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권 18화
493화
서준이 캄블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는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던 공허의 힘을 보상으로 내걸었기 때 문이었다.
‘어느 정도의 공허를 줄지는 모 르지만, 힘을 얻어내기만 한다면 키워낼 수 있다.’
시스템을 이용한서준은 삽시간 에 공허를 증폭시킬 수 있었다.
‘하나하나 따지기에는 시간도 부 족했어.’
외부의 신이라 불리는 존재, 괴 물 같은 이들이 움직이려 하는 만 큼 철저한 대비가 필요했다.
‘한시가 급해.’
최대한 빠르게 공허의 힘을 취해 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게 좋 았다.
때문에 세세하게 따지지 않고 제 안을 받아들였다.
‘상황을 보면 지금 급한 건 내 쪽이니까.’
그리고 두 번째 이유, 고대의 존재를 사냥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 에 들었다.
‘어차피 처리해야 할 적이야.’
지금 척을 지고 있다는 이유 때 문만은 아니었다.
외부의 신들이 개입을 해오는 순 간, 고대의 존재들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서로 싸우느라 전장에 합류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때를 노려서 공격을 해온다면 최악의 상 황이 펼쳐질 것이다.
사전에 위험을 줄여둬서 나쁠 것
은 없었다.
‘여러모로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심지어 캄블이 문을 열어준 덕분 에 고대의 존재를 찾기 위해 애꿎 은 우주를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코질루 차원.’
처음 듣는 이름의, 하나 다행히 캄블이 열어준 문을 통해 도착한 코질루 차원은 과거,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법이 발달한 세계라는 것이었다.
높게 솟은 성채 주변에는 수십
겹의 결계가 둘러져 있었고, 드높 은 하늘을 떠다니는 부유섬도 있었다.
바다 위에 지어진 해양 섬과 인 위적인 안개로 가려진 의문의 성마 저 존재했다.
하나 그보다 더 눈에 뜨이는 것 은 백색의 신전의 모습이었다.
‘웬만한 성들보다 2배 이상은 거 대하고 웅장한 것 같은데……
얼핏 보기에는 흡사 신성 제국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다만 그곳에는 찬란한 광채나 성 스러운 빛은 존재치 않았다.
난폭하고 잔인한, 원초적이면서 도 부정적인 감정, 광기에 지배된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어떤 진취성이나 다른 목적으로 대련을 펼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서로의 눈을 파먹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끔찍한 참상이 일어나고 있는 세계의 중심,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웃으며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백색의 털을 뒤덮고, 뒤틀리고
공포스럽고 형언할 수 없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거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괴물이 고대의 존재.’
일대에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일 들도 모두 저 고대의 존재가 벌인 일이었다.
여유 부릴 시간도 없을뿐더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갈무리하고 있던 기운을 폭발시 켰다.
그 힘의 여파를 느낀 것인지, 상 황을 관망하기만 하던 고대의 존재
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직후 삽시간에 몰아친 바람이 고 대의 존재의 전신을 휘감았다.
“감히! 어떤 버러지가 이 몸, 이 타콰 님의 휴식올 방해하려는 거 냐!”
짐승의 포효처럼 날카로운 목소 리가 드높이 울려 퍼졌다.
후웅-!
몰아치기 시작한 바람은 날카로 운 칼날이 되어 서준이 서 있는 자 리를 바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난도질해버린다.
“누군가 했더니…… 아주 유명한
인간이었군.”
서준을 알아본 것인지, 거센 바 람을 두르고 있는 이타콰의 붉은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혼돈제, 한서준.”
굳이 대답을 할 필요는 없었다.
서준은 곧장 거리를 좁히고, 혼 돈기를 일으키며 주먹을 뻗어낸다.
퍼억-!
이타콰의 가슴팍에서 울려 퍼지 는 둔탁한 소리에서준의 눈이 휘 둥그레진다.
‘ 닿았다고?’
이타콰에게 느껴지는 힘은 사실 상 지금 서준의 이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대한 고대의 힘이 두 가지 느껴지고 있었다.
때문에 수준을 가늠해보기 위해 내지른 첫 공격이 이리 쉽게 적중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물론, 가벼운 공격이었던 만큼 큰 타격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감히-!”
잠시 미간을 찌푸린 이타과가 일 으킨 바람들이 흉포한 몬스터의 형 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와이번, 해룡, 드래곤. 이름만 들 어도 위협적인 몬스터들이 삽시간 에 군대가 되어 서준을 향해 이빨 을 들이민다.
어느덧 바람으로 빚어진 군대가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의미 없는 짓이야……
서준은 전신에 혼돈기를 감아내 고서 양 손바닥을 합장하듯이 맞부 딪친다.
짝-!
박수 소리와 함께 혼돈기의 폭발 이 시작된다.
콰과과광-!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단숨에 찢 겨지고, 삼켜지며 순식간에 영멸을 맞이한다.
직후 서준은 다시 한번 공격을 이어가기 위해 이타과의 형체를 찾 는다.
한데 보이지 않는다.
‘어디냐.’
분주히 눈동자를 굴려 보았지만 이타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기척을 감지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
다.
‘……도망쳤다고?’
헛웃음을 홀린 서준이 재빨리 혼 돈기를 퍼뜨리며 이타콰를 추적했 다.
‘다행히 멀리는 못 도망갔네.’
서준이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이 타콰를 바라보니, 문득 그의 몸에서 갈무리되지 못한 고대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붉은 광기, 제멋대로 일어나는 모래 폭풍, 불안한 듯이 떨고 있는 이타과.
서준의 입가로 헛웃음이 흘렀다.
“너, 설마.‘?”
“닥쳐라-!”
이타콰가 고함을 내지르자, 또다 시 바람이 몰아치더니, 몬스터들의 형상을 취해내며 서준에게로 달려 든다.
의미 없는 발악이다.
바람을 이용해 억지로 형태만 갖 춘 몬스터들로는 서준에게 상처조 차 입힐 수 없었다.
이런 힘의 차이를 고대의 존재인 이타콰가 모를까?
‘이런 이성적인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힘든 상황이 라는 거네.’
조소와 함께 일장을 내뻗자, 혼 돈기가 폭발하며 매서운 기세로 달 려들던 몬스터들의 형상이 다시 한 번 자취를 감춘다.
이전보다 더 간단하고 가벼운 폭 발.
때문에서준은 이타콰가 또다시 도주하기 전, 그의 앞길을 가로막 을 수 있었다.
자연스레 바람을 타고 이동하고 있던 이타콰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광기가 멋대로 폭발하는 게 몸
상태가 상당히 안 좋은가 봐?”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 른다.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생각했 는데, 본인의 힘조차 제대로 다루 지 못하고 있는 반푼이랑 다를 바 가 없었다.
“네놈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 나?”
“그렇긴 해.”
서준은 묵묵히 고개를 주억인다.
어찌 보자면, 이건 서준에게 둘 도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타콰는 엄청나게 약해져 있 어.’
허겁지겁 삼킨 광기를 제대로 소 화도 하지 못했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절호의 기회 까지는 아니었다.
그냥 억눌러두고 본래의 힘을 사 용하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솟구치려는 광기 의 힘뿐만이 아니었다.
‘전투를 치렀어.’
그것도 아주 과격한 싸움이었다.
실제로도 이타콰의 몸 곳곳에 전
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심하지 않 았지만, 저 정도 흔적이 남을 정도 면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을 것이 다.
엄청난 충격까지 받은 상태라는 말이었다.
때문에 세계에 광기를 뿌리고 흡 수하며 몸을 회복하고 있던 것이었다.
헌데 갑작스레 서준이라는 불청 객이 찾아와버렸다.
이타콰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그리고 서준에게는 최고의 상황이었다.
“생각처럼 그리 순순히 당해주지 는 않을 거다.”
결의마저 느껴지는 이타콰의 말 에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무슨 뜻이지?”
“보아하니 캄블의 부탁을 받아서 온 것 같은데, 내가 설사 이곳에서 네놈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얌전 히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 다.”
이타콰의 몸에서 진한 광기와 함께 북극의 한파보다 더 시린 차가
운 바람이 흘러나온다.
“나와 함께 이 세계도 영멸할 것 이다.”
“……지금 협박하는 거야?”
“의미 없는 개죽음을 맞이할 수 는 없지.”
서준은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일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해 보면 캄블은 이 세계, 사람들을 지 키려 하고 있었다.
이타콰를 죽인다 할지라도 이 세 계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어떤 꾸중 을 들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건넸던 제안 자체를 무효 로만들 수 있었다.
‘가능하면 꼬투리 잡히지 않게 확실하게 일 처리를 하고 싶은데.’
하나 이타콰의 의도대로 끌려다 녀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때문에서준은 계속해서 머릿속 에서 생각을 이어갔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서준을 이타 콰는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마침내, 서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고대의 존재가 구차한 협박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어지간히도 죽 기 싫은가 봐?”
이타콰는 대답하지 않고 서준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바꿔서 물어볼게,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지?”
“……네놈과의 싸움을 피하지는 않겠다만 지금은 아니다, 힘을 회 복한 후에 정식으로 겨루자. 어떠 냐‘?”
돌아온 대답에서준의 미간이 찌
푸려진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아니, 애초에 이타콰는 힘을 회 복하기 위해서 세계에 광기를 퍼뜨 리고 흡수할 것이다.
저 제안을 받아들이면 캄블에게 또다시 꼬투리를 잡힐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나 쉽사리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만 물러나라.”
“……잠시 생각할 시간을 좀 주 겠어?”
“오래는 주지 못한다.”
그렇게 10분여쯤의 시간이 흐른 후, 턱에 손을 괸 채로 고민을 하 던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덕분에 결 정을 내렸어.”
“어떻게 할 거지?”
“거절, 그냥 전장을 옮기면 그만 이잖아.”
“..‘?!”
일순간, 이타콰의 등 뒤에 혼돈 기가 폭사하며 은하의 통로를 열어
낸다.
“어림없다!”
이타콰가 발악하며 자리를 벗어 나려 했지만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서준은 곧장 이타콰를 향해 부둥 켜안은 채로, 열린 은하의 통로를 향해 몸을 내던진다.
“이미 늦었어.”
“놓아라! 놓으란 말이다!”
서준은 얼굴이 흉포하게 일그러 진 이타콰가 절규하듯이 쏟아내는 말을 무시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
파지직-!
서준의 손아귀에 잡혀 은하의 통 로에 끌려가는 것으로 이타콰가 사 라지자, 세계를 휘감고 있던 광기 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회색빛 황폐한 평야뿐인 혼돈의 세계,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 에 도착한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어때, 고향에 돌아온 소감이?”
여유로운 서준의 모습을 바라보 고 있던, 이타콰의 입가에도 웃음 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분명 경고했거늘, 스스로 재앙 을 초래하는구나.”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이타콰의 몸 주변에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억눌러두었던 광기도 폭발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자면 일전과 다를 바 없어 보일 수도 있었다.
허나 계속해서 이타콰를 응시하 고 있던 서준의 눈살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너, 설마……
광기가 폭발하듯이 솟구치며, 이 타콰의 전신을 집어삼킨다.
이윽고,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이타콰가 맹수와 같은 날카로운 울 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