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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한 초월자는 딸바보-12화 (12/150)

12화. 환골탈태

빠직.

옆에서 들려온 소음에 이현은 ‘육아 3일 완성’ 책에서 눈을 떼고 홱 고개를 돌렸다.

아기침대에 누운 빈이의 손에 들린 힐링 공룡 인형이 무참히 부서져 있었다.

“뿌아!”

플라스틱 조각이 신기한지 쳐다보던 빈이가 인형을 입에 넣었다. 이현은 재빨리 빈이의 손에서 부서진 인형을 빼앗고 새 인형을 갖다줬다.

벌써 일곱 개째.

최고 오래 버틴 장난감이 드럼 놀이 세트였다.

“인형 하나가 두 시간꼴인가…….”

이현은 냉정하게 분석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했지만 이제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됐다.

아버지로서 성장했다는 것이겠지.

빈이는 아이답지 않은 괴력으로 인형 세계의 파괴자로 군림하는 중이었다.

벌써 자연스럽게 마력을 운용해서 어지간한 성인 남성만큼의 힘이 나왔다.

이대로라면 기껏 사온 열 개의 인형 주민이 모두 무참한 원자재 덩어리로 바뀌는 것도 시간문제.

좀 더 강력한 장난감이 필요했다.

하지만 빈이의 손아귀를 버티려면 평범한 장난감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티타늄이나 저 다른 차원의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것이면 좋겠는데…….

‘이런 일은 그놈이 잘 알지.’

이현은 남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남우. 중대한 문제 발생. 집에 와주길 바람.]

“골치 아프군.”

이현은 빈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 빈이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요즘 빈이는 부쩍 얼굴을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의 표정과 말에도 더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말도 좀 는 것 같고.

아이들은 하루하루 자란다더니…….

대견하다. 이현은 빙그레 웃으며 빈이를 쓰다듬었다.

루비 같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빠빠!”

“응, 빠빠야~”

“뺘~”

태어난 지 고작 한 달인데도 이렇게 엄청난 성장이라니!

우리 빈이는 역시 우주제일천재가 분명해!

이현은 수염 난 얼굴을 빈이에게 비볐다.

“뺘!”

빈이가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밀었다.

쿠궁.

이현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비… 빈이가 날 밀었어.’

거기다가 얼굴을 찌푸리기까지!

정신적 충격에 잠깐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혹시 실수가 아닐까. 뭔가 착각이었을 수도 있어.

이현은 다시 얼굴을 가져갔다.

“뺘!”

작은 손이 찰싹 그의 뺨을 때렸다.

* * *

남우는 게이트에 들어갈 준비를 마치고 이현의 집에 도착했다.

그가 중대한 문제라고 말할 만한 일이 무엇일까. 긴장으로 손끝이 덜덜 떨렸다.

“실례합니…….”

마당에 들어서던 남우는 흠칫 놀랐다.

마당의 그네에 이현이 세상을 잃은 얼굴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삐거덕거리는 그네 소리만 조용히 울리는데…….

뭔가… 하얗게 불태운 표정이었다.

저 이현이 저런 얼굴을 하다니!

혹시 멸망 등급 게이트의 징조라도 목격한 것일까?

남우는 꿀꺽 침을 삼키고 그에게 다가갔다.

“형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빈이가.”

끼익.

이현의 손에서 쇠사슬이 불길한 소리를 냈다.

“빈이가 내가 볼 부비는 걸 싫어한다.”

“…수염 때문 아닙니까? 아이들은 피부가 예민하니까요.”

이현이 벌떡 일어나 그의 어깨를 잡았다.

“너, 천재냐?”

아뇨, 형님이 바보 같은데요. 남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넌 어렸을 때부터 여동생을 손수 키웠다고 했지. 역시 육아 짬밥은 무시할 수 없군.”

이현은 슬슬 수염을 어루만졌다.

“근데 이게 없으면 좀… 남자로서 그렇지 않냐?”

황제로 있을 때는 수염이 있어야 좀 위엄이 산다며 모두 그에게 수염을 기르기를 간청했다. 막상 기르니 다들 멋있다고 추켜세웠다. 그래서 여태 괜찮은 줄 알았다.

지구에 와서도 사람들이 얼굴을 보면 흠칫 놀랄 만큼 카리스마가 있지 않았나.

생각해보면 아닌 놈들도 있었지만, 어느 차원이든 싸가지 없는 놈들은 있었으니까…….

남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미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없어도 충분히 멋있으실 거예요.”

“그래, 빈이가 싫어하니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이현은 즉시 화장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이현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빈이를 무릎에 태우고 둥실둥실을 해주고 있던 남우가 그를 바라봤다.

“어, 나오셨…….”

남우가 입을 떡 벌린 채 굳었다. 붉은 눈이 번뜩였다.

“뭐야. 남의 얼굴 보고 반응이 왜 그래?”

“아니… 그게…….”

잘생겼잖아?

솔직히 남우는 그의 수염 깎은 얼굴에 대해 별로 기대를 안 했다. 그 전이 워낙 엉망이기도 했고 딱히 패션에 관심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훤해진 얼굴을 보니 웬 모델처럼 말끔한 얼굴이 나왔다. 콧대도 높고 남자답게 선이 굵은, 차가운 인상.

솔직히 그전까지는 빈이가 딸인 것이 안 믿겼다. 아인과 인간 사이에서 아이가 나온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기적적인 확률로 딸이 맞더라도 모계의 피를 진하게 받았으리라 여겼는데…….

‘빈이가 아빠 닮은 게 맞을지도?’

“잘생기셔서 놀랐습니다.”

남우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이현이 무덤덤하게 콧잔등을 긁었다.

“그러냐.”

뭐 저렇게 이것저것 다 가진 사람도 있을까. 남우는 쓰게 웃었다.

“부럽군요.”

이현이 빈이를 안아 들며 말했다.

“뭘 부러울 것까지.

그때 빈이가 이현의 매끈해진 볼에 손을 올렸다.

챱.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더듬는다. 이현이 쳐다보자 빈이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뺘……?”

‘헉, 설마 아빤지 아닌지 헷갈리나?’

애가 못 알아보면 어쩌지. 괜히 수염을 잘라서 헷갈리게 만든 건 아닐까.

불길한 상상이 중학생 때 처음 여자 손 잡았을 때처럼 나래를 펼쳤다.

아빠가 아니라며 밀어내는 빈이… 부서진 행성을 배경으로 고독하고 쓸쓸한 걸음… 수염을 기르고 다시 돌아오자 이미 장성해 결혼한 빈이…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진 사이…….

심장이 무저갱으로 가라앉았다.

“뺘.”

빈이의 양손이 그의 볼을 척 짚었다. 빈이가 방긋 웃었다.

“뺘!”

이현의 눈이 뜨겁게 글썽거렸다.

“그… 그래! 아빠야!”

“뺘아~”

수염이 사라진 볼이 신기한 듯 빈이가 자꾸 볼을 쓰다듬었다. 그것이 이현에게는 마치 헤어지지 않겠다며 달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우리 천재 빈이라면 벌써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당연하지.

“빈아~”

이현은 감격에 겨워 빈이의 볼에 얼굴을 비볐다. 이번에는 빈이도 막지 않았다.

“수염 때문이 맞았군.”

엄지손가락을 세운 손이 척 남우를 향했다.

“그런데 형님, 중대한 문제라는 게 뭔가요?”

“응? 아.”

그 문제도 있었지, 참.

이현은 빈이를 둥기둥기해주며 말했다.

“실은 빈이가 장난감을 자꾸 부숴 먹어서 말이야.”

“아… 그 나이 때 애들은 원래 잘 부숴 먹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방에 가 봐.”

처참한 방의 몰골을 보고 온 남우가 공손히 말했다.

“좀 많이 부쉈기는 하네요.”

보통 아이들이라면 부술 수 없을 부위를 가볍게 박살 내놓은 것을 보면 빈이는 꽤 기운찬 것 같았다. 하긴 저 이현의 딸이다.

먹는 것도 성인만큼 먹으면 힘도 성인만큼 낸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좀 튼튼한 장난감 브랜드 알아?”

“독일 쪽 제품이 튼튼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배송에 시간이 좀 걸려서 구하기 어려우실 거예요.”

“흐음.”

독일이라. 갔다 올까. 달리면 금방 갔다 올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앞으로 힘이 더 강해질 수도 있으니, 어지간한 아티팩트만큼 단단하지 않고서야…….”

“아티팩트?”

이현의 눈이 번뜩였다.

“잠깐, 지금 아티팩트라고?”

“예? 아티팩트가 왜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현은 감탄했다. 아티팩트라면 다른 세상의 재질로 이루어진 물건.

당연히 더 단단하고 마력 내구성도 우수하다.

“아티팩트는 어디서 구하지? 게이트 말고.”

게이트를 돌아다니며 빈이에게 맞는 아티팩트를 얻으려고 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헌터 마켓이라고 있습니다. 주로 그곳에서 포션이나 아티팩트를 삽니다. 설치해드릴까요?”

“오, 부탁해.”

남우가 한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이현에게 돌려주었다. 헌터 마켓의 앱까지 켜놓았다.

“헌터증 찍고, 가입하시면 됩니다.”

“오케이.”

갑자기 이현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이놈의 공인인증서는 천 년… 아니, 5년이 지나도 변한 게 없네.”

“…….”

한참을 걸려서 가입에 성공한 이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판매 목록’에 들어갔다.

휘황찬란한 아티팩트들의 목록이 떠올랐다.

[살살이꽃]―2억 2천 800만 원

[악마 파쇄자]―3억 7,000만 원

숫자의 단위가 어째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남우야. 이거 맞냐?”

“보통 아티팩트라는 것들이 다 이렇습니다. 그래서 C급이나 D급 벌이로는 아티팩트는 꿈도 못 꾸는 게 현실이죠.”

남우는 앱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럼 B급이 돼야겠네.”

“예?”

“그렇지 않아도 승급 심사 보러 오라고 문자 왔거든.”

이현이 핸드폰을 보였다.

[C급 헌터 이현 씨. 축하드립니다. B급 승급 요건이 충족되셨습니다. 승급을 원하시면 가까운 헌터 협회로 와주세요.]

“무슨 인적성 검사니, 면접이니 귀찮을 것 같아서 안 가고 있었어.”

이현은 원래 돈에 욕심이 없었다. 여러 차원을 돌아다니다 보니 한 곳에서 많은 부를 가져봐야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차원에 공통되는 화폐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폐가 가질 수 있는 힘이란 결국 한 차원에 국한된다.

문자 그대로 차원을 넘는 힘을 지닌 지 오래인 이현에게 돈은 있으나 마나인 물건이었다.

지금까지는…….

하지만 이 지구는 자본주의 사회. 돈이 곧 힘이다. 힘은 풍요를 가져온다.

‘앞으로도 지구에 살려면 좀 더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어.’

빈이의 풍요를 위해서. 아버지의 손이 동그란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벌써… B급 심사 요청이 오셨다고요?”

남우는 경악했다. 그는 만년 D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포터들은 기여도를 입증하기 쉽지 않아 더욱 승급이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늦었다.

그런데 고작 한 달여 만에 B급 승급이라니! 이현의 대단함이 새삼 와닿았다.

그때, 부우웅, 또 핸드폰이 울렸다. 남우는 핸드폰을 보았다가 놀랐다.

[D급 헌터 남우 씨. 축하드립니다. C급 승급 요건이 충족되셨습니다. 승급을 원하시면 가까운 헌터 협회로 와주세요.]

“어엇?!”

“응? 왜 그래?”

“그, 그게.”

남우가 내민 핸드폰 화면을 보고 이현이 피식 웃었다.

“뭐야. 너도 됐네.”

“…형님 덕입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C급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현을 따라다니며 C급 게이트만 열 개도 넘게 클리어했다. 단둘이서 게이트에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

어지간하면 네다섯 명이서 나눠 받을 실적을 압축해서 받은 셈이다.

“마침 잘됐네. 같이 협회 가자. 혼자 가기 심심하니까.”

전에 가보니 의외로 기다리는 시간이 꽤 됐다. 얘기하고 밥 먹을 사람 한 명이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겠지.

“제… 제가… 면접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엄밀히 따지면 자신의 승급은 이현 덕이다. 면접에서 이 사실이 밝혀지면… 무능력한 D급 서포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응?”

이현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쳤다.

“얌마. 남자가 일단 부딪쳐봐야 알지.”

“그… 그럴까요?”

“그리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노력하면 되잖아. 할 수 있어.”

노력하면 된다. 할 수 있다. 그런 희망적인 말을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넌 안 돼’, ‘너 따위’라는 말만 들어왔는데…….

이현이 할 수 있다고 말해주니, 정말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남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그럼 일단 공부 좀 할게요!”

“그러던지. 어차피 시장 보러 가신 할아버지 돌아오시려면 시간 좀 걸릴 거야.”

남우의 어깨가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곧 점심시간이다. 눈앞에 차려질 산더미 같은 식사를 생각하자 두려움이 일었다.

“크흠, 저는 일단 집에 가서 공부하겠습니다.”

돌아가려는 그의 어깨를 이현이 덥석 붙들었다.

“앉아. 둘이라면 먹을 수 있다. 할 수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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