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권 24화
474화
본래 드높은 탑이 자리 잡고 있 던 곳이었지만, 서준이 시련을 통 과한 뒤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무 (武)의 영역이 된 잿빛 공간.
그곳에 홀로 가부좌를 튼 채 앉 아 있던 서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 푸하……
이어서 내뱉어진 숨결은 무겁게 내려앉는다.
“혼돈제!”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카 라후가 빠르게 그의 곁으로 뛰어갔 다.
그 모습을 확인한서준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망각의 시련장이 아니네 요.”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망각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련을 통과한 이후,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사라지고 재조립되는 과 정을 거치는 동안 의식이 없었던 서준은 대충이나마 어떻게 된 상황 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은 건가? 무슨 충동 같은 거 들지는 않는 거지?”
카라후의 다급한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저은 서준이 웃음을 보였다.
“멀쩡해요. 오히려…… 잠시.”
말을 끊은 서준은 뒤늦게 머릿속 에 울려오는 메시지에 의식을 집중 했다.
띠링-!
[축하합니다, 혼돈제로서 망각의 시련을 통과해냈습니다.]
[칭호, 망각제를 획득합니다.]
[망각제 (忘却帝)]
망각 스텟이 2배로 상승합니다.
망각의 힘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 됩니다.
[혼돈제, 한서준의 이름이 고대의 세계에 드높게 울려 퍼집니다.]
[당신은 이 세계에 있어, 추앙받 고 있는 고대 신들을 위협할 수 있 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고대 신들의 관심을 주의하십시 오.]
[제작자 ‘???’가 남긴 메시지가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N.]
많은 메시지들이 떠오른다.
어느 것 하나 가벼이 여길 수 없 었다.
첫 번째로, 서준은 그토록 바라 던 망각제의 자리를 찬탈해내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망각제의 칭호를 획득하긴 했지 만 적용은 하지 못한 상태다.
서준은 곧장 시스템 창을 불러냈 다.
‘시스템 패치.’
눈앞에서 반짝이는 홀로그램 창 중 서준의 시선이 멈춘 것은 바로 ‘칭호’란이 었다.
가진 칭호의 능력 중 그 어느 것 도 포기할 수 없었다.
띵-!
[신성력: 100,000을 소모해 네 번째 칭호란을 개방합니다.]
다행히도 현재 보유한 신성력은 20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다행이네.’
다소 신성력의 소모량이 많긴 했 지만 아까울 것은 없었다.
기존의 전력을 유지한 채로, 망 각의 힘을 증폭시킬 수 있는 것이 다.
“좋네.”
서준은 곧장 네 번째로 개방된 칭호란에 새로이 얻은 망각제를 등 록해냈다.
띠링-!
[사용자 한서준의 칭호에 ‘망각
제’가 추가됩니다.]
메시지 창이 떠오르기 무섭게 변 화가 찾아왔다.
우선 주변을 배회하는 망각의 구 가 선명히 보인다.
‘자그마치 여섯 개.’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망각의 구가 아니다.
혼돈기로 힘을 사용한다면 혼돈 구가 될 수 있는 힘이다.
일종의 경지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중요한 것이었다.
‘경지가 상승했어.’
이유도 쉽사리 추측이 갔다.
망각의 괴물을 쓰러트릴 때, 그 의 영혼에 있던 망각의 근원을 파 괴하고, 흡수해내었다.
서준의 뇌리에는 그때의 감각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엄청난 힘이었지……
심지어 흡수하는 과정마저 순탄 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망각의 시련장이라는 특별한 상
황 탓인지 꽤나 힘에 대한 이해도 가 더욱 높아져 있었다.
말 그대로 망각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헌데 변화는 망각의 구가 늘어난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혼돈기가……
얼핏 잡아도 기존의 2배 이상, 폭발적인 상승을 보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서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 설마?’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서
준은 다급히 망각제의 칭호를 해제 해본다.
띠링-!
[사용자 한서준이 칭호란의 ‘망각 제’를 해제합니다.]
칭호의 효과가 사라짐에 따라 자 연스럽게 망각의 힘이 현격하게 줄 어든다.
놀라운 점은 줄어든 것이 망각의 힘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혼돈기도 같이 줄어들었어.’
같은 근간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망각제에 올랐기 때문일 까?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망각의 힘이 증폭되면 혼돈기 의 양도 함께 상승하고 있었다.
실험의 결과를 확인한서준의 입 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피어 난다.
‘미쳤어……
지금 혼돈기의 양이 2배로 상승 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만약 여기서 파괴제와 공허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면?
혼돈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웬만한 고대의 존재들 마저도 압살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 어쩌면……
쿠루후가 말했던 잿빛 기운의 힘 을 다루던 존재, 신이라 불려도 손 색이 없다는 그 존재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추적하고 있던 존재들 에게 가까워져가는 느낌이다.
‘좋았어!’
실제로도 메시지 창에서 고대의 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되 었다고 중명해주고 있었다.
성취감에 입가에 미소를 지은 서준은 뒤이어진 메시지들을 확인했 다.
‘고대의 신들의 관심을 주의하라 고?’
서준의 입장에서 이건 다소 뜬금 없는 이야기였다.
고대 신들은 웬만한 것들에는 흥 미를 느끼지 않는다고 들었다.
‘분명 대다수 관망하거나 무시한 다고 들었는데.’
다행히도 이유가 어느 정도 추측 이 가긴 했다.
‘망각제에 올라서인가?’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역시 이상하다.
쿠루후에게 직접적으로 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고대의 존재들 중에서 신이라 불 려도 손색이 없는 이들의 힘은 상 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서 로 비슷한 힘을 가졌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 않은가?
무극에 도달하고 혼돈기의 경지 가 올랐다고는 하나, 아직 스스로 가 생각해도 부족한 점들이 많았다.
‘가능성 때문인가?’
나머지 파괴와 공허의 황제의 자 리에까지 오른다면 힘이 기하급수 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머리를 굴려 보자, 고대 신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 시 작했다.
‘어느 정도 대비를 해둬야겠어.’
머릿속으로 생각을 이어가던 때, 등 뒤로 인기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정신 차렸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 카 라후의 모습에서준이 곧장 고개를 숙였다.
의식을 잃기 전, 카라후를 비롯 한 시험관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무너진 망각의 시련장에 갇혔을 수도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뭘 이 정도로, 자유를 얻게 해 줬는데 당연한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필요해서
시련을 받았을 뿐이었다.
허나 좋은 이미지를 심어둬서 나 쁠 것은 없었기에 굳이 입 밖으로 내뱉을 필요는 없었다.
“혹시 자유를 찾은 이후로, 뭐 하려 했던 게 있어?”
괜한 오지랖을 부리려는 게 아니 었다.
가벼운 말투, 행동을 보이고 있 었지만 카라후의 주변을 맴도는 구 체는 자그마치 열 개.
직접 붙어보지는 않았지만 카라 후가 가진 힘이 얼마나 강한지 대 변해주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충돌을 피하고 싶었 기에 행보에 대해 미리 물어본 것 이다.
“솔직히 허황된 꿈 같아서 무언 가를 정한 거는 없어, 우선 이 망 각의 세계를 닥치는 대로 돌아다녀 보려고.”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떠한 길을 걷게 될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망각 의 세계에 있는 동안은 충돌할 일 이 없었다.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시련장에 구속되어 있던 걸 풀어준 것만으로
도 큰 은혜를 입은 거라는 걸 알고 있고, 가능하다면 더 이상 빚지고 싶지는 않아서 알아서 독립할 거 야.”
서준은 카라후의 말을 곱씹듯이 되새긴다.
‘큰 은혜를 입었다라……
역시나 오해를 바로잡지 않은 것 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혹시 그러면 부탁 몇 가지 해도 될까?”
“은인이니까, 웬만한 것들은 들 어줄게.”
혼쾌히 고개를 주억이는 카라후
의 모습에서준이 천천히 입을 열 었다.
“우선 훗날 망각의 세계의 여정 을 끝마치고 바깥 은하에 가게 되 었을 때, 지구라는 차원 그리고 내 이름, 한서준과 관련되어 있는 은 하들을 침공해주지 않았으면 해.”
당장의 충돌을 피해냈다고 하지 만 언제, 갑작스럽게 싸움이 벌어 지게 될지 알 수 없는 만큼 가능성 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현명했 다.
망각제로서 고대의 힘을 다루며, 충동을 억누르고 있어서인지, 카라 후는 선뜻 대답을 건네 오지는 못
“순간적인 충동이 올라온다면 힘 들긴 하겠지만, 혼돈제 너의 말이 니 최대한 노력은 해볼게……
백 프로 만족은 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받아들여줘서 고마워,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해도 될까?”
어색하게 웃은 서준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어려운 거는 들어주기 힘들어.”
입은 은혜에 따른 한도가 있는 것일까?
카라후는 이전처럼 흔쾌한 대답 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전에 부탁한 것처럼 본능을 억누른다거나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천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문을 열어줄 수 있을까?”
쿠루후가 문을 열어주어 넘어오 긴 했지만, 돌아갈 방법에 대해서 는 알지 못했다.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겠지만 얼 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가 없었다.
일전 혼돈의 세계를 통해, 안쪽
세계라 할 수 있는 곳의 시간 축이 바깥 세계와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여유를 부 릴 수는 없었다.
“네가 넘어온 세계를 말하는 거 라면 좌표를 기억하고 있어서 힘을 조금 쓴다면 연결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문을 열어줄 수 있을 까?”
“으음……. 내가 조금 손해 보는 것 같긴 한데, 대신 이걸로 빚은 없는 거다.”
“알겠어.”
더 이상 카라후에게 무언가를 부
탁할 수 없게 되었다.
허나 아쉬울 것은 없었다.
애초에 망각의 세계에 온 이유는 망각제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카라후의 은인이 된 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일 뿐이다.
“정산도 끝났으니까, 바로 문을 열어 줄게.”
카라후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던 열 개의 구체가 빠른 속도로 회전 하기 시작한다.
뒤이어, 강렬한 잿빛 기운을 발 산한다.
고오오-!
허공을 떠다니던 구체들이 만들 어 낸, 잿빛 소용돌이가 세계를 일 그러뜨리기 시작한다.
“단번에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 갈 수 있을 거야.”
“고마웠어.”
“ 나야말로.”
카라후의 얼굴을 보며 미소로 화 답한서준은 하나뿐인 동생 서연, 위지강이 있는 천 대륙을 향하여 곧장 발을 내딛었다.
요괴와의 대전쟁으로 황폐해진 천 대륙의 인류는, 대승을 거두어 냄으로써 다시 한번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듯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무인들을 척 살한다는 황실의 명령으로 인해 대 륙은 다시 한번 혼란에 휩싸였다.
황명이 내려온 지 고작 이틀 만 에 오대세가 중 한 곳이 사라졌다.
심지어 삽시간에 역사의 뒤안길 로 사라져 버린 세가는 천 대륙 내 에서 큰 명성을 날리는 남궁세가였 다.
남궁세가가 이리도 허무하게 무 너진 이유는 간단했다.
난생 처음 보는 붉은 힘과 기이 한 병장기를 다루는 황실군의 힘이 너무나도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