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권 4화
504화
천 대륙에 위치한 위지강의 성역 으로 되돌아온 카터와 위지강.
혼돈의 틈새를 유영하던 서준의 흔적들을 모두 회수해내고, 무사히 귀환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애석하게도 이후로 이렇다 할 성과를 볼 수는 없었다.
“반응이 전혀 없군.”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곳에 들어가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존
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말끝을 흐린 카터는 한숨을 내쉰 다.
허나 혼돈올 유영하고 있는 서준 의 존재감을 느끼는 게 처음부터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혼돈의 세 계를 지켜 온 만큼 혼돈의 위험함 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 상태로 마냥 기대하며 기다릴 수는 없었다.
“최후의 수단을 사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연스레 위지강이 고개를 젖힌 다.
“……최후의 수단?”
카터는 대답 대신 심장의 고리에 마나를 회전시킨다.
우우웅-!
공명음을 토해내고 있는 푸른빛 의 정체는 단순한 마나가 아니었다, 지금 카터가 뿜어내고 있는 힘은 근원이자 그의 존재 의의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터는 망설임 없이 계속 해서 힘을 끌어올려낸다.
“수호자의 힘, 제 전부입니다.”
오랜 시간 혼돈의 세계를 지켜 온 힘인 만큼, 드넓은 우주에 이름 을 널리 알린 거대한 존재감을 품 고 있었다.
카터는 그 수호자의 힘을 손에 쥔 채로 서준의 혼적의 앞에 선다.
아깝거나 아쉽지는 않다.
어차피 혼돈의 세계가 부서진다 면 아무런 의미 없는 힘이다.
더군다나 서준을 후계자로 삼고 넘겨주려 한 적도 있었다.
물론, 서준이 어떤 형태로 세상
에 모습을 드러낼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여태껏 지켜봐왔던 서준의 마음과 강인한 정신력을 믿는다.
긴장된 호흡이 짧게 흐른다.
“존재감을 키우기에는 오랜 역사 를 품고 있는 이 수호자의 힘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직접 시도해본 적이 없는 만큼 이마저도 확정적으로 성공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허나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니, 되게 만들 것입 니다.”
고개를 주억인 카터는 조심스레
손을 내뻗어 서준의 흔적들을 향해 수호자의 힘을 홀려보낸다.
우우우웅-!
푸른빛 수호자의 힘이 공명음을 토해낸다.
비록 흔적이라고는 하나 서준의 흔적은 거대한 혼돈을 품고 있는 만큼, 단숨에 회색빛 기운이 치솟 으며 카터가 흘려내는 수호자의 힘 을 휘감는다.
‘부디 내 도박이 성공을 했으면 좋겠군……
수호자의 힘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혼돈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카터의 육신마저도 탐내려 한다.
허나 카터는 이마저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맞서 싸우려는 마나를 물 리며 스스로를 혼돈에 바쳐낸다.
파지직-!
푸른빛과 회색빛이 뒤섞이며 세 계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위지강 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수호자의 힘을 내어주는 것 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혼 돈에 접촉하여 의식을 깨우려 하다 니.”
자칫하면 자신조차도 혼돈에 집 어삼켜질 수 있었다.
“정말 목숨을 걸었군.”
카터의 결단력에 감탄을 흘린 위 지강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런데 저 상태라면 살짝만 외 부의 충격을 받아도 그대로 혼돈에 삼켜지며 영멸해버릴 텐데……
위험하다는 것은 단순히 카터에 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카터를 집어삼키고 있는 서준 또 한 적지 않은 충격을 받게 될 것이 다.
현재 서준은 혼돈과 동화되어 그 자체가 된 상태였으니 말이다.
“일부러 내 앞에서 일을 벌였 군.”
위지강은 악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절대 선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저 제멋대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당장에는 손 을 잡고 있지만 언제든지 마음을 바꿔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 은 하나뿐인 제자의 신변과 관련 된 일이었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이렇게 된 이상 절대 방치할 수 없었다.
“카터, 네놈의 잔꾀에 어울려 주 도록 하지.”
헛웃음을 흘린 위지강은 호법을 자처하며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주 저앉는다.
직후, 곧장 일대에 기파를 퍼뜨 리며, 접근해오는 존재들을 경계한 다.
혼돈의 세계 속, 서준 시야에 푸 른빛 한 줄기가 닿는다.
아주 가느다란 한 줄기, 평소라 면 의식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로 희미한 빛살이었다.
허나, 회색빛뿐이었던 혼돈의 세 계를 유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서준은 그 빛에 호기심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저 빛은 뭐지?’
혼돈에 집어삼켜진 이후, 계속해
서 의식을 잃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대다수의 시간을 의식을 잃은 채로 보내고 있긴 했다.
허나 20대 초반 술에 취한 것마 냥, 의식이 암전되었다 돌아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서준이 보았던 것은 회색빛의 세계뿐이었다.
때문에서준은 조심스럽게 그 푸 른빛을 향해 다가갔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아,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제멋대로 찾아오는 암전은 또다
시 서준의 의식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허나 다행히도 이전처럼 무기력 하게 쓰러지지는 않았다.
아주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의 의 식을 지탱해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었다.
그렇게 안간힘을 써가며 거리를 좁혀내자 회색빛 세계에 비친, 푸 른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이 힘은.’
수호자, 카터의 힘이 틀림없었다.
다소 당황스럽긴 했지만 다시 한
번 흐릿해지려던 의식에 벼락이 치 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카터 님의 힘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 머 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허나 고민은 잠시뿐이었다.
오랜 세월 자신을 살려온 생존 본능, 감각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서준이 다시 한번 의식을 다잡는 순간, 희미하게 쏘아지던 푸른 빛 줄기가 존재감을 키워간다.
회색빛뿐인 세계가 빠르게 변화
를 맞이한다.
희미했던 빛줄기는 이제 거대한 섬광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 로 변하며 서준의 육신을 휘감는다.
동시에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 들었던 육신에 활력이 불어난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던 육신이 의 지를 받들기 시작한다.
허나 이 육신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푸른빛 섬광, 카터의 힘이 일대 를 보호해주고 있기에 안전한 것이 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이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다시 한번 혼돈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물론, 평생 이 섬광의 영역 안에서만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혼돈과 동화된다.’
이곳을 탈출하기 위한 선택지가 없었다.
당장 가진 힘으로는 일대에 퍼져 있는 혼돈을 제어해낼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
결단을 내린 서준은 손을 내뻗어 눈앞의 거대한 혼돈을 육신으로 받 아들인다.
시작은 손끝에서부터 였다.
육체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었지만 변화는 확실했다.
혼돈을 받아들인 육신은 어지간 한 주신들조차도 마음먹고 휘두른 일격을 대수롭지 않게 받을 만큼 단단해진다.
‘내 육신의 뼈와 근육이 혼돈으로써 새로이 빚어지고 있는 느 낌……
더 높은 경지, 새로운 힘을 얻어 가던 서준의 육신은 사실 인간이라 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진 상태였다.
허나 고대의 존재와 같은 괴물들
을 상대로는 베이고, 찢어지기를 반복하던 근육과 가죽이 이제는 정 말 무엇으로도 흠집을 낼 수 없을 만큼 견고해졌다.
혼돈의 힘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육신을 만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마치 혼돈으로써 한 생명체를 이루어가고 있는 느낌이야.’
당연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형태 로 만들어낸 만큼 지금의 육신이 가진 힘은 전과는 비교가 불가했다.
완벽하게 홉수하고, 동화된 만큼 혼돈이 육신을 적으로 생각하며 잡 아먹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 뒤를 따라, 자연스레 높게 쌓 아놨던 영혼의 격이 되돌아온다.
이미 수없이 많은 신화를 쌓아 놓은 영혼의 격은 단숨에 혼돈으로 빚어진 육신과 하나 되며 큰 소리 로 공명한다.
우우웅-!
서준은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났 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영혼의 격도 혼돈과 동화되고 있다.’
서준이 그간 쌓아올린 신화와 혼 돈의 육신이 서로 만나 처음에는 견제를 하듯 부딪치는가 싶더니 이
내 하나가 되어, 동화되기 시작했 다.
당연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혼돈의 육신과 일반적인 신화, 어우러지려야 어우러질 수가 없는 상반된 힘이다.
허나 그 괴리를 조율해주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결기다.
어떠한 형태로든 변할 수 있는 완벽의 힘은, 혼돈과 서준의 신화 가 섞이도록 도와주려 한다.
물론, 이런 무결기의 노력에도 영혼의 격과 육신은 여전히 엉망진 창으로 뒤섞인 상태였지만 서준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 어쩌면……
애초에 이렇게 제멋대로 뒤엉키 고 뒤섞인 힘이야말로 진정한 혼돈 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서준은 뒤엉킨 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순간, 푸른빛 섬광이 요동치 기 시작한다.
- 깨어나셨군요.
카터의 목소리가 세계에 울려 퍼 진다.
하지만 당장의 서준에게는 화답
해 줄 방법이 없었다.
그저 침묵했고, 집중했다.
‘카터 님께서 어렵사리 만들어 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완성된 육신, 그 안에 담긴 영혼 의 격,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지만 이 혼돈의 세계를 헤쳐 나가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
때문에서준은 과감히 빚어낸 육 신을 부숴낸다.
쾅-!
혼자만의 귓가에 들리는 폭음과 함께 서준은 영혼 자체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느꼈다.
‘커헙-r
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던 서준의 머릿속이 단숨에 백지장처럼 새하 얗게 변했다.
이처럼 끔찍한 고통은 난생처음 이었다.
무수히 많은 고행과 고난을 거쳐 오면서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잃기 직전, 다시 금 푸른빛이 서준의 의식을 빠르게 수복시켜주었다.
‘끄아아아—!’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비명을 내지른 서준은 다시 한번 육신을 빚어낸다.
허나 여전히 만족할 수 없기에, 과감히 다시 한번 육신을 부숴낸다.
꽝-!
끊임없는 반복.
부숴내고, 만들어내고를 계속해 서 반복한다.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나날이었다.
만약 쏘아지고 있는 푸른빛이 의 식을 지탱해주지 않았더라면, 얼마
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렇기에 찾아온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되었다.
몇 번이고 끔찍한 고통을 감내해 가며 육신을 빚어낸다.
애석하게도 적웅이란 것은 존재 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육신과 영혼의 격을 부 숴내는 고통은 항상 상상하는 것 이상의 고통을 주었다.
허나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버텨 낸다……:
수호자 카터.
혼돈의 세계를 지키는 그가 이렇 게 혼돈의 내부로 들어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바깥 세계 에 무언가 큰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아마 그 위기는 머지않아 지구를 뒤덮어 버릴 것이다.
지구에 남아있을 가족들을 생각 해서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모두를 지켜내야 해.’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잃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지독하지만 고통 따위에 져서 굴 복하여 다 놓아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서준은 안간힘을 다해서 버텨냈다.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의식을 놓지 않았다.
운 트세 캄블, 그녀의 광채를 집 어삼키려 할 때처럼 지독한 일념을 불태워낸다.
이 끔찍한 고행 길도 평생을 가 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어딘가에 끝이 있을 것인 만큼, 버틸 수 있었다.
서준이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치 영겁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가던 때 였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