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한 남자가 있어 (2)
치이익!
지방이 타며 육즙과 함께 기름이 불판 위로 흘러내렸다.
고소한 고기 냄새가 퍼졌다.
집게를 든 이현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됐다.”
상추에 마늘, 쌈장, 고추, 파채까지 알뜰하게 올려서 만두처럼 곱게 싼 이현이 입에 쌈을 집어넣었다.
우물우물. 꿀꺽.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켠 이현이 크, 하고 무릎을 쳤다.
“이거야!”
“…삽겹살 좋아하시나 보네요?”
“그렇다기보다는… 삼겹살과 소주의 조화랄까.”
다른 차원의 동물들은 영 이 맛이 안 나더란 말이지.
그게 소주가 없어서였던 것 같다.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취기라는 감각을 잊은 지 오래라 분위기를 즐기고 있던 이현과 달리, 남우는 소주 몇 잔에 눈이 풀렸다.
“…고만 먹지?”
“아닙니다. 딱 한 잔만 더하죠. 오늘은, 정말 기쁜 날입니다!”
남우가 또 소주를 쪼로록 따르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이젠 얼굴도 벌게졌다. 이현은 슬쩍 소주병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실은… 실은 말이죠.”
남우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다들 저를 실패자, 루저라고 하더군요.”
“…….”
이현은 손에서 잔을 굴렸다. 취해서 하는 넋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남우는 빈이 둥실둥실도 해주는 쓸모 있는 녀석이다.
조금은 들어줘야지.
“하지만 이제 C급 헌터가 되었습니다. 우리 희수… 제 여동생인데… 부끄럽지 않게, 돈도 가져다줄 수 있게 됐고요. 어머니 약값도 이제 벌 수 있겠죠.”
“어머니가 아픈가?”
예전이라면 이해 못 했을 감정이었지만, 빈이가 생긴 지금은 이해가 갔다.
빈이가 아픈데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면… 그 감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희귀병이십니다.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더군요.”
앓는 어머니를 돈이 없어서 치료도 못 해주는 아들이 뭐 잘났다고 이야기를 할까.
평소 꾹꾹 눌러 담고만 있던 이야기가 술기운에 떠밀려 나왔다.
“아티팩트에는… 온갖 병에 효과가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효과를 가진 치료 스킬을 가진 사람도 있고요. A급인 바리데기가 유명하죠.”
꽤 알아봤는지 술술 내뱉는다.
“음.”
술기운에 밀린 남우의 이마가 불판으로 곤두박질쳤다. 이현은 급히 그의 이마를 받쳤다.
“임마. 내 삼겹살.”
그나저나… 항상 헤실헤실 웃고 다니던 놈이 이런 고민이 있을 줄이야.
‘나중에 치료 아티팩트를 얻으면 하나 줘야겠어.’
짐꾼으로도 많이 부려 먹었고 앞으로도 빈이에게 둥실둥실을 해줄 녀석인데 그 정도는 생각해줘야겠지.
“근데 이 새끼, 지가 쏘겠다더니 기절했네.”
이현은 의식을 잃은 남우를 업고 택시를 탔다.
남우가 사는 곳도 일성의 집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달동네였다.
“왜 다 이런 데서 살아? 유행인가?”
딩동.
벨을 누르자 안에서 발랄한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나가요!”
커다란 눈에 예쁘장한 고양이상의 얼굴이 낡은 철문을 열고 불쑥 튀어나왔다. 희수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누구세요?”
희수가 그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뭐… 무슨 큐튜브 촬영 같은 거 아니죠?”
이현은 턱짓으로 어깨에 늘어진 남우를 가리켰다.
“여기, 네 오빠 아는 사람.”
몸으로 밀고 들어간 이현이 남우를 현관에 내려놓았다. 희수가 허리에 손을 얹고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아우, 술 냄새… 오빠 술 마셨어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인간이 왜 마셨대.”
이현에게서는 전혀 술 냄새도 안 나고 취기도 안 느껴지니, 억지로 먹인 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 술은 입에도 안 대는 오빠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만취해서 오니 이상했다.
안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우… 왔니?”
이현이 안쪽으로 시선을 보내니 비쩍 마른 중년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병마와 싸우느라 고생한 탓인지 본래 나이보다 이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아, 예, 어르신. 남우 친구인데 이 친구가 많이 취해서 데려왔습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밥이라도 먹고 가요.”
“먹고 왔습니다. 괜찮습니다.”
대강 인사를 한 이현이 밖으로 나왔다. 따라 나온 희수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 저기!”
“응?”
“혹시, 헌터세요?”
남우는 헌터고, 그런 남우를 아는 사람이라며 업고 데려왔으니 당연한 추측이었다. 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 뭐.”
희수가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오빠 좀 잘 부탁드릴게요.”
열린 현관 너머로 보이는 늘어진 몸을 흘끔 본 희수가 말했다.
“보다시피 칠칠맞고 허술해서 영 믿음이 안 가거든요. 그래도…….”
희수가 히죽 웃었다.
“저한테는 나름 소중한 오빠라서요.”
“좋은 가족이네.”
이런 가족이 깨지면 마음이 아프겠지. 빈이의 둥기둥기 머신이 없어지는 것도 곤란하다.
“걱정 마라. 네 오빠가 내 눈앞에서 다칠 일은 없을 거야.”
* * *
서울의 중심에 있는 로진 타워.
지상 120층, 지하 5층의 이 빌딩은 날이 밝은 날은 서울 어느 곳에서나 보일 만큼 장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공룡 기업 로진 그룹의 회장의 숙원 사업이었던 이 빌딩은 게이트 폭발 이후, 그룹이 망하며 약 1년간 무방비하게 방치되어 왔다.
그러다 거대 길드 흑룡단이 이를 매입, 지금은 흑룡단의 길드 건물로 쓰이는 실정이었다.
그 꼭대기에 자리한 200평의 펜트하우스에서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봉철이 그놈이 실패했다고?”
흑룡단의 길드장, S급 헌터 두철의 굵은 눈썹이 크게 꿈틀댔다.
항상 핏대가 선 각진 얼굴에서 두 눈이 이글거리며 아래를 오시했다.
커다란 창유리가 발밑에 깔린 야경을 비췄다. 별들의 위에 선 것 같았다.
“…알았다. 됐어.”
두철은 전화를 끊고 와인을 들이켰다.
“멍청한 놈…….”
봉철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조롱에 가까움은 알지만, 그래도 두철은 봉철을 아꼈다.
하나뿐인 혈육이니까.
하지만 봉철은 너무나도 무능력했다. 형인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수준.
무능이란 단순히 재능의 부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자 하는 의지, 열정의 부족!
길드가 전폭적인 지원을 들여 A급으로 만들어놓았건만, 그것이 제 능력이라고만 생각하고 뻗대며 수행을 게을리했다.
권력을 누릴 줄만 알지, 다스릴 줄은 몰라 길드원 누구도 봉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새로운 S급을 데려와 길드 내 입지를 올릴 기회였는데… 그 기회마저 놓쳐버리니 한심할 노릇이었다.
‘부길드장은 다른 놈을 앉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중국의 S급 헌터들이 국내를 장악하고자 노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 인재가 필요했다. 봉철을 계속 데리고 가는 것은 길드 전체에 위협이었다.
그때, 갑자기 형광등이 깜박이며 흔들렸다.
직. 지지직.
마력에 의한 현상!
두철은 급히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어디지?’
가운 하나만 걸친 몸이지만 상관없다.
게이트 폭발 당시에도 게이트에서 뛰어나온 오크를 맨몸에 소화기 하나로 육박전 끝에 쓰러트린 그였다.
S급 헌터로서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은 지금,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냐! 내가 S급 헌터 고두철인 건 알고 왔나!”
“그래, 네가 내 타겟이거든.”
지직. 지지직.
깜빡이는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런데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S급 헌터 고두철. 나이 37. 흑룡단의 길드장. 오후 9시부터 10시 사이에는 프라이빗한 타임을 가지느라 아무도 들이지 않지. 맞나?”
지금 시간은 9시 20분. 즉, 노리고 왔다는 뜻이었다.
두철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얼굴을 가린 변검. 호리호리한 몸은 붉은 옷으로 감쌌다. 허리에는 한 자루 장도를 찼다.
‘이 남자… 강하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전투 레벨이 전해지는 수준. 솜털까지 박힌 전투 경험이 위험을 경고했다.
변검이 휙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죽을 시간이다, 고두철.”
지직.
불이 깜빡인 순간, 남자의 몸이 사라졌다. 두철은 살기를 느끼고 급히 몸을 젖혔다. 은색의 장도가 번뜩이며 목을 스쳤다.
‘빠르다! 스피드는 확실히 S급 이상!’
하지만 전투는 스피드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두철의 주먹이 그림자를 포착해 빠르게 쏘아졌다.
휘리릭!
S급의 신체 능력으로 발사하는 신속의 잽!
단순한 견제기라고 보기에는 강렬한 충격파가 터지며 어둠을 갈랐다.
어둠 속에서 큭큭 여유로운 웃음이 흘렀다.
“빗나갔다. 하지만 칭찬해주지. 흔한 근육 돼지인 줄 알았는데.”
두철이 호전적으로 웃었다.
“이래 봬도 헌터가 되기 전부터 단련했다.”
두철의 주먹이 강철처럼 빛났다.
S급은 인류의 첨병이자 방패. 권력과 야망을 좇는 두철이지만, 헌터로서의 자부심 또한 있었다.
“음지에서 살금살금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에게 당할 것 같으냐!”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칼과 두철의 주먹이 수십 차례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캉! 카캉!
하지만 날아드는 공격을 튕겨내는 것뿐. 상대도 유효한 공격을 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젠장! 이대로는 불리하다! 그렇다면!’
두철의 양손이 바닥을 내리쳤다.
[운석 강타]
―땅을 내려쳐 근력 스테이터스에 비례한 반경과 파괴력을 지닌 충격파를 발생시킨다.
―설명 : 파.괴.한.다.
콰쾅!
로진 빌딩 전체가 흔들렸다. 다섯 층의 바닥이 운석이 떨어진 듯 줄줄이 내려앉았다. 폭발한 유리가 바깥으로 비처럼 쏟아졌다.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당황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웃?! 이 자식……!”
발판을 잃고 낙하하는 암살자를 향해 두철의 몸이 쇄도했다. 가면을 향해 주먹이 혜성처럼 날아들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
훅.
두철은 눈을 부릅떴다. 발판이 없는 허공. 완벽히 포착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안 됐군.”
그 순간 두철의 등을 검이 십자로 갈랐다.
“큭!”
피가 쏟아졌다. 살기를 느끼고 피해 깊게 베이지는 않았지만, 화끈거리는 통증이 신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아직 싸울 수 있다.’
암살자가 휙 물이 새는 파이프 위에 팔짱을 끼고 섰다. 주먹을 쥐는 두철을 암살자가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끝이다.”
“이 정도 상처쯤은… 컥!”
암흑이 두철의 눈앞에서 터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모른 채, 두철의 영혼이 육신을 떠났다.
[각성 : 크리티컬 히트]
―같은 부위를 두 번 상처 입히면 상대를 즉사시킵니다.
―설명 : 음식에는 발동하지 않습니다.
“S급이라고 해도 이 정돈가.”
암살자는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했다.
“그래. ‘영귀’다. 보수는 약속한 계좌로 입금해라.”
전화를 끊은 영귀가 핸드폰에 사진 하나를 띄웠다. CCTV에 찍힌 모델처럼 매끈한 남자의 얼굴.
“다음은 이놈인가. 번거롭게 얼굴을 바꾸다니… 각오해라.”
영귀의 몸이 그림자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