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위협의 전조
블라디미르의 하루는 잔잔히 울려 퍼지는 ‘FLY TO THE MOON’과 함께 시작됐다.
PM 8:30.
해가 빨리 지는 겨울이라 바깥은 완연한 어둠이었다.
눈을 뜨자 붉은 동공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사랑스러운 아내, 한나의 얼굴이었다.
은발에 희디흰 피부, 감긴 눈꺼풀 안의 동공은 떠나온 미르다스 대륙의 바다와 같은 은빛.
그녀와 함께 산 지도 어느덧 300년이 넘었다.
성기사단으로부터 쫓기다 우연히 만난 시골 처녀.
대가 없이 피를 주고 자신을 숨겨준 그녀에게 블라디미르는 사랑에 빠졌다.
그의 구애를 그녀가 받아주고, 기꺼이 뱀파이어로서의 삶의 허락하였을 때는 있지도 않은 심장이 뛰는 느낌이었다.
특히 지난 5년은 정말 바빴다.
갑작스러운 게이트 폭발.
휘말렸다가 정신을 차리니 처음 보는 세계.
함께 지구로 넘어온 그녀와 이 대저택을 마련하기까지 정말 힘들었지.
그 모든 우여곡절을 함께 감내해준 그녀에게 블라디미르는 이제 사랑 이상으로 존경을 느꼈다.
블라미디르는 새근새근 잠자는 한나의 동그란 이마에 키스했다.
쪽.
“으응…….”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한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흠… 흠흠~”
춤을 추듯 가벼운 걸음으로 주방으로 간 그는 곧장 냉장고를 열었다.
아내가 깨기 전에 식사를 준비해야지.
냉장고의 위 칸에는 붉은 액체가 가득 든 와인병이 가득 차 있었다. 라벨에는 날짜, 성별, 혈액형 등이 적혔다.
잠시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그가 아래 칸으로 손을 뻗었다.
반쯤 연 순간, 손이 우뚝 멈췄다.
‘아니지. 오늘은 만월이니… 특별한 걸 먹어볼까.’
그는 휘파람을 불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까지 가는 길은 은행의 금고처럼 보안문이 겹겹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문, 안구 스캔, 출입 카드.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없으면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다.
번거로웠지만 안에 든 내용물들을 생각하면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
삐빕!
안구를 스캔해 마지막 문의 보안을 해제한 순간,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으……!”
“으으…….”
“살려줘어……!”
블라디미르는 느긋이 난간에 서서 아래를 보았다.
창고처럼 보이는 넓고 하얀 공간에는 투명한 격벽으로 된 우리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우리 안에는 인간들이 팔다리가 묶인 채 초췌한 얼굴로 갇혔다.
저명한 배우, 아이돌, 성직자, 헌터…….
그와 한나가 5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모은 컬렉션들이었다.
“오늘은 산뜻하게 아이돌로 할까!”
나이, 혈액형, 성별, 지닌 마력… 피의 맛은 다양한 요소에 의해 달라졌다.
그래서 항상 맛 좋은 피를 한 번 섭취하면 한동안 맛보지 못하는 점이 무척 유감이었다.
그러나 이곳 게이트 너머, 지구에서는 다르다.
다양한 기술의 발전으로 신선한 식재료들을 손쉽게,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돈만 있으면 공권력에서도 안전했다.
그가 있던 대륙에서는 돈이 아무리 있어도 성기사단을 유혹할 순 없었다.
그들은 신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바탕으로 뱀파이어를 배척했다. 심지어 평범한 일반인들조차, 그가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면 겁부터 먹었다.
괜히 한나가 특별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곳의 인간들은 돈만 주면 권력자라는 자들도 굽신거리며 태연히 웃었다. 스스로 다른 인간을 제공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좋은 세상이야.”
한나와 이곳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
척척 내려간 그가 한 우리 앞에 섰다.
안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소녀가 그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고 있잖아.”
이런 말을 들으면 블라디미르는 가끔 억울했다.
일부러 죽이지 않고 살리는 것도 힘들다. 심지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삼시세끼 챙겨주고 목욕에 오락거리까지 완벽하게 제공해주느라 매일 들어가는 비용이 어마어마하다.
지금 이 안에 있는 소녀에게도 최신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음향기기에 신선한 채소를 매끼 제공했다.
그럼에도 6개월에 한 명꼴로 자살이나 자해를 하는 인원이 나와 골치였다.
약을 먹이자니 피 맛이 떨어지고.
뭔가 다른 수단을 강구할 때인 것 같다.
그의 눈이 붉게 빛났다.
[LV2 유혹]
―레벨이 낮은 상대를 매료해 명령을 따르게 만든다. 단, 대상의 능력을 뛰어넘는 명령은 시킬 수 없다.
―설명 : 넌 나의 노예. 넌 내게 빠져.
“아…….”
겁에 질려 있던 소녀의 동공이 흐릿하게 풀렸다.
블라디미르는 싱긋 웃고 문을 열었다.
“나와.”
“네.”
블라디미르는 소녀를 데리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한나는 아직 깨지 않았다.
‘잠꾸러기라니까.’
하지만 그런 모습도 귀엽단 말이지. 그는 큭큭 웃으며 소녀에게 손짓했다.
“손 내밀어.”
“네.”
블라디미르는 슥 칼을 들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뭐야?”
“사장님, 에밀리입니다. 급한 전화가 있어 왔습니다.”
에밀리는 알바천상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직접 구한 비서로 3개 국어에 능통한 능력자였다. 이 시간에 사소한 일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아…….”
블라디미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짓도 그만두고 은퇴해야 할까.
그저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는 문을 열고 에밀리가 내민 전화를 받았다. 짜증 때문에 목소리가 날카롭게 나갔다.
“뭐냐?”
―모기상사의 성락이라고 합니다! 저, 전화 드리게 되어 영광…….
“용건이나 말해.”
―아, 옙! 그게…….
말하라니까 뭐가 그렇게 걸리는지 성락이 우물거렸다. 블라디미르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말하라니까.”
―보스가 죽었습니다.
“뭐?”
―보스뿐만이 아닙니다. 웬 놈이 쳐들어와서 죄다 헤집고 가서, 조직원 거의 전부가 병신이 됐습니다.
“헌터냐?”
가장 먼저 떠오른 가정이었다. 감히 대항하는 조직은 직접 나서서 섬멸했다. 다른 조직이 감히 덤볐을 가능성은 없다.
―아닙니다. 처음 보는 놈이었습니다. 어디 소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CCTV에 얼굴이 찍히기는 했습니다만…….
“사진이랑 영상 보내.”
곧 핸드폰으로 사진이 왔다.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봉두난발에 난잡하게 기른 수염, 붉은 눈동자, 칼도 도끼도 방패도 없는 맨손.
“뭐야, 이 거지새끼는? 이런 놈이 필한을 죽였다고?”
다른 건 몰라도 필한의 강함만큼은 잘 안다. 그래서 그를 가장 큰 지부인 파주에 보스로 앉혀 두었던 것이다.
필한은 단순히 마력량만 따져보면 한나만큼 강했다.
그래봤자 인간이니 뱀파이어인 한나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얕볼 놈은 아니었는데…….
그는 전송된 영상을 재생했다. 붉은 눈이 크게 뜨였다.
“한 방에?”
압도적인 육체 능력으로 적을 때려눕히던 놈이다. 어떤 특별한 스킬에 당했다면 모를까, 육체 능력에서 완전히 압도당하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갑자기 골머리가 아프게 됐다.
파주 지부는 중요하다. 수익에 있어서는 무려 20%를 차지하는 큰 지부.
버릴 수는 없다. 지부가 털렸는데 가만히 있다간 얕잡아 보인다는 문제도 있다.
하지만 A급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필한을 잡은 놈을 어떻게 잡을까.
“일단 뭐 하는 놈인지부터 알아봐야겠군.”
블라디미르는 재빠르게 키패드를 눌렀다.
* * *
“하아아압……!”
진중한 기합 소리와 함께 가부좌를 튼 남우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각성 ― 신선의 가부좌]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30센티 위로 떠오른다. 최대 초속 50cm로 이동도 가능.
―설명 : 명상 및 호흡법 단련에 좋은 자세 같다.
쌀을 씻던 일성이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허허… 신기한 각성 스킬이군요.”
빈이에게 밥을 먹여주고 있던 이현도 그를 신기한 듯 보았다.
“그러게. 사람이 하늘을 나네.”
이번에는 남우가 신기한 듯이 이현을 보았다.
“하늘을 못 나십니까?”
“응? 나도 인간인데 어떻게 하늘을 나냐. 공기를 밟고 이동하는 건 되지만.”
“…그게 더 신기한데요?”
각성 스킬은 희소하지만, 그렇다고 다 좋지는 않다. 남우는 자신의 스킬이 그 좋은 증거라고 생각했다.
‘이걸 어따 쓰냐고.’
처음에는 설명 때문에 정말 명상이나 호흡법을 단련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죄다 허사.
신선의 가부좌는 전투에도, 평상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정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스킬이었다.
좀 더 전투 특화 능력이었으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요즘 남우는 이현, 일성과 파티를 맺고 게이트를 공략 중이었다. 오늘도 이현과 함께 게이트를 공략하고 왔다. 하지만 말이 공략이고 파티지 일성과 남우는 거의 짐꾼이었다.
몸은 편했고 수익도 늘었다. 그러나 마음은 불편했다. 이현의 능력에 기대기만 하는 것 같았다.
“따아.”
그때 빈이가 둥둥 뜬 남우에게 갑자기 양팔을 뻗었다. 이현은 충격을 받았다.
‘빈이가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안기려고 하다니!’
태어난 첫날부터 함께 지낸 일성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행동이었다.
둥둥 떠 있던 남우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을까요?”
“…큭, 빈이가 원하니 어쩔 수 없지.”
이현이 떨어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놓았다.
갑자기 황제였던 시절 군내부장관이었던 녹턴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크읏… 그 악마 새끼… 감히 내 딸을 요구하다니…….
―응? 아니, 네 딸이 메피스토 아들놈한테 먼저 반했잖아.
―그놈이 제 딸을 꼬드겼죠. 뭘 모르시네.
―눈앞에서 네 딸이 얼굴 끌어당겨서 뽀뽀하는 거 봤잖…….
―으아악! 으아아악!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으아아!
정색하고 부정하는 얼굴에 이 새끼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이제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남우가 빈이를 무릎에 앉히고 떠올랐다.
“자, 둥실둥실.”
남우가 가부좌를 튼 채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일부러 위아래로 살짝살짝 움직이기까지 했다.
빈이가 꺄르륵 웃었다. 등 뒤의 작은 날개가 파닥거렸다.
이현의 머릿속에서 띠링, 전구 하나가 켜졌다.
‘하늘을 날고 싶었구나!’
이현이 남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남우와 빈이가 동시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
이현은 빈이를 안고 집을 나갔다.
“아빠가 더 재미있게 해줄게.”
마당으로 나온 이현이 슬쩍 무릎을 굽혔다가 땅을 박찼다.
콰앙!
흙먼지가 원형으로 퍼지며 둘의 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쐐애액!
매섭게 울리는 바람 소리, 멀어지는 땅.
몸은 이현이 다른 위험이 끼치지 않도록 보호했지만, 순식간에 달라진 시청각적 자극이 빈이에게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자, 빈아. 어때, 아빠가 더…….”
품을 본 이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투명한 붉은색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으아아아앙!”
“헉! 비, 빈아!”
재빨리 내려왔지만 한번 터진 울음보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쩔쩔매며 빈이를 달래는 이현을 남우가 어처구니가 없어 바라봤다.
‘가끔 보면 평범한 사람 같단 말이지.’
그때 띠링, 핸드폰이 울렸다. 남우의 눈이 커졌다.
“형님! 이 근처에 A급 게이트가 열렸다는데요? 그런데 이례적으로 C, D급 헌터들도 모집 중입니다.”
원래 C급 이하의 헌터들은 A급 이상의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협회에서 모집 제한을 걸어놓는 것이다.
이번 게이트처럼 제한이 풀린 이유는 둘.
많은 인력이 필요할 만큼 위험하거나, 등급에 비해 안전하거나.
물론 후자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간신히 빈이를 진정시키고 의자에 앉힌 이현의 눈이 번뜩였다.
“뭐?”
소란이 일어나면 빈이가 또 울겠지. 이현은 심각한 얼굴로 일어났다.
“신속하게 해결해야겠군. 남우, 빈이한테 둥실둥실 좀 해주고 있어라.”
“예? 하지만 저 이제 집에 가야…….”
“돈 줄게. 클리어 보상 10%.”
남우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빈이를 앉혔다.
“빈아~ 우리 둥실둥실하자~”
“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