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권 23화
498화
승리를 쟁취했다는 고양감이 전 신에 퍼져나간다.
허나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천천히 눈을 뜬 서준은 기묘한 사실들을 감지했다.
‘ 어?’
첫째는 정복왕의 성역에 있어야 할 자신의 위치가 변해 있다는 점 이었다.
‘ 여기는?’
익숙한 곳이다.
허나 직접 와본 적은 없었다.
서준은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있는 곳에 가득 차 있는 기운이 모 두 혼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광채를 집어삼켜냄으로써 캄블의 영혼을 흡수해냈다.
고대의 신이라 불렸던 존재를 영 멸시킨 것이다.
본래라면 서준은 엄청난 성장을 이뤄내며, 흡수한 힘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어야 했다.
분명 그리됐어야 했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를 않았다.
비단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일대에 퍼져 있는 혼돈을 거둬들 이려고 했지만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제어를 거부하며 거센 반항을 보 이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으며 그대로 계속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내 것이 아니라고?’
서준은 다소 담담하게 현재의 상 황을 정리해나갔다.
일대에 퍼져 있는 혼돈이 제어되 지 않는다.
그냥 혼돈을 방치해둔 채로 몸을 회복하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까?
물론, 혼돈은 그리 얌전한 힘이 아니었다.
일대를 배회하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혼돈들은 움직일 수 없는 서준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든다.
후웅-!
갑작스레 혼돈에 집어삼켜진 서준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이타콰가 영멸했다고?” 갑작스럽게 전해진 소식에 모르
디기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혼돈제에게 당했다더군.”
“이타콰 녀석, 제정신을 유지하 는 게 힘들어 보이긴 했었어.”
콧방귀를 뀐 모르디기안의 시선 이 그를 찾아온 검은 안개와 같은 형태인 니오그타를 직시했다.
“허겁지겁 처먹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다만 먹어치운 힘을 감 당하지 못한 건가.”
“보크루그도 혼돈제한테 당했지.”
“당할 만했지, 놈은 우리 중에 가장 약한 존재였으니까……
“수마나스도 혼돈제에게 죽었다.”
“위지강이 개입한 싸움이었잖아, 분명 제대로 싸우지 못했겠지, 신 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 었을 테니 말이야.”
“구차하게 변명들을 늘어놓아서 는 안 되지, 중요한 것은 모두 혼 돈제가 승리했다는 거지.”
니오그타의 말에 모르디기안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 지‘?”
“한낱 인간, 혼돈제에게 패배하 고 있지, 고대의 존재라 칭송받던 우리들은 이제 과거의 망령에 불과
하게 됐다는 거다.”
고대의 존재는 본래 우주를 공포 에 떨게 했던 파멸자들이었다.
모두 태초에 태어났으며 강력한 고대의 힘을 다루는 존재들이었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 말이었지만 그를 통해 취할 수 있 는 이득이 엄청났다.
“그 덕분에 우리가 동족들의 살 을 취하며 힘을 얻을 수 있는 상황 이지, 혹시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 는 감정이라도 든 건가?”
“그럴 리가 있을까.”
모르디기안은 고개를 저을 수밖
에 없었다.
니오그타는 모든 부정을 품은 존재이자 세상의 밝은 면을 창조하고 만든 업의 찌끄러기다.
고작 이런 일로 죄책감을 느낄 리가 만무했다.
아니, 죄책감이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갑자기 무슨 변덕이 일어나서 이런 말을 꺼내고 있는지 모르겠지 만 우리의 목표를 잊지 마라, 우린 동족들의 뼈와 살을 취하여, 강한 힘을 얻고 우리가 칭송하는 고대의 신이 되는 것이다.”
“단순한 변덕이라고 생각하는 거 냐? 고대의 존재인 우리가 고작 인 간 출신의 혼돈제에게 연이은 패배 를 맞이하고 있다는 게 그리 간단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 이제 와서 내전을 멈추고 서 혼돈제를 사냥하자는 말이냐!?”
모르디기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는다.
“혹여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 껄일 생각하지 마라, 난 절대로 그 럴 생각이 없으니까, 혼돈제를 사 냥하고 싶은 거라면 당장 이곳에서 꺼져라, 나는 남은 동족들을 사냥
하고 힘을 키워 신이 될 터이니.”
코웃음을 친 모르디기안이 등을 돌린다.
더 이상 이런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현재 모르디기안의 머릿속은 다 른 고대의 존재, 동족을 사냥하여 강한 힘을 얻을 생각만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멈춰라.”
한데 그런 모르디기안의 생각을 니오그타가 철저하게 무시하듯 답 한다.
“혹여나 미련이 남아서 제 발로
이곳을 떠나지 못하겠다면 내가 직 접 도와주도록 하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모르디기 안의 몸에서는 차가운 살기가 흘러 나온다.
분명 실재하지 않는 살기였지만,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며 살갗이 얼 어붙을 것 같은 한기가 느껴진다.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당장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모르디 기안이 보내는 최후의 경고이기 때 문이었다.
“나도 혼돈제의 사냥을 우선시할 생각은 없다, 그저 그놈이 날뜀으
로써 무너진 힘의 균형을 우리만 눈치챈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침묵을 지킨 채, 모르디기안은 가늘어진 눈매로 니오그타의 행동 을 주시한다.
“우리만 동족을 사냥하며 힘을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 내분을 느낀 다른 동족들도 서로를 사냥하고 강한 힘을 취해가고 있기 에 말해준 것뿐이다, 그리고 자네 가 알지 못하는 정보가 한 가지 존재하네.”
“ 뭐‘?”
“이그는 자네와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야, 영멸당했거든.”
“당했다고? 이그가 대체 누구에 게‘?”
“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주자면, 자네 또한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거 다.”
검은 안개 속, 길고 날카로운 촉 수가 쏘아져 나와 단숨에 모르디기 안의 머리를 향해 쏘아진다.
콰직-!
“역시 더럽고 부정한 것다운 행
동을 보이는군.”
갑작스레 쏘아진 니오그타의 촉 수에 머리가 꿰뚫렸지만, 모르디기 안은 영멸을 맞이하지 않는다.
꿰뚫린 살점을 아무렇지 않게 털 어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모든 구울들의 아비라고 칭송받 는 존재, 모르디기안이 가진 힘을 여과 없이 드러내자 니오그타를 둘 러싸고 있던, 평온한 검은 안개가 얼어붙기 시작한다.
갑작스레 퍼져 나온 한기가 니오 그타의 검은 안개를 완전히 얼려버 린다.
그 광경에 니오그타는 속으로 침 음을 흘렸다.
‘……과연 까다롭군.’
니오그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동 료를 모은 것이 아니었다.
동족들의 싸움에서 패배를 상정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고대의 존재 들 증 강력하거나 기이한 능력을 가진 이들만을 동료로 받았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큰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지금 앞에 있는 모르디기안은 강 력한 존재이기보다는 기이한 능력 을 가진 존재였으니 말이다.
하나 주샤콘을 비롯한 다른 고대 의 존재들을 섭취하여 얻은 힘은 모르디기안을 기이하면서도 강력한 존재로 바꿔냈다.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이면서 많 은 고대의 힘을 다뤄낸다.
실로 까다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더 늦기 전에 손을 써 둬야 한다.’
앞으로 더 많은 고대의 존재들을 사냥하고 힘을 흡수한다면 그때는 어찌 손쓸 방도가 없었다.
말은 안 했지만 니오그타를 비롯 한 이타콰, 이그 등은 느끼고 있었
다.
동족들을 사냥하고 힘을 취하다 보면, 모르디기안은 가장 먼저 고 대의 신이 될 것이다.
모르디기안의 상승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렇기에 항시 경계해왔다.
당장이야 표면상으로는 같은 팀 을 이루고 있다지만 언제 배신을 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당장만 하더라도 앞서 섭취한 이그보다도 2배 이상은 까다롭고 강력하군,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 지 않은 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조금만 더 모르디기안이 성장할 시간을 주었더라면 절대 승리를 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 다.’
니오그타는 검은 안개 속에서 본 신을 드러낸다.
쿠구구궁-!
부정의 덩어리가 본신으로 세계 에 강림하려 하자 주변의 대기 역 시 뒤바뀌었다.
모르디기안은 그 풍경을 여유롭 게 지켜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니오그 타의 본신이 강림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네놈의 더러운 부정을 삼킴으로 써 나라는 존재를 더욱더 완성시킬 수 있겠군.”
이윽고, 썩은 내를 풍기는 검은 구체와 수백 개의 촉수, 부정의 덩 어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네놈이 품은 구울들은 어떤 맛 일지 기대가 되는군.”
씩 웃은 니오그타의 촉수가 쏘아 지는 순간이었다.
얼어붙은 땅에서 치솟은 구울들
이 모르디기안의 주변을 호위하듯 이 자리를 지킨다.
쾅-!
터져 나온 굉음은 신호탄이 되었다.
땅에서 치솟은 구울들과 허공을 배회하는 촉수들이 달려들며, 충돌 하기 시작한다.
“무의미한 발악이다, 이미 죽은 존재들이다, 죽음을 선사할 수 있 을 리가 없지 않느냐.”
구울들을 바라보는 모르디기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역시 생각했던 것만큼 까다롭구
나.”
연신 촉수를 쏘아내던 니오그타 의 입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 러나온다.
눈앞의 구울들올 꿰뚫고, 부숴냈 지만 끊임없이 일어나며 촉수를 베 어내기 위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시할 수도 없었다.
모르디기안이 부리는 구울들 한 마리, 한 마리에는 고대의 힘이 담 겨 있었다.
‘……더욱더 탐이 나는군.’
저 구울들에 자신이 다루는 부정
을 더해낸다면?
완벽에 가까운 군단이 만들어질 것이다.
동시에 신이라 칭송받아도 부족 함이 없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고대의 신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욕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드시 취해주마.’
가장 더럽고 추악하게 태어났지 만, 고대의 신이 되어 칭송받으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사이, 구울들이 각자의 병장기
를 들이밀며 니오그타의 주변을 포 위한다.
당연한 결과였다.
죽음을 모르는 불사 군단의 진군 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촤르르륵-!
솟구친 촉수들이 마치 구체와 같 은 형태가 되어 고울들을 휘감아낸 다.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모 르디기안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구울을 삼킨 이후, 마구잡이로 움직이던 구체가 갑작스레 움직임 을 멈춘다.
다시 한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구울들은 모르디기안의 명령을 받 들지 못했다.
이미 죽음이 맞이했던 구울들이 또다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부정시키다니, 동족을 삼켜서 성장시킨 힘의 활용법인가, 니오그 타 네놈다운 방식이군.”
모르디기안이 코웃음을 흘린다.
구울들의 불사를 부정시켜버린 니오그타의 힘을 인지한 탓이다.
때문에 모르디기안은 무리해서 돌파를 하기보다는 물러나기를 택 했다.
‘저 공격에 적중당한다면 나도 위험하다.’
마찬가지로 존재를 부정당할 것 이다.
구울들처럼 허망하게 쓰러지지는 않겠지만 적지 않은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분명 위협적인 힘이었지만 모르 디기안이 니오그타를 비웃은 이유 는 간단했다.
위협적인 부정을 고작 방어에 활
용했기 때문이었다.
니오그타는 가진 부정을 공격으로 펼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말 이었다.
하면 문제될 거 없다.
‘소모전으로 끌고 간다면 절대 패배할 일 없겠군.’
차가운 대지에서 다시 한번 구울 들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한다.
병장기를 쥐어잡은 구울들이 걸 음을 옮기며 니오그타를 향해 쏘아 진다.
전과 같은 그림이 반복된다.
허나 니오그타의 촉수들은 점점 느려지고, 모르디기안의 구울들은 처음과 다를 바 없었다.
이윽고,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하 는 니오그타의 모습에 모르디기안 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르기 시작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