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권 21화
4기화
말아 쥔 주먹에는 잿빛 기운, 망 각의 힘이 집약되어 물결처럼 출렁 인다.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다.
“제발…… 순리의 길을 걸어가 며…… 함께할 수 있다. 어찌하여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려 한단 말이냐?”
망각의 힘이 넘실거리고 있는 주 먹의 위력을 느낀 망각의 괴물이
애절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정말 순리대로 갈 생각이었다면 망각인 네가 혼돈인 내 말에 복종 을 했어야지.”
그 말에 망각의 괴물의 수백의 눈에 드디어 체념이란 감정이 비친 다.
“결국 발버둥 쳐봤자 혼돈을 넘 어설 수 없다는 건가, 정말로…… 불공평하구나.”
“원래 세상은 불공평해. 너도 알 고 있던 거잖아?”
서준은 더 이상 망각의 괴물을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너머, 출렁이는 망각 의 근원을 직시했다.
“잘 쓸게, 이만 끝내자.”
뻗어진 주먹은, 빛의 속도로 휘 둘러져 세계를 가격한다.
‘태초기공 제1식, 일권소멸(一奉 消滅).’
일격에 없애버린다.
쾅-! 쩡-!
폭음과 함께 세계가 뒤흔들리며 조각나기 시작했다.
너머의 세계, 바깥에서 있던 카 라후의 얼굴이 보인다.
“ 탑이......
“무너지고 있어.”
놀란 시험관들이 서로를 바라보 았다.
오래토록 자리를 지켜 온, 자유 를 억압하던 탑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시험관들의 염원을 이뤄 준 서준 은 어느덧 소멸한 망각의 괴물로부 터 피어오른 망각의 힘을 쥐었다.
전신에 차오르는 망각의 힘에 전 율이 일어난다.
마침내 망각의 힘을 모두 흡수해
낸 서준은 무언가에 홀린 듯, 탑이 무너지는 그 한복판에서 두 눈을 감으며 무아지경에 빠진다.
갑작스레 쓰러진 서준과 무너지 고 있는 시련장, 자연스레 카라후 를 비롯한 시험관들의 행동이 다급 해졌다.
“혼돈제를!”
그리 깊은 친분은 없다지만 염원 을 이뤄 준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서준을 방치할 정도로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단숨에서준을 품에 휘감은 카라 후가 그를 끌고 왔다.
“바깥, 망각의 세계로 간다.”
케이쿠와 파라쥬가 손을 내뻗으 며 공간을 갈라낸다.
가서린이 찢어진 균열에 자신의 힘을 더해낸다.
잿빛 기운이 갈라낸 세상 속, 시 험관들이 서준과 함께 자취를 감춘 다.
그 즉시, 침묵만이 남은 망각의 시련장이 소멸했다.
그 시각, 천 대륙.
크로투가 이끄는 요괴 군단의 무 리가 200만이 넘어섰다는 소식이 각지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구파일방뿐만 아니라 오 대세가 중 한 곳이 멸문했다.
무림맹주, 금양백이 전선에서며 구파일방, 오대세가가 힘을 합쳤을 뿐더러 사파의 무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며 전쟁을 벌였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금양백이 자랑했던 술법, 그리고 각 파벌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투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크로투의 일격에 성벽이 무너지며, 성을 지 키던 무인들이 처참하게 찢겨져 나 갔다.
뒤를 이은 대요괴들의 돌격 역시 너무나 막강했다.
그들은 부상은 물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림맹주, 금양백의 패배에 무림 맹의 당주들과 각 문파의 장문인들 은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그에게 책임을 묻고 목을
쳐야 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지 만, 전투에서 패배해 상처받은 사 자와 다름없는 금양백의 심기를 건 드린 대가로 모두 목이 떨어졌다.
비록 전쟁에서 패배하고, 요괴들 에게 쫓겨 달아났지만 건재함을 다 시 한번 보인 금양백은 연맹에 속 한 무인들에게 당당히 공고했다.
누가 나섰더라도 패배할 싸움이 었다.
스스로의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 다고 생각이 든다면 직접 목을 걸 고 전장에 나서라.
당주들과 장문인들은 침묵했다.
자연스레 천 대륙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저 무시무시한 무림맹주조차 꼬 리를 말고 도망치게 한 요괴들을 대체 누가 막아선단 말인가?
사실상 대륙에서 이름을 널리 알 리고 있던 고수들이 파견되었으나 전쟁에서 대다수가 목숨을 잃은 상 황이었으니 더 이상 그를 대신할 인물도 없었다.
결국 당주들과 장문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한번 금양백에게 부탁했다.
최대한의 결과라도 만들어 보자.
어이없는 태도였지만, 금양백은 그래도 다시 한번 지휘권을 잡았다.
자신의 안위를 위하는 기득권 세 력들을 위함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인류는 끝이다.’
대륙에서 가장 높은 수비력을 자 랑한다는 철옹성이자 무림맹의 본 거지, 무한성의 성벽에 선 금양백 은 또다시 몰려들고 있는 요괴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슨 수를 쓴 다 할지라도 승산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전장에 설 수밖에 없다.
말했듯, 현재 이곳은 인류 최후 의 보루와 다름이 없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신의 가호를 받는 것밖에 없겠 군.”
마지못해 전장에 선 금양백의 심 정을 알고 있는지, 옆에 선 총군사 가 조심스러운 말을 흘렸다.
“무신이라……
금양백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오랜 과거부터, 민간에서 무신이 라 칭송받는 존재가 천 대륙에 있
다는 설화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검은 무복의 무인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며, 하루 만에 강을 만들어 내 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적을 만 들어내며 무신이라고 칭송받게 되 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설화에 불과했 다.
사실 금양백은 그 설화를 믿지 않았다.
그저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만든, 거짓된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무신이 나타난 것은 벌써 수십
년 전이라고 들었다,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마주한 사람이 없지, 정말 로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면 굳이 본인의 정체를 숨길 필요 가 없었을 텐데 말이야.”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느끼 셨기에 은거했던 거 아닐까요?”
“자네도 설화를 믿나 보군.”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지고 전장에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총군사의 웃음 섞인 말에 금양백 이 진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 덕였다.
“그 말에는 아주 적극 동의하네.
그리고 나도 가능하면 그 무신이라 불리는 존재를 직접 봤으면 좋겠 군.”
“그런 것치고는 목소리에 불신 (不信)만 가득하십니다.”
“……나도 마찬가지로 일말의 희 망을 가지려 하는 것뿐이네.”
쓴웃음을 지은 금양백이 조금 더 가까워진 요괴 군단을 바라본다.
반평생을 곁에서 함께해 온 총군 사이기에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 이지, 만약 연맹의 무인들 앞이었 다면 누구보다도 무신의 존재를 부 르짖고, 가호를 바랐을 것이다.
사기란 그런 것이니 말이다.
하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역시 믿을 수가 없었다.
‘아주 강하고, 인의를 아는 존재 라니…… 그야말로 신화 속에서 나 올 법한 존재들의 모습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이야기였 다.
기대를 가질 것도 없다.
언제나 그렇듯 설화의 이야기는 딱 그 정도 수준일 뿐이다.
고개를 내저은 금양백의 시선이 정면을 응시한다.
더 깊은 생각을 했다가는 쓸모없 는 감정에 휩쓸리기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다.
때마침, 요괴 군단이 첫 번째 함 정을 밟았다.
콰과광-!
성벽까지 울리는 굉음과 함께 수 천이 넘는 요괴가 단숨에 소멸한다.
심지어 준비된 함정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연이어지는 폭발의 연속.
하나 금양백의 얼굴 표정은 편하 지 않았다.
폭발이 일어나며 생긴 자욱한 먼 지구름 너머에는 아직 많은 요괴들 이 남아있다.
“옵니다.”
총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크아아-!
굉음과 함께 일반적인 요괴들과 는 생김새부터가 다른 구미호가 전 장으로 뛰어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가 휘두른 손톱에 지면이 갈라 지며 숨겨놓은 술법들이 파훼되며 함정이 무효화된다.
콰과광-!
허망하게 사라져버린 함정을 확 인한 금양백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 운다.
나름 자랑스럽게 여기던 함정들 이 허망하게 박살 나는 모습은 이 미 수도 없이 많이 목격했다.
“ 지독한……
총군사의 눈동자도 거세게 흔들 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름 있는 대요괴들이 전면으로 나선다.
그 수가 자그마치 열에 달한다.
더 이상 함정들은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터였다.
‘여기서 물러난다고 해서 다음 방안이 있을까?’
금양백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없다, 그저 얼마 남지 않은 생명 을 조금 더 연장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굳은 표정의 금양백이 입을 열었다.
“출정 준비를 하게. 요황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요괴라 불리는 것들 정도는 직접 죽여봐야지.”
“맹주?”
“인류 최후의 전투에 이름 한 줄 기 남길 기회 아닌가.”
최후의 전투, 금양백 역시 끝없 이 몰려드는, 결단코 이길 수 없는 적과의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쳤기에 흘러나온 말이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총군사는 그 말을 가슴 속에 담고, 스스로의 결의를 다졌다.
“무릇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 이를 무는 법이죠.”
어차피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라 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볼 것이다.
물론, 금양백이 말한 것처럼 역
사에 이름 한 줄을 남기지는 못할 거다.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난다면 더 이상 천 대륙은 인간의 땅이 아닐 테니 말이다.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해 줄 인 간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 릴 생각은 없었다.
수십 년간, 거의 매일 전장을 헤 쳐 온 무인들에게 있어 그런 비참 한 최후는 어울리지 않았다.
“맹주님과 마지막 전투까지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깊이 고개를 숙인 총군사가 연맹 의 무인들과 함께 전장에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잠시.”
금양백이 갑작스럽게 그의 걸음 을 막았다.
손을 번쩍 들어 올린 금양백의 눈은 보름달처럼 휘둥그레진 상태 다.
“ 맹주?”
총군사의 의문에 침을 꿀꺽 삼킨 금양백이 검지로 몰려오는 요괴를 가리킨다.
“혹시 자네도 저것 보이나?”
“요괴들이라면 아까부터……
“아니, 아니. 내가 말하는 것은 저기……
“음?”
금양백의 손가락을 따라 성과 요 괴 군단 사이의 중앙 지점을 바라 본 총군사가 입에서 기묘한 신음을 흘렸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까?
밤하늘처럼 검은 무복을 입은 무 인이 전장의 중앙에서 있었다.
“무신...?”
저도 모르게 내뱉은 부관의 질문 에 금양백이 헛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하나, 금양백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그를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구미 호의 사지가, 반으로 갈라져버린다.
동시에 한 손에 검은 기운을 휘 감은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연이어진 폭음과 함께 달려드는 요괴 군단이 육편이 되어 허공으로 흩날린다.
성채에 있는 이들 중, 최고수라 고 할 수 있는 금양백조차 그의 짧 은 움직임을 확실히 보지 못할 정 도였다.
단지 검이 휘둘러진다고 생각했 고, 앞을 가로막고 있던 요괴들이 도륙됐을 뿐이다.
심지어 그 공격에 금양백이 목표 로 했던 대요괴가 즉사했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무위였다.
“무신?”
총군사가 웃는 눈으로 금양백을 바라보며 말한다.
부정할 수 없었다.
금양백은 시선을 집중하며 그의 무위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화대로, 아니 설화 이상이나 강력했다.
“저희를 가호하려나 봅니다.”
“무신이라…… 만약 이 전쟁에서 숭리한다면……
“대륙의 모두가 그를 추종하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믿지 말라고 해도 전력을 다해 그의 존재를 추앙할 것이다.
금양백의 눈에도 빛이 떠올랐다.
“무신을 지원한다. 성채에 있는 병력 중 절정 이상의 고수들로만 추린다.”
아무리 대단한 무력을 갖추었다 고 해도 그는 혼자다.
금양백은 만약을 대비하여 출정 준비를 갖추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