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권 7화
482화
파지직-!
요란한 스파크와 함께, 정복왕의 성역에 균열이 일어나는 모습에서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무슨……?”
그 안에서는 특유의 생김새를 가 진 혼돈인이 촉수를 휘날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혼돈 인과 다를 바 없었지만 특유의 기
세를 숨길 수는 없었다.
“구로그?”
과거, 혼돈의 세계에서 마주했었 던 혼돈인이자 카터의 조력자, 구 로그였다.
‘ 어떻게?’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 런 질문을 던질 틈이 없었다.
‘부상이 심해.’
청각마저 손실된 것인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 음에도 곧장 인지하지 못하고 주변 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에 는 생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마주하고 있 는 서준을 찾아내고는 다급히 말을 건네 온다.
— I— "{기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인지 말 을 전하는 순간, 구로그의 신형이 실 풀린 인형처럼 쓰러진다.
갑작스런 상황에서준은 다급히 몸을 날려 구로그를 안아들고서는 볼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 네.’
서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 다.
좋지 못한 구로그의 몸 상태는 무언가 큰 싸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걸 예상하게 한다.
더불어 은하의 통로를 오랜 시간 헤맸을 것이라 대변해주고 있었다.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 어떻게
은하의 통로를 열었는지, 무슨 연 유로 찾아온 것인지.
정확한 연유들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 서준을 찾고 있었다.
부단히 노력하여 마침내 서준을 만나는 데 성공했지만, 부상을 입 은 채로 오랜 시간 은하의 통로를 거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도착한 것이 기적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허나 운명인지, 아니면 행운 덕 분인지 마지막 순간에서준을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서준에게 치유를 받을 수 있었고, 구로그는 반 시진도 되지 않아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렇게 몸을 회복하고, 의식을 되찾은 구로그는 곧장 자리를 박차 고 일어나며 서준에게 말했다.
-카터 님을 도와주세요!
“그렇게 말하면 제대로 도와주기 가 힘들어. 자세하게 상황을 말해 줘.”
-혼돈의 세계에 엄청나게 많은 균열이 일어날 조짐들이 보여서 카 터 님이 서준 님에게 도움을 요청 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나한테 도움을 요청했다고?”
기억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카터 님의 방문.’
이야기를 듣긴 했었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여 대수 롭지 않게 생각하여 넘겼었던 적이 있었다.
허나 다시 찾아올 수 없는 상황 이 되어버렸다.
-단순한 조짐이 아닌 현실이 되 어서 카터 님께서 다급히 막아보려
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고대의 존재가 나타났고 공격을 해왔어요.
“고대의 존재?”
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쉽 사리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고대의 존재들이 갑작스레 날뛰기 시작했 다.
거기에 더불어 갑작스런 균열들 의 출현까지, 이 모든 것들이 단순 한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주는 변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중요한 것은 우주가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한 연유가 아
니었다.
-카터 님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많이 당황했어요……. 최대한 빠르 게 대응하기는 했지만 역부족이었 어, 그렇다고 자리를 벗어나기에는 생성된 균열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카터 님은 최선의 선택지로 서준 님을 찾아와 달라 한 거예요.
“카터 님을 구출한 후, 고대의 존재를 사냥하고 균열을 막아달라 는 거잖아.”
-정확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고개를 연신 주억인 구로그는 간 절한 눈빛을 보내온다.
서준이 무사히 혼돈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카터의 도움이 컸었다.
거절할 수 없었다.
“ 얼마든지.”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 준다 고요?
흔쾌한 답변에, 구로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자그마치 고대의 존재와의 싸움 이에요, 아무리 서준이라고 해도 위험할 수 있어요.
“이미 벌어진 싸움이야, 아니 이 전쟁에서 정말로 이기고 싶다면 든 든한 조력자인 카터 님을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봐.”
서준의 말에 언제나 담담하기만 하던 구로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감동하지 마. 나름 계산적인 거 니까……. 카터 님은 혼돈의 세계 에서 나를 도와주셨던 적도 있고, 또 카터 님이 없으면 균열을 막을 사람도 없어지잖아, 오히려 내가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
_그건…….
“은혜를 받았으면 갚는 게 도리
잖아.”
씩 웃은 서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 간도 촉박한 것 같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이동하면서 나누자.”
-정말 고마워요.
구로그는 더 이상 서준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선 서준을 향해 조심스럽게 허리를 기역 자로 굽히며 감사를 표한다.
-저를 비롯해 평화파의 혼돈인들 은 오늘 서준 님이 보인 호의를 잊
지 않을 거예요.
“나중에 확실하게 받아낼게.”
서준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피워 낸 채로 말한다.
“은하의 통로를 열어낼게, 돌아 가는 길은 알고 있지?”
서준의 말에 구로그가 연신 고개 를 주억였다.
몇 시간 후.
분주히 움직인 덕분에서준은 시 선의 끝자락에 구로그가 넘어온 은 하의 통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저기야?”
- 맞아요.
고개를 주억인 서준이 곧장 발을 놀렸다.
그렇게 통로를 넘어선 순간, 느 껴지는 감각에서준의 미간이 찌푸 려졌다.
거대한 불길 속에 갇혀있는 듯했
다.
불길을 꿰뚫고 바깥의 상황을 봐 보았으나, 내부와 별반 다를 바 없 었다.
일전에 보았던 혼돈의 세계가 아 니었다.
세계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 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
-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 하게 찾아왔어요.
서준이 저도 모르게 흘린 의문 에, 뒤를 따라 통로를 넘어온 구로 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답을 했다.
-고대의 존재, 크투가의 힘이에 요, 세계 전체를 불태워버려요.
“크투가라……
서준은 통로를 이동하는 와중 구 로그에게서 크투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이 정도면 불을 다루는 게 아닌 지배하는 수준이다.
실제로도 타오르는 불길 곳곳에서 서준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불길이다.
하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자유분 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 이 불길들이 전부……
-……맞아요. 크투가의 힘이에요.
“강하네.”
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근데 어째서 크투가가 카터 님 을 공격한 건지 알아?”
-……이유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카터 님도 그렇게 당황하 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겠네.”
구로그의 입장에서도 갑작스러웠
을 것이다.
오히려 어느 정도 이유가 짐작이 갔다면 크투가의 공격을 예상하고 대비했을 것이다.
“일단…… 카터 님과 크투가를 찾아내는 게 우선이겠네.”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구로그의 촉수가 불길 너머, 불 꽃이 유독 치솟고 있는 위치를 가 리 켰다.
“일부러 가렸나 보네.”
황금안을 발동시켜 불길 너머를 확인해보려 했지만, 내부의 상황을 통찰할 수 없었다.
-크투가가 다루는 불길은 단순한 불꽃이 아닌 정령에 가까워서 그럴 거예요.
“고대의 존재들의 정령왕 같은 건가?”
-얼추 비슷해요.
“생각보다 더 강하겠네.”
긴장감에 목울대로 마른침이 삼 켜진다.
아직 위지율처럼 능수능란하게 황금안을 다뤄낼 수 없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 는데.’
사전에 정보가 있었다지만 심연 을 통찰해낸 만큼 황금안을 수준급 으로 다룬다고 말할 수 있었다.
헌데 그런데 눈앞의 불길을 통찰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 크투가가 다루는 불 꽃들은 심연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말일 거 다.
‘생각해보면 고대의 존재들 중에서 정령왕과 비슷하다고 일컬어질 정도니까……
충분히 납득이 가는 상황이다.
지금 크투가가 다루는 불길은 태
초부터 존재해온 정령이자 불길일 것이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최악 의 경우도 생각해둬야 할 거야, 어 쩌면 카터 님은……
—살아계셔요.
구로그는 단호하게 서준의 말을 잘라냈다.
“어떻게 장담해?”
-느껴지고 있어요, 그리고 카터 님이 만들어 둔 은하의 통로가 안 닫혔잖아요.
확실히 통로를 만들어 낸 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카터가 죽었
다면 은하의 통로가 존재할 수 있 을 리가 없었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앞 의 불길을 직시한다.
“그러면 우선 카터 님을 구하는 게 최우선의 과제겠네.”
아직까지는 살아있다지만, 정확 하게 어떤 상황일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전투를 피하는 것이 현명 한 선택이 될 수도 있었다.
“길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 당연하죠.
서준은 앞장서서 걸으려는 구로 그를 만류한다.
“한시가 급한 거니까, 방향만 가 르쳐 줘, 내가 확인하고 올게.”
처음에는 다소 당황한 듯했지만, 구로그는 얼마 가지 않아서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알겠어요, 이쪽 방향이에요.
구로그가 촉수를 내뻗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던 순간이었다.
“불꽃들의 움직임이 좀 이상한 데?”
일대에서 치솟고 있던 불길이 촉 수와 같은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설마 이리로 오고 있는 건가?”
의문은 곧 현실이 되었다.
치솟던 불길은 서준의 주변을 포 위하듯이 감싸 안기 시작한다.
화르륵-!
[네놈이 보크루그와 수마나스를 쓰러뜨렸다는 혼돈제인가?]
이어서 치솟던 불길은 과거, 수 없이 봐왔던 형상을 취해내며 말을 건네 오고 있었다.
“ 악마?”
산양과 같은 뿔, 박쥐와 같은 날 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평범한 악마 는 아니었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높게 치솟 고 있는 불길은 그의 정체를 쉽사 리 유추하게 해줬다.
“크투가?”
[나를 알고 있나 보군.]
불길로 형상을 취하고 있는 만큼 크투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 른다.
[우선 만나서 반갑군, 혼돈제여, 나의 오랜 형제들을 사냥했다는 소 문이 우주에 널리 퍼졌던데, 이렇
게 직접 만나게 되어서 기쁘군.]
불길에서 흘러나오는 크투가의 목소리에 구로그의 얼굴이 일그러 진다.
항상 차분했었던 구로그의 눈동 자에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크투가……! 카터 님을 어떻게 한 거죠?
[전령으로나 간신히 사용할 수 있는 미개한 존재가, 주제도 모르 고 대화에 끼어들려 하다니.]
화륵-!
불길이 치솟으며 구로그의 머리
위로 쏘아져 내린다.
허나 구로그가 화염에 뒤덮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쾅-!
서준이 내지른 주먹에서 발생한 기파에, 치솟던 불길이 폭음을 일 으켜내며 자취를 감추었다.
[과연……. 다른 형제들을 사냥했 다는 것이 헛소문은 아니었나 보 군.]
“묻는 말에나 대답하지, 카터 님 을 어떻게 한 거지?”
[걱정할 거 없네, 아직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잘했어, 보답으로 딱히 해줄 건 없고,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죽 여 줄 테니까, 지금처럼 얌전히 기 다리고 있어.”
[크하하! 나를 죽이겠다니, 나약 한 형제 몇을 잡았다고 너무 기고 만장해있군.]
“허세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거야.”
서슬 퍼런 미소를 흘린 서준이 혼돈기를 끌어올리려던 순간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