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후일담
“으음…….”
남우는 눈을 떴다.
‘내가 왜 누워 있지?’
혼란이 찾아온 것도 잠시, 금방 기억이 되살아났다.
몸을 덮친 무시무시한 충격, 빨갛게 물든 시야, 이상하게 꺾인 팔.
고개를 들어 보니 팔에 붕대가 칭칭 감긴 채 침대에 묶여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팔뿐만이 아니다. 목도, 양쪽 다리와 허리에서도 갑갑함이 느껴졌다.
“크윽.”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온몸에서 묵직한 둔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살았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중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드르렁.”
움찔.
남우는 코를 고는 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에 남우는 눈이 동그래졌다.
이현이었다.
멍하니 보고 있는데 그가 눈을 떴다.
“어? 아, 깼냐?”
“형님도요.”
이현이 진지한 얼굴로 남우를 보았다.
“남우야, 놀라지 말고 잘 들어라.”
“예? 아, 네.”
벌써 긴장이 되며 숨이 가빠졌다.
“지금은 2,500년이야. 넌 중상을 입어서 냉동이 됐다가 기술이 발달한 수백 년 이후, 해동된 거다.”
“허억!”
충격에 남우가 눈을 부릅떴다.
그럼, 어머니는? 우리 희수는?
이현이 이마를 짚고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지구는 멸망해서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는 안드로이드가 모는 우주선을 타고 지금 이차원을 여행 중이지…….”
“…거, 거짓말.”
“응, 뻥이야.”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자 이현이 히죽 웃었다.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야, 이거 진짜로 속네?”
마왕이라고 불렸다는 말이 진짜였을지도 모르겠다. 남우는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눈물이 나오기 직전이었는데!
“너 입원한 지… 대충 한 달쯤 됐다. 짜식이 튼튼하질 못해서.”
‘한 달……!’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그런데 2,500년이 어쩌구 하는 말을 듣고 난 후라서인지 별로 놀랍지가 않았다.
‘혹시 노리신 건가?’
이현이 협탁에서 뭘 들어올렸다.
“아, 그렇지. 여기 바나나 사 왔다.”
“…감사합니다.”
“응? 아니, 자랑한 건데. 넌 못 먹어. 당분간 수액만 꽂고 있어야 할걸?”
그러더니 정말로 눈앞에서 얄밉게 바나나를 까먹기 시작했다.
남우는 이 인간이 왜 여기 있는지 슬슬 의문이 들었다.
바나나를 우물거리던 이현이 그 의문에 대답했다.
“네 어머니랑 여동생, 잘 있다.”
“예…? 그걸… 형님이 어떻게……?”
“어머니는 뭐 여전히 누워 계신데…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으셨다. 희수는 보컬 트레이닝에서 최근에 A급 됐다더라. 뭐라더라, 데뷔조? 아무튼 좋은 거라던데. 아, 이거 말하지 말랬나.”
“형님…….”
계속, 돌봐주고 계셨구나. 남우는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 좋은 분이시다.
“뭐… 깨어나면 네가 궁금해할 소식이니까. 아, 희수 없다고 서운해하지는 마라. 내가 주기적으로 사진 보내주고 있거든. 근데 네 여동생 번호, 내가 알고 있어도 되지?”
“물론입니다.”
오히려 안심이다. 이현에게 언제든 연락할 수 있다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겠지.
“그리고 말이야.”
“예.”
바나나 껍질을 보지도 않고 휙 던져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신기를 선보인 후, 이현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진짜… 듣고 놀라지 마라.”
“아… 네.”
이현의 눈이 광채를 품었다.
“빈이가 만세를 할 줄 알게 됐다.”
“…….”
이현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내가 양손을 들면서 만세, 했더니 그대로 따라 하더라니까? 대단하지 않냐?”
“아… 예.”
“그것뿐만이 아니야. 그저께는 책상을 짚고 혼자 일어나려고 하더라고. 실패했지만,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그렇지 않냐?”
“어, 그… 그러네요.”
이현은 한 달 동안 있었던 빈이의 성장 과정을 이가 갈릴 만큼 세심한 기억력으로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깨어나서 다행이다……!’
만약 한 달 더 늦게 깨어났다면 두 달 치를 듣게 되었을 테니까…….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한참 이야기하던 이현이 시계를 보더니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어느새 석양이 창가에 반쯤 걸쳐 있었다.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는 남우를 보지 않고 이현이 중얼거렸다.
“아직 반도 안 꺼냈는데…….”
“저… 저는 괜찮습니다! 얼른 빈이 보러 가시죠! 아무렴, 빈이가 더 중요하죠! 전 괜찮습니다!”
어쩐지 격렬한 남우의 반응에 이현이 오 하고 감동했다.
“역시, 너는 이해하는구나. 아버지에게는 딸이 전부지. 그래.”
고개를 주억거린 이현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아무튼 잘 있어라. 내일 또 올게.”
“아뇨! 바쁘신데 자꾸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빈이와 함께하는 형님의 시간을 빼앗을 수야 없죠!”
“너 이 녀석…….”
이현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남우! 넌 역시 좋은 녀석이다! 자주 올게!”
“아, 거 괜찮다니까요, 자꾸!”
이현이 나간 후, 남우는 천장을 보며 굳게 다짐했다.
‘재활… 열심히 하자!’
* * *
인간과 다른 긴 손톱이 천천히 옆으로 미끄러졌다.
투명한 격벽으로 이루어진 우리를 검지가 하나씩 가리켰다. 그때마다 우리 안에 갇힌 인간들이 움찔움찔 떨었다.
“어.느.것.을. 고.를.까.요. 알.아.맞.춰. 보.세.요?”
지목당한 중년 남성이 사색이 됐다. 블라디미르가 눈썹을 모았다.
“아, 오늘은 이거 아닌데.”
오늘은 딱히 특별한 날도 아니다. 그냥 냉장고에 보관한 혈액을 먹어도 된다.
평소에도 그런 것들을 먹어왔다.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나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라 자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려온 이유는… 책임을 돌리는 것은 아니지만, 한나가 마법의 문장을 꺼냈기 때문이다.
―점심? 난 아무거나 괜찮아.
신혼 초에는 정말 아무거나 괜찮다고 생각해서 늑대나 원숭이의 피를 가져갔다.
그랬더니 하루 내내 구박당했다.
―아니… 아무거나 괜찮다며…….
―그렇다고 정말 아무거나 가져와요?
아무거나…….
블라디미르는 그 단어가 정말 두려웠다.
그때 한 여성이 그를 불렀다.
“블라디미르! 나를 먹어!”
“응?”
이런 말을 할 계집은 하나뿐이다. 블라디미르는 한 우리 앞에 팔짱을 끼고 섰다.
치렁치렁하게 머리를 기른 미모의 여성이 하얀 원피스 차림으로 갇혀 있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팔다리가 전부 구속됐다.
S급 헌터, ‘성녀’ 임예슬.
2년 전, 그녀와 함께 A급 헌터 네 명이 그를 퇴치하겠다며 찾아왔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긴밀히 관계를 맺고 있던 협회의 간부에게서 그 소식은 물론 동선까지 전해 들은 뒤였다.
그럼에도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 것은 꽤 까다로웠지만…….
모두 블라디미르의 보존식량이 됐다.
‘아, 한 놈은 자살했지.’
블라디미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킬이 꽤 좋은 놈이었는데 아쉬웠다.
“아니, 넌 안 되지. 넌 특별 요리야. 아무 때나 막 먹으면 내가 아내한테 혼나요.”
그녀와 같은 헌터들은 단순히 맛 때문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의 탐욕]
―흡혈한 대상이 지닌 스테이터스의 10%만큼 스테이터스가 상승한다. 또한 하루 동안 대상의 스킬 하나를 복사해 사용할 수 있다. 한 번에 하나의 대상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 뱀파이어와 악마에게는 사용할 수 없다.
―설명 :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혈액을 구하세요.
예슬이 악을 썼다.
“이 괴물! 하나님께서 널 벌하실 거야!”
블라디미르는 짜증스럽게 귀를 후볐다.
원래 살던 대륙에서 듣던 말을 여기서도 들으니 PTSD가 발동할 지경이었다.
“어어,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해줄래? 안 닥치면 저기 애들 하나씩 죽인다?”
살기를 풍기며 말하자 금방 예슬이 조용해졌다.
기운이 없게 밥도 조금만 주고 마력을 차단하는 특별한 아티팩트까지 사용했는데도 팔팔하다.
역시 S급은 S급인 모양이었다.
‘이번에 S급 게이트를 공략한 먹필도사라는 놈도 갖고 싶은데…….’
하지만 힘들겠지.
S급 게이트의 보스였으면 아마 그 강함은 블라디미르와 비슷한 수준.
그걸 공략했다는 놈이면 상당히 까다로운 난적일 것이다. 게다가 협회로서도 소중한 인재.
리스크가 너무 컸다.
블라디미르는 세계정복 같은 크나큰 야심은 없었다. 그저 한나와 행복하게 살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한나가 원한다면 모를까,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는 없다.
그때 한나의 목소리가 위에서 울렸다.
“여보!”
블라디미르는 흠칫 놀랐다.
“어? 어! 왜?”
“전화 왔어요!”
“응? 아~ 그래?! 금방 갈게!”
기회다.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은근슬쩍 한나를 관찰하는 거다. 그러면 점심 메뉴에 대한 아이디어가 뭐라도 떠오르겠지.
블라디미르는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금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나가 그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막 씻고 나왔는지 수건 한 장만 걸친 몸은 날씬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저 희고 긴 목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행복해지는 광경이다.
“여기, 당신 부하래요.”
“직원이라니까.”
“그게 그거죠.”
블라디미르는 핸드폰을 받으며 한나의 볼에 쪽 키스했다.
배시시 웃는 한나를 보고 헤벌쭉 벌어진 입으로 그가 핸드폰에 물었다.
“뭐냐.”
―사장님. ‘영귀’가 실패했답니다.
뜻밖의 소식에 블라디미르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었다.
“뭐……?”
부하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식물인간이 되어서 병원에 있답니다. 그래서 연락이 없었다고…….
S급 게이트라는 혼란 때문에 늦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블라디미르는 먼 하늘을 보았다.
영귀가 누군가.
S급도 죽이는 중국 최고의 살수다. 당장 한 달 전에 고두철이라는 S급 헌터도 죽였다.
그놈이 한국의 S급 중에서는 사천왕의 최약체 같은 놈이었다지만… 그래도 S급이다.
그런데 고작 C… 아니, B급의 암살에 실패했다니?
“그놈, 역시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하지만 그런 점까지 고려해서 영귀를 보냈던 것인데…….
만약 영귀를 죽였다면 의뢰인인 자신의 존재도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복수하러 오겠지.
블라디미르의 시선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중인 한나에게로 향했다.
간신히 찾게 된 목가적이고 행복한 살육의 삶을 빼앗길 수는 없다. 도망칠 수도 없다.
그는 지구가 좋았다. 한나도 지구를 좋아했다.
어느 차원에서 또다시 이런 삶을 누릴 수 있겠는가.
최대한 빨리, 이현이라는 놈을 해치워야 한다.
“그놈… 이현이라는 놈의 신상을 전부 캐라. 어디 사는지, 주변에 누가 있는지, 친지와 친구 전부 알아내!”
“네!”
“그리고 다 찾으면 정리해서 내게 알려라.”
거친 목소리를 듣고 한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뱀파이어다운 청각으로 통화 내용도 본의 아니게 들은 후였다.
“괜찮아요?”
“그럼, 괜찮고말고.”
블라디미르는 씨익 넉살 좋게 웃고는 한나에게 키스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