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권 8화
508화
고대 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공격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 적 없던 일에 자연스레 하스터의 미간이 찌 푸려졌다.
“운이 좋았을 뿐이야.”
“운 또한 실력이지요.”
“내가 처음부터 정식으로 했다면 이런 일 없었을 거라는 걸 알 텐 데‘?”
“그럼 처음부터 정식으로 하지 그러셨습니까? 크하하……!”
“……아니 내가 이딴 대화나 나 누러 온 게 아니지.”
고개를 내젓고 있는 하스터의 눈 매가 가늘어진다.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한겨울의 얼음장보다 더 차갑다.
허나 소행성들을 부숴낼 정도로 격렬한 전투 중에도 하스터는 카터 에게 살수를 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하스터가 아무 런 이유 없이 다른 종족들에게 우
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고대의 신들을 사냥하는 데 있어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뿐이다.
헌데 수호자인 카터가 죽게 된다 면 고대의 신들을 따르는 황제와 고대의 존재들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할 것이다.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평화파, 혼돈인들이 따르는 수 호자인 걸 감사하게 여기며 살아가 도록.”
“수호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덤 비지도 않았겠지요.”
“언제 봐도 영악한 놈이군, 이런 점 때문에 이런 비루한 힘으로 혼 돈의 세계를 수호할 수 있는 거겠 지.”
“칭찬, 감사합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뭔가 지는 듯 한 기분에 하스터의 눈살이 찌푸려 진다.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치우 고, 몇 가지 물으마.”
“아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해 대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어째서 나를 공 격한 거지? 우리 서로 제법 우호적 인 관계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정확하게는 모르겠군요. 그저 오랫동안 혼돈의 세계에서만 머물 다보니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해보 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변명 늘어놓지 마.”
“진짜입니다.”
“내가 우스워 보이나?”
“어찌 미천한 제가, 황색의 신이 라 추앙받는 분을 함부로 볼 수 있 겠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지금도 상당히 편하게 대하는 것 같은데.”
코웃음을 친 하스터가 고개를 내 젓는다.
“제대로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 고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두 번째이자 본론이라 할 수 있는 이 야기로 넘어가주마.”
“지금 저희의 사이보다 더 중요 한 본론이 따로 있으실 줄은 몰랐 군요.”
“혼돈제, 아니…… 고대 신이 된 한서준의 행방에 대해서 알고 있 지?”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는 거지 요?”
“거짓말도 적당히 해, 혼돈 내부 에서 기이한 존재감이 느껴졌고, 며칠 후에 갑자기 우주가 뒤흔들렸 는데 네가 모른다고?”
“전혀 몰랐군요. 아시겠지만 제 가 근래 휴가를 갔다 왔습니다.”
“카터, 네가 아무리 수호자라 할 지라도 선을 넘게 되면 자비를 베 풀어 줄 수 없어.”
“그러면 죽이십시오.”
“.하아.”
한숨을 푹 내쉰 하스터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한서준에게 뭘 기대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고대 신이 되어 힘을 거머쥔 이들은 모두 변했어, 자네 도 알고 있을 텐데?”
“모두 과거의 이야기지요.”
“역사는 되풀이되는 법이지, 너 도 이미 수없이 지켜봐왔잖아.”
“그렇긴 하죠…… 허나 한서준 님은 조금 다를 것 같더군요.”
“역시 너도 한서준이 고대 신이 된 거를 알고 있었네?”
“크흠......
헛기침을 내뱉은 카터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흐른다.
“저는 절대 말 못 하니까, 그냥 죽이십시오, 아니면 포기해주시거 나.”
“분명 지구를 거점으로 둔 신이 었어, 한 연합의 의장이기도 했지, 한데 돌아오자마자 곧장 어디로 사 라진 걸까?”
“저는 아무것도 말할 생각이 없 습니다.”
“쯧, 마지막 기회마저 제 발로 걷어차는군.”
혀를 찬 하스터의 촉수에서부터 회색빛 기운이 흘러나와 카터의 머 리를 향해 쏘아진다.
“조금 아플 거야, 그러니까 기회 를 주었을 때 잡았어야지.”
회색빛 기운이 카터의 뇌리를 파 고들며, 내부를 마구잡이로 휘젓기 시작한다.
그 끔찍하면서도 불쾌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카터의 눈 이 갑작스레 부릅- 떠진다.
“크아악-!”
뇌리를 강타하는 강렬한 고통에 카터가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 치 려했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 았다.
카터의 몸을 기운으로 억누르고 있는 하스터의 촉수들 때문이었다.
“진작 얌전히 말했으면 이런 꼴 도 보지 않았을 텐데, 어리석군.”
한차례 고개를 내저은 하스터는 두 눈을 감은 채로 카터의 기억들을 확인해나가기 시작했다.
정복왕의 사도, 한서연이 이끄는 리벨리온 연합의 참전, 고대의 힘 을 다루는 황제들의 입장에서도 좋 지 못한 소식이었다.
실제로도 연전연승을 거듭해오던 황제의 군단들이 전선에서 밀려나 며 연이은 패배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구원받았던 다른 차원들처럼 황제들을 모두 쫓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허나 전장의 상황은 급격하게 변 하기 시작했다.
황제들의 뒤에 숨어서 몸을 회복 하고 있던 고대의 존재, 고보게그 가 모습을 드러내며 전장의 판도를 단숨에 뒤집어놓았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대륙 전체가 혼들리는 강력한 지진을 일으켜내 는 괴물을 상대로 싸움을 벌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서연이 고보게그의 진격을 막아 서며, 병력들이 퇴각할 시간을 벌 어준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성공해내어, 리벨리온 연합이 입은
직접적인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 좋다고는 볼 수 없 는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서연이 적지 않은 부 상을 입게 되었고, 자연스레 연전 연패를 거듭하며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수인족의 수도, 듀로타 까지 전선이 밀려나게 되어버렸다.
리벨리온 연합의 주요 간부라 할 수 있는 이들도 현재의 상황을 그 리 좋게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본신으로 강림한, 고대의 존재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자면 아니 마 차원을 내어주고 물러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허나 물러날 수가 없었다.
“……우리가 물러나면 다음은 지 구야, 알고 있지?”
리벨리온 연합의 본부가 있는 지 구가 멸망한다?
각 차원을 침공 중이던 황제들에 게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다.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는 만큼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할 것이다.
자연스레 리벨리온 연합에 속한 모든 차원이 연이어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결판을 봐야 해.”
결의를 다지는 순간, 지평선 너 머에서 달려오는 고보게그를 따르 는 군단의 모습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끼에엑-!
기괴하고도 흉측한 소리에 성벽 위에서 있던 리벨리온 연합군, 김 도현의 입가에 자조 섞인 미소가 흐른다.
“죽기 딱 좋은 날씨구만……
“어차피 의장님이 살려주신 목숨 이었잖아……. 후회는 없다.”
죽마고우라 할 수 있는 하종선이 애써 담담한 척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떨리는 손과 발을 숨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겁먹었으면 뒤에 가 있어.”
“겁먹긴 누가 겁먹었다고, 너야 말로 무서우면 뒤에 처박혀 있어.”
어색한 방식으로 서로의 용기를 북돋아내고 있었지만, 이런 부단한 노력들이 애석해지는 데는 불과 10 초도 걸리지 않았다.
쾅-!
하늘을 날아온 고보게그의 군단 이 쏘아내는 회색빛 섬광들이 듀로 타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파괴해낸 다.
“막아라! 놈들을 격추시켜라!”
지휘관들의 고함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진다.
허나 이미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메꿀 수는 없었다.
키이이익-!
고보게그의 군단에서 가장 최약 체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지만, 혼돈인으로서 태어난 존재들인 만 큼 일반적인 병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들이 쏘아대는 회색빛 섬광들 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병사들이 쓸려나가고 있을 때였다.
서걱-!
회백색의 기운이 일어나며, 촉수 들이 하늘 높이 쏘아진다.
동시에 하늘에서 회색빛 섬광을 쏘아내던 고보게그 군단의 병사들 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고, 시체가 되어 바닥으로 추락한다.
“ 이건......?”
쏟아지던 공격들을 받아내고 있 던 김도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리벨리온 연합의 일원으로서 수 많은 전장에 참전을 해왔기에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저런 회백색의 기운, 촉수들을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리벨리온 연 합에 단 한 명뿐이었다.
“한서연 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서연의 신형이 하늘로 치솟는다.
“늦어서 죄송해요, 상대가 상대 인 만큼 상처를 확실하게 치료하고 와야 됐거든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기운이 퍼져
나가며 리벨리온 연합의 병사들이 모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믿음직한 얼굴 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에 리벨리온 병사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린다.
숫자만 채우는 어중간한 지원군 이 아니었다.
에우레시아, 휘노소프, 나라연천, 하데스. 각 차원의 수장 혹은 신이 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 듀로타 차 원에 당도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공격들을 쏟아
거침없이 달려들던 고보게그의 군단이 삽시간에 혼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영멸을 맞이한다.
“아……
리벨리온 연합군의 얼굴에 희망 이 비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흡사 산과 같은 거대한 육신을 가진 존재, 고보게그가 모습을 드 러낸다.
“고대의 존재.”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리벨리
온 연합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졌다.
“고보게그는 제가 맡겠습니다, 나머지 황제들과 병력들을 처리해 주세요.”
그를 바라보고 있는 서연의 눈빛 에는 강한 투쟁심이 어린다.
“염치 불구하지만 부탁드리겠습 니다.”
다른 이들의 동의를 기다리기라 도 했다는 듯, 서연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지며 고보게그를 향해 나아 가기 시작했다.
주요 전력이자 각 차원의 수장이 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 낸 만큼 리벨리온 연합의 기세가 크게 올랐다.
든든한 지원군이 도착한 만큼 비 록 적이 고대의 존재가 이끄는 군 단이라 할지라도 두려움을 느낄 필 요가 없었다.
실제로도 각자만의 방식으로 성
장을 해온 수장들이 보이는 위용은 가히 압도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던 고보게 그의 군단이 삽시간에 쓸려나갔고, 감당조차 할 수 없었던 황제들의 발이 묶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희망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서로의 사령관이자 최고 전력이 라 할 수 있는 고보게그와 서연의 힘 차이가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콰과광-!
고보게그와 서연이 격돌한 지 어 언 10분쯤.
서연이 쉴 새 없이 공격들을 쏟 아내고 있었지만 고보게그의 육신 에는 이렇다 할 상처가 하나도 보 이지 않았다.
‘진짜 괴물 같네……
괜히 고대의 존재가 파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어중간한 공허의 힘으로는 도저 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도 고보게그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생각했던 것에 비하여 너무나도 보잘것없구나.”
정복왕의 사도라고 하여 긴장하 고 있었는데, 실제로 마주해보니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더 이상의 판단은 무의미, 괜한 걱정에 전력을 가늠하며 싸울 필요 가 없었다.
“이만 죽여주도록 하지.”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