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권 25화
525화
빈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쪽은 자 신이었다.
애초에 정복왕이 대가를 치르게 된 것도 자신, 한서준이라는 인물 을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환한 미소를 지은 서준이 정복왕 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회포는 바깥에서 푸는 게 어떤
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인지 항시 여유로워보 였던 여인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아마도 한동안 정양을 취해야 하 는 만큼 곧장 축객령을 내리고 있 는 것이었다.
허나 서준은 성역을 떠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미안한데, 아직 나누고 싶은 대 화가 더 있거든.”
“ 대화?”
“괜찮다면 계약을 제안하고 싶거
든.”
여인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살기 를 흘려낸다.
우주의 제약을 넘겨받아 쇠약해 진 만큼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눈앞의 여인이 품고 있던 힘은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우습네.”
평온하기만 했던 성역이 일제히 준동하기 시작한다.
쿠구궁-!
동시에 여인의 몸이 이종족(異種 族)라 부를 수 있는 기이한 형태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육 신, 길게 뻗은 거대한 촉수, 영락없 는 고대 신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태껏 많은 고대의 존재, 신들을 상대해왔다.
하지만 역시나 눈앞의 존재는 그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한번 읊어 보거라. 만약 허튼수 작을 부리려 한다면 살아나갈 생각 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당장이라도 살갗이 베일 것 같은 존재의 날카로운 말투에도 서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우선 첫째, 위지강이라는 존재 에게서 빼앗은 차원을 되돌려 줬으 면 하는군.”
-치를 대가는?
“아직 두 번째가 남아있는데 너 무 성급하네.”
여유로워 보이는 서준의 표정에 코웃음을 친 존재가 다시 한번 입 을 열었다.
-어디 두 번째도 읊어 보거라.
“너희들이 맺은 맹약과 비슷해, 중립 지역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나,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걸로 하도록 하지.”
눈앞의 존재의 눈매가 가늘어진 다.
- 의외로군.
분명, 기억하기로 한서준은 싸움 을 위해 살아온 존재였다.
애초에 시간을 돌려낸 것도 강한 힘을 얻어 고대의 신들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헌데 갑작스레 화평을 건네 오고 있었다.
“그렇게 볼 거 없어, 그냥 마음 이 변한 거야.”
-인간이기에 변할 수 있던 것인 가, 재미있군.
전쟁, 싸움밖에 몰랐던 미련한 인간이 아니었다.
소중한 것들이 생겼다.
굳이 그들을 위험에 빠뜨려가며 전쟁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 대신......
말끝을 흐린 서준의 시선이 눈앞 의 존재를 응시한다.
“다른 얼굴로 더러운 술수를 부
리지 않는다는 조건도 추가하도록 하지.”
-이제 다시 묻지, 치를 대가는?
눈앞의 존재의 눈매가 초승달처 럼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더욱더 진한 살기를 흘려낸다.
두 가지 모두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번 빼앗아낸 차원을 돌려준다 는 것, 고대의 신들에게 유례가 없 는 일이었다.
고대 신들끼리 맺은 맹약에 다른 존재가 추가된다는 것도 마찬가지 였다.
당연하지만,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가 가벼울 리 만무했다.
“너를 위해 일해 주도록 하지.”
-거절한다면?
“나를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괜한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서준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 무공 만 습득한 게 아니었다.
우주, 세계 자체를 변화시킬 힘 을 얻어냈다.
띠링-!
[관리자 모드로 포스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관리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내 용 변경이 가능합니다.]
[※과도한 변경 시 우주의 제약 이 가해질 수도 있습니다]
성역에 일어나고 있는 푸른빛 균 열들에 눈앞의 존재의 눈매가 가늘 어진다.
-귀찮게 됐군, 아니 이걸 노린 건가?
성역 내부인 만큼 온전한 상태였
다면 감히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우주의 제약을 받고 있는 상태이기에 전쟁을 벌이게 된 다면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적이 한서준 한 명뿐이 아니었다.
한서준의 등 뒤, 조용히 힘을 끌 어올리고 있는 정복왕 또한 존재했 다.
-내 손으로 호랑이를 풀어 줘버 린 꼴이군.
“잔머리 굴리지 말고 어떻게 할 건지만 말해.”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는 상황이 었지만,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제안 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나 일을 해줄 거지?
“한 100년 정도면 되려나?”
_흐음…….
눈앞의 존재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그냥 나와 함께하는 건 어떤 가?
“무슨 뜻이지?”
-시치미 뗄 거 없네, 니오그타를
산 채로 데려올 것을 바랐을 때부 터 눈치채고 있었지 않은가.
서준은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저 연관되고 싶지 않아 외면을 했을 뿐이지, 어느 정도 눈치를 채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다시 한번 전쟁을 벌일 생 각이야?”
-고리타분한 것은 바꿔내야 하는 법이지.
당연하지만 서준은 제안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
전쟁을 하기 위해서 힘을 얻은 게 아니었다.
평화를 바라기 때문에 힘을 얻은 것이었다.
근데 지금 동맹을 맺어버리면 전 쟁의 업화에 지구 또한 휘말릴 수 있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만, 그런 변방에서 전쟁이 벌어질 일은 없을 걸세.
과거에도 그랬듯이, 우주의 중심 이자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두 고 접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변방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구에 이렇다 할 타격이 올 일은 결단코 없었다.
서준이 망설일 이유가 없어진다 는 것이었다.
“좋아, 계약 받아들일게.”
-훌륭한 선택일세.
계약을 체결하는 순간, 두 존재 의 육신에서 일어난 기운들이 서로 연결된다.
-맹약으로 이어질지니…….
눈앞의 존재의 말과 함께 무언가 가 심장을 휘감기 시작한다.
이것이 맹약의 제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뿌리칠 이유가 없 었다.
그저 겸허히 받아들인다.
체내로 파고든 기운이 심장 주변 을 감싸 안자 눈앞의 존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예상치 못하게 힘을 너무 낭비 해버렸군, 정말 쉬어야 하니 이만 물러가도록 하거라.
고개를 주억이는 존재의 촉수에서 기운이 쏘아진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뒤이어, 전과 같이 육신이 마치
물속을 배회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 에 휩싸이는 순간이었다.
[추후에 다시 찾도록 하지.]
귓전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함께 익숙한 세계, 지구가 눈앞에 모 즙을 드러냈다.
지구로 귀환한서준을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정복왕이었다.
“아......
전처럼 무뚝뚝하다거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웃음꽃이 활짝 핀, 생기가 느껴 지는 정복왕의 얼굴을 확인한서준 의 입에 자연스레 호선이 그려진다.
‘꿈이 아니었구나.’
정복왕을 구해냈고, 평화를 위한 고대 신과의 계약을 맺었다.
서준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리고 있을 때였다.
“돌아온 걸 축하해.”
“고마워.”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정복왕이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마. 내가 원해서 했 던 거니까.”
“그렇긴 하지만……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과거의 기억들이 점점 더 명확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명확하게 정복왕과의 기억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보자면 내가 반쯤은 강 요한 거라고 볼 수 있는 거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해서 한 거는 맞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거 없어, 만약 그래 도 미안하다면……. 소박하게 파티 나 열어 줘.”
“파티?”
“응, 파티.”
“나쁘지 않은데, 소박하게는 아 닌 것 같아.”
축하할 거리는 차고 넘치는 상황 이었다.
우선 정복왕을 옭아매고 있던 제 약을 떨쳐냈다.
더불어 그토록 바라던 진정한 평 화를 되찾아냈다.
원하는 것들을 모두 손에 넣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파티가 필요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고생 많 았지.’
모두들 진정 어린 평화를 쟁취해 내기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싸워왔
그렇기에 정복왕이 말한 파티라 는 것을 벌일 자격이 충분했다.
“기왕이면 아주 성대하게 하는 게 어때? 우리 둘만 고생을 한 게 아니잖아.”
“그렇긴 하네,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동료들과 지인들의 도움이 있 었으니까 말이야……
피식 웃은 정복왕이 고개를 주억 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위치는 어디가 좋을까?”
“으음……. 지구가 가장 좋지 않 을까?”
“확실히 그렇겠네.”
“자세한 날짜는 내가 모두에게 물어봐볼게.”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화일 수도 있었다.
허나 애초에서준이 목표로 하고 있던 삶은 바로 이러한 평범한 것 이었다.
물론,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이 라고는 볼 수 없었다.
서준은 리벨리온 연합의 의장으로서, 엄청난 유명 인사로서 막강 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는 돈도 엄청나게 많았다.
하지만 능력을 활용하여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분란을 만들어내며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평화롭고, 조용하게……
천천히 한 걸음씩 본래의 일상을 되찾아갈 것이다.
며칠 후, 모두들 이런 성대한 파 티를 바라고 있던 것인지, 소식을 접하기 무섭게 흔쾌히 수락을 하며 한걸음에 지구로 모여들었다.
물론, 며칠 전 큰 싸움이 있던 만큼 부상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한 이도 존재했다.
하나 생명에 지장이 있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부상만 회복하고 난다면 언제든 지 행복하게 웃는 얼굴로, 또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세상이 왔으니까.’
오늘을 끝으로 더 이상 전쟁이 벌어질 일은 없을 것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종전 축제, 가장 밝은 햇볕이 쏟 아지는 날, 모두가 바라던 그 순간 이 시작되었다.
짧은 서준의 연설을 끝으로, 파 티장에 모여 다들 기쁘게 웃고 떠 들며 즐거움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를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던 서준은 걸음을 옮기어, 한쪽 테이블 에 모여 있는 가족의 품으로 향한 다.
“고생 많았다.”
“우리 아들 정말 장하구나.”
“오빠라면 해낼 줄 알았어.”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네 오는 가 족들의 말만으로도 서준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흐른다.
고생에 비하자면 다소 보상이 좋 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서준의 생각은 달랐다.
‘이게 내가 그토록 바라던 평화 로운 삶.’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서준 의 꿈이었다.
때문에 평화로운 지구, 행복한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거면 됐어.’
비단 자신, 서준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웃고 있었고,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앞으로 여기 있는 모두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허황된 자신감이 아니었다.
앞으로 수만 년 동안은 안정적인 생활이 이어질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해냈네.’
웃음꽃이 계속해서 피어나고 있 는 세계를 보고 있자, 그간의 고생 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평범했던 학창 시절부터, 갑작스 러운 차원 이동, 돌아왔더니 완전 히 변해버린 지구,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고 말하면 긴 그 삶을 살아왔다.
다소 힘들고, 지칠 때가 있었지만 그 때문에 지금 이 행복한 삶을 쟁취해낼 수 있었다.
자연스레 가슴 한편에서 벅찬 희 열이 차오른다.
‘드디어 이뤄냈어……!’
꿈꿔 왔던 가족들과의 행복한 생 활을 누리게 되었다.
어느덧, 서준의 입가에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던 환한 미소가 흐르 고 있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