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권 15화
490화
불필요한 시련을 치를 필요가 없 어진 만큼 서준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이스!’
허나 이런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눈앞에 떠오른 초록빛 홀로그램 창이 사라지는 순간, 대련장의 바 닥에서 사람의 신형을 한 붉은 형 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00m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붉은 형체의 시선은 오롯이 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시련의 과제.’
눈앞의 붉은 형체는 적이라는 것 이었다.
허나 거리를 함부로 좁힐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어 떤 능력을 다루는지 정보가 아예 없는 만큼 섣부른 공격은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서준은 연신 눈동자를 굴 리어 붉은 형체의 움직임을 주시해
낸다.
‘제법이네.’
수많은 싸움을 해왔기에 작은 움 직임과 눈빛과 은연중에 홀러나오 는 기운들 정도로 적의 강함을 어 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붉은 형체는 여태껏 싸워왔던 이들 중에서도 손 에 꼽을 정도의 강자였다.
우선 보유한 혼돈구의 숫자도 자 그마치 일곱 개, 허나 단순히 힘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틈이 없었다.
잘 벼린 칼날과 같은 기세를 뿜
어내며 압박을 가해왔다.
‘놈도 무극의 경지에 올라있어.’
이전 파괴의 시련 때처럼 무식하게 힘과 군세만으로 밀어붙이는 놈 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아 니다.
붉은 형체도 연신 눈동자를 굴려 대며 틈을 찾아내며 파고들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가늠해간다.
한시도 경계를 풀 수는 없었다.
찰나의 방심은 곧 죽음으로 직결 될 것이다.
허나 계속 이렇게 지루한 대치 상태를 이어가서는 승부가 나지 않 을 것이다.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서 틈을 만들어낸다.’
결단을 내린 서준이 곧장 땅을 박차며 뛰어나간다.
타닥-!
서준의 신형이 한 줄기의 빛살이 되어 앞으로 쏘아진다.
계속해서 틈을 찾다가 서준의 움
직임에 곧장 반응을 하지 못했지만 붉은 형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다.
붉은 형체의 신형도 빛살이 되어 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서준보다 좋은 위치를 선점해낸다.
‘후발선제?!’
뒤늦게 출발하여, 먼저 닿는다.
단순히 속도가 더 빨랐기에 벌어 지는 일이 아니다.
속도는 똑같았다.
그저 붉은 형체가 움직임을 완전 히 이해하고, 흐름을 뒤틀어냈다.
‘위험해.’
앞으로 쏘아지던 서준이 기겁하 며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벌려 내려는 순간이었다.
후웅-!
섬뜩한 바람 소리가 뺨을 스쳐 지나가며 이마를 찢어낸다.
쥭-!
시야를 가리는 붉은 선혈을 닦아 내는 서준의 입에서 헛웃음이 홀러 나왔다.
“싸움 좀 할 줄 아나 보네……?”
없는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억
지로 비집고 들어가며 다소 무리를 했다고는 하나, 완전히 흐름을 빼 앗길 것이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 었다.
심지어 특별한 기술이나 무공이 아닌 순수한 무(武)의 싸움에서 패 배한 것이었다.
“이런 굴욕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네.”
단순한 힘이 아닌 무의 묘리로 패배를 했다.
무인으로서 살아온 서준은 크나 큰 충격이었다.
‘엄청나게 자존심 상하네.’
황금안, 고대의 힘들을 사용하여 힘으로 압살하려 한다면 충분히 우 위를 점해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강한 힘으로 압도해버리는 것은 제대로 된 정체도 알 수 없는 붉은 형체를 상대로 박투전에서 밀 리는 꼴을 인정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놈이 먼저 다른 능력을 사용한다 면 모를까 먼저 다른 수를 보이는 것은 절대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 았다.
‘그럴 수는 없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흘린 서준
의 시선이 붉은 형체에게로 고정된 다.
“재미있겠어.”
자연스레 단순한 시련이나 적이 아니라 붉은 형체 자체에게 훙미가 동하기 시작한다.
그사이, 붉은 형체가 빛살이 되 어 서준에게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후웅-!
소리가 들려오기 전 붉은 주먹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허나 전처럼 허무하게 당해줄 생 각은 없었다.
서준은 가볍게 손을 내뻗어 붉은 형체의 주먹을 휘감아내고 꺾어낸 다.
‘금나수.’
매서운 기세로 날아오던 주먹의 경로가 뒤틀리며 애꿎은 허공만을 가격한다.
허나 붉은 형체의 표정은 담담하 기 그지없었다.
마치 이 공격이 막힐 것이라 예 상했다는 표정이었다.
허리를 비틀어, 경로가 뒤틀린 주먹으로 원형의 문양을 그려낸다.
‘태극!’
여유로이 공격을 흘려낸 서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태극의 묘리에 갇혀 움직임이 봉 쇄된 서준의 복부에 붉은 형체가 쇄도한다.
콰앙-!
권격에 실린 충격파와 함께 서준 의 신형이 허공을 노닐며 날아가더 니, 끝내 벽면으로 처박힌다.
주먹이 닿기 전, 양팔을 교차시 켜 겨우 막아내긴 했으나 충격을 완전히 상쇄한 것은 아니었다.
비단 육체적인 충격뿐만이 아니 었다.
서준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물음을 던진다.
“너 설마……
단순히 공격을 읽힌 게 아니다.
예지에 가까운 능력으로 움직임 을 읽어냈다.
생각이 똑같은 게 아닌 이상, 있 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은 즉, 붉은 형체를 하고 있는 저 신형은 자신, 한서준에게 서부터 비롯됐을 확률이 농후하다
는 것이었다.
“ 나야?”
말을 못 하는 것인지 붉은 형체 에게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붉은 형체의 비릿한 미소,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은 모습은 서준에게 확신을 주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스스로와의 싸움에 어이가 없었지만, 당황을 해서는 안 된다.
오롯이 승리만을 생각한다.
‘광기로 빚어진 또 다른 나를 이 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준은 차가운 눈동자로 붉은 형 체의 모습을 응시한다.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만큼 평소 와 같은 움직임을 보여서는 안 된 다.
그렇다고 얕은 수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붉은 형체가 자신으로부터 비롯 되었다면 그 또한, 무의 극에 달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웬만한 수는 가볍게 파훼당할 것 이다.
실제로도 붉은 형체 또한 섣불리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섣부르게 공격을 하려다가는 오 히려 자신이 역으로 당할 수도 있 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이다.
물론, 해답 자체가 없는 것은 아 니었다.
‘평소에 내가 사용하지 않던 수 들을 이용한다.’
붉은 형체를 응시하고 있던 서준 이 조심스레 호흡을 고른다.
“ 후우......
몰아 내쉰 숨과 함께, 감각들을 날카롭게 일으켜낸다.
단순히 예민한 것이 아닌, 근육 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느껴질 정도 로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린다.
극에 달하는 집중 상태에 들어가 자 붉은 형체의 움직임, 호흡 하나 하나까지 눈에 들어온다.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붉은 형체 의 틈을 찾고 있던 서준의 눈에 이 채가 어렸다.
‘ 빈틈!’
실낱보다도 작은 틈이다.
붉은 형체가 호흡을 들이마시며 움직임을 멈춘 순간 서준이 곧장 발을 놀린다.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붉은 형체가 곧장 발을 놀리며 움직인다.
쿵-!
허무할 정도로 공격이 막혀버린 다.
이어서 붉은 형체가 주먹을 내뻗 으며 반격을 가해오려 한다.
허나 서준은 몸을 피하지 않는 다.
애초에 막히고, 역공당할 것이라
생각하고 내지른 공격이다.
‘몸을 던진다.’
상대의 역공보다 더 빠르게 계속 해서 공격을 이어간다.
평소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오롯이 공격만을 생각하는 방식이 다.
공격을 내뻗는 순간 생길 수밖에 없는 작은 틈에 몸을 던져 타격한 다.
붉은 형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지만 이미 늦 었다.
내뻗은 주먹에서 둔탁한 감각이
느껴진다.
터억-!
붉은 형체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눈동자에는 당황이 가득했다.
자연스레 서준의 입가에 피식 미 소가 흐른다.
“이런 방식은 예상 못 했나 보 네.”
하지만 붉은 형체의 당황은 잠시 뿐이었다.
곧장 발을 놀려 거리를 벌린 후, 자세를 다잡고서는 눈을 가늘게 뜨 며 서준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힘겹게 좁혀낸 거리가 금세 벌려 졌지만 상관없었다.
‘생각이 많아지겠지.’
전처럼 한 가지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공격을 막아내고 역공을 취하려 다가 오히려 다시 한번 빈틈을 내 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역공을 포기하 고, 공격을 피해 다니기만 해서는 결국 패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져갈 것이다.
피어난 의심과 불신이 스스로의
마음을 지배하며, 종국에는 심마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고작 한 번의 공격이었지만 그로 인한 여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 도다.
실제로도 붉은 형체의 얼굴에는 처음과 달리 그늘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초조함과 불안함도 가득해 보인 다.
얼마 가지 않아, 붉은 형체는 아 예 마음을 바꿔먹은 것인지 갑작스 레 발을 앞으로 내뻗으며 선공을 가해온다.
허나 이 또한 예상했던 그림 중 하나였다.
붉은 형체만 서준의 수를 읽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서준 또한 붉은 형체의 수를 읽 어낼 수 있었다.
“ 뻔해.”
심지어 끌어올린 긴장과 집중은 여전히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붉은 형체의 근육들의 작은 떨림 들마저 눈에 읽히고 있었다.
후웅-!
서준은 허리를 살짝 비트는 것으
로 쇄도해오던 주먹을 가벼이 흘려 낸다.
물론, 공격은 끝난 게 아니다.
하지만 뒤이어 날아오는 발차기 도 움직임도 고개를 살짝 젖히는 것으로 가벼이 피해내 버린다.
후웅-!
모든 게 예상했던 대로 흘러간 다.
그렇다면 결과 또한 정해졌다는 것이었다.
“끝났네.”
비릿한 미소를 흘린 서준은 말아
쥔 오른손의 주먹을 아래에서 위로 내 뻗는다.
콰직-!
복부에 꽂힌 주먹을 바라보고 있 는 붉은 형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 도 난 것마냥 거세게 혼들리고 있었다.
“역시 결국 복제품에 불과하네.”
서준의 노골적인 비웃음에 붉은 형체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다.
붉은 형체가 기운을 폭발시키며 서준의 움직임을 봉쇄시키려 한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려나 보
네.”
솟구치는 기운에는 광기의 힘이 가득했다.
실제로도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던 붉은 형체의 표정에도 광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전처럼 흐름을 읽거나, 계산된 공격을 내지르지 않는다.
마구잡이, 광기에 사로잡힌 채 공격을 퍼부어낼 뿐이다.
전보다 위협적인 부분도 있긴 했 지만 무의미한 발악에 불과했다.
“너만 비장의 수들을 숨겨놓은 게 아니거든.”
어느덧 서준의 눈동자는 황금빛 으로 물들어 있었다.
움직임이 읽히는 수준이 아닌, 완전히 통찰되어 버린다.
쏟아지는 공격들은 애꿎은 허공 을 가르거나, 무(無)로 되돌아간다.
광기에 물들었다지만 수준의 차 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된 것은 아니었다.
붉은 형체의 두 눈동자에 드리우 고 있는 절망을 읽어낸 서준의 입 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너도 느끼고 있나 보네, 너는 절대 날 못 이겨.”
사실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결과였 다.
그저 무(武)로써 결판을 내고 싶 기에 겨뤄보았을 뿐이다.
이렇게 각자 가진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면 서준이 압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말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