나온 김에 영상통화 한번 걸어볼까?”

“진짜?”

“빨리 해 봐!”

네 소녀가 우르르 모였다.

희수는 으쓱한 기분으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잠시 후, 이현의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소녀들이 귀가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꺅!”

“진짜다! 진짜!”

전에도 입고 온 것 같은 검은 셔츠 차림에 부스스한 머리지만… 잘생겼다!

붉은 눈동자가 혼혈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요즘 보는 로맨스 판타지 속 남주 같기도 했다.

―뭐야? 뭔 일 있어?

이현의 물음에 희수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너무 다짜고짜 걸었다.

“어… 그게…….”

―아, 우리 빈이 보고 싶어서? 보여준다고 했었지.

갑자기 이현이 훗 웃었다.

듣고 보니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해서 희수는 엉겁결에 끄덕였다.

“예? 아, 예.”

―읏차.

잠깐 화면 밖으로 사라졌던 이현이 빈이를 안고 나타났다.

통통하고 하얀 볼에 이현과 똑같은 붉은 눈을 지닌 예쁜 아기다.

그런데…….

“어? 그 뿔은 뭐예요?”

―아… 코스프레.

태연한 대답에 희수는 당황했다.

‘이 야밤에?’

어디 맘카페 신종 문환가?

“어때? 우리 빈이 예쁘지?”

―예! 예뻐요!

소녀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코스프레라기에는 좀 지나치게 디테일한 뿔이 달렸지만… 빈이는 정말 예뻤다.

무슨 아이가 저리 콧대가 우뚝하고 속눈썹이 짙은지, 예쁜 아이 경연대회 같은 데 나가면 당당히 1등을 거머쥘 외모였다.

―훗.

이현이 흡족하게 웃었다. 빈이 칭찬은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아이돌들이 보기에는 어때? 우리 빈이… 아이돌이 될 상인가?

“네!”

“너무 예뻐요!”

“센터! 비주얼 센터!”

쏟아지는 칭찬에 이현의 입이 귀에 걸렸다.

어떻게 이렇게 착한 애들이 있을까.

‘남우 그 녀석이 가정교육을 아주 잘 시켰군.’

선함에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진리를 보여줌이, 바람직한 어른으로서의 태도가 아닐까.

이현의 눈이 빛났다.

―너희… 고기 좋아하니? 내가 고기 사줄까?

“와! 오빠 최고!”

“아. 저는 고기보다 떡볶이가 더 좋은데.”

애 딸린 유부남이어도 잘생기고 밥 사주면 오빠였다.

―오케이, 기분이다.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와아!”

소녀들의 함성이 핸드폰을 찢었다.

중소 기획사에 속한 그들은 다들 사는 수준이 비슷비슷했다.

그나마 C급 헌터를 오빠로 둔 희수가 조금이라도 나은 편.

고기든 떡볶이든 먹을 기회가 흔치 않았다.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였다.

―그래, 연습 언제 끝나?

“아, 저희 9시요!”

―그래, 그럼 그쯤에 데리러 갈게. 톡으로 주소 보내줘. 먹을 거 잘 생각해두고.

“네!”

전화가 끊긴 후, 세 소녀가 희수에게 미리 맞춘 것처럼 엄지를 내밀었다.

“여억시 우리 희리더!”

“하트캔디의 소녀 가장!”

“이럴 때만 리더 찾지?”

희수는 시계를 보았다.

현재 시간 저녁 8시 15분. 슬슬 정리하고 갈 준비를 하면 될 것 같았다.

“나 잠깐 탈의실 좀 다녀올게.”

허름한 탈의실에 들어간 희수가 캐비닛을 열었다.

가방을 챙기고 문을 닫은 순간, 탈의실 문 앞에 웬 그림자가 나타났다.

“엄마얏!”

화들짝 놀란 희수가 몸을 움츠리고 쳐다보았다.

시대착오적인 중절모를 쓰고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남자가 중절모를 들고 씩 웃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송곳니가 날카롭게 빛났다.

“아가씨. 조용히 따라오면 아프지 않을 거야.”

희수는 조용히 가방에 손을 넣었다.

“누구신데요?”

“물을 거 없고 조용히 따라오면 돼.”

크르릉.

인간 같지 않은 소리가 남자의 목에서 나왔다.

어쩌면 정말로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희수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런 세상이니까.

“…알겠어요. 갈게요.”

“오, 요즘 중딩 치고 말을 잘 듣는군.”

희수가 다가가자 남자가 슥 한쪽 팔을 벌렸다.

‘지금이다!’

희수는 재빨리 후추 스프레이를 꺼내 남자의 얼굴에 뿌렸다.

치익!

“끄악!”

남자가 얼굴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오빠가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아냐고 호들갑을 떨며 사줄 때는 걱정도 많다고 코웃음을 쳤는데…….

설마 이렇게 쓰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희수는 급히 몸을 돌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이현의 번호로 전화가 연결됐다.

―엉?

전화기 안에서 이현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마주 봤다.

고스로리 차림을 한 창백한 얼굴의 미녀였다.

“아…….”

희수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손에서 핸드폰이 툭 떨어졌다.

“이런 등신이… 중학생한테 스프레이 맞고 빌빌대? 네가 그러고도 사중주냐?”

그루밍하는 고양이처럼 얼굴을 쓸던 남자가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야! 진짜 따가워! 존나 따가워! 마늘 들었나 봐!”

“닥치고 빨리 가자. 주인님께서 이거 저녁으로 드실 수도 있잖아.”

불이 깜박이자 희수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크크크…….”

처마 밑에 매달린 박쥐가 음산하게 웃었다.

박쥐가 보는 것은 이현의 딸, 빈이였다.

유아용 보행기에 앉은 빈이가 보행기에 달린 색색의 스위치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뾰롱뾰롱. 삐롱삐롱.

‘녀석이 아인을 키우는 줄은 몰랐군. 주인님이 좋아하시겠어.’

블라미디르의 ‘보존 식품’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아인도 존재한다.

좋은 스킬을 지닌 생물일수록 고평가를 받지만, 저렇게 종 자체가 특별한 경우도 높이 평가했다.

‘놈이 아기를 꽤 아끼는 것 같으니… 저 아이를 데려가면 일석이조!’

본래 일성만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틈을 노려 아기도 데려가면 완벽할 듯했다.

운 좋게도 놈은 곧 집을 나갈 예정.

놈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일성과 아기를 납치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일 것이다.

“크크크…….”

“뭐가 그렇게 좋냐?”

“그야 계획이… 응?”

강환은 고개를 돌렸다. 이현이 바로 옆에 거꾸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힉?!”

도망치려고 날개를 펼친 순간, 이현의 손이 강환을 홱 낚아챘다.

“요놈.”

“끄, 끄앗! 이거 놔!”

무시무시한 악력이 몸을 옥좼다. 강환은 콱 손을 깨물었다.

캉!

“끄억!”

이빨이 징징 울렸다. 무슨 피부가 무쇠로 만든 것 같다! 무슨 이유에선지 변신도 풀 수가 없었다.

휙.

가볍게 땅에 바로 선 이현이 강환을 꽉 쥐고 쳐다봤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주시했다.

“우리 빈이를 왜 음흉하게 쳐다보고 있었을까?”

“그… 그냥.”

“그냥?”

“그냥, 귀여워서…요.”

“귀여워?”

이현이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지.”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헤헤…….”

강환이 비굴하게 웃었다.

이현이 씨익 마주 웃었다.

“근데 다 큰 어른이 아이를 귀엽다고 쫓아다니면, 로리콘이라고 부르기로 사회적 합의가 되지 않았나?”

육체적 죽음 이전에 명예의 죽음이 찾아왔다.

강환은 헉 숨을 들이켰다.

“자… 잠깐! 나… 날 죽이면 여자애도 죽는다!”

“이게 뭔 개소리를…….”

“희수라는 여자애! 납치했다!”

이현이 손에 쥐려던 힘을 멈췄다.

“뭐?”

강환이 박쥐의 얼굴로 야비하게 웃었다.

어차피 납치한 후 그에게 알릴 예정이었다. 조금 더 일찍 알릴 뿐이다.

“그… 그래, 김희수! C급 헌터 김남우의 여동생! 그 계집애를 우리가 납치했다! 날 죽이면 그 계집도 죽어!”

이현은 지그시 그를 노려보다가 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삣.

―여보세요?

희수가 아닌 다른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은 손에 쥔 강환을 노려보며 물었다.

“희수는?”

―예? 그게… 핸드폰이랑 짐만 두고 없어졌어요. 나간다는 말은 없었는데…….

뭔가 불길함을 느꼈는지 여자애의 목소리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현은 빙긋 웃었다.

“아, 그래? 내가 뭐 좀 사달라고 했더니 급하게 나갔나 보다. 걱정 마.”

―아… 그, 그래요?

“어어. 걱정 말고 기다려. 이따 같이 들어갈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뚝.

이현은 지그시 강환을 내려다보았다.

박쥐 얼굴이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크크크… 어쩔 테냐.”

“어쩌긴.”

이현이 손을 꽉 쥐었다.

“크악!”

빠직!

주르륵. 핏물이 손아귀에서 흘러내렸다.

“못 들었냐? 같이 돌아가야지.”

집으로 들어간 이현은 보행기에 앉아 있던 빈이를 안아 들었다.

“빈아, 아빠 잠깐 나갔다올 건데 혼자 잘 있을 수 있지?”

빈이가 방긋 웃고는 그의 입을 톡 건드렸다.

“말도 말라고?”

벌써 이런 고급스러운 표현을 쓸 수 있게 됐을 줄이야…….

이현은 내심 감동했다.

“우리 빈이, 씩씩하네.”

쪽 뽀뽀를 해준 후 아기 침대에 눕히자 빈이가 빤히 그를 보았다.

참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남우도 희수의 기저귀를 직접 갈아주었다고 했으니 그 감정이 남다르겠지.

이현은 시계를 보았다.

밥을 사주기로 약속한 9시까지는 고작 30분이 남았다.

붉은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좀 서두를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