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권 18화
468화
발을 동동 구르는 혼돈인이 무슨 말을 하든 들리지 않는다는 듯, 서준의 어깨에 기댄 시험관이 낮은 숨을 연신 내쉰다.
그 모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본 서준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큼, 여기가 정말 망각의 시련장 이 맞나요?”
“ O ”
흐-
“예상했던 거랑 조금 다르긴 하
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이 정말 망각의 시련장인지 의심이 갈 정도 였다.
거친 태도를 보였던 혼돈의 시험 관들과 달리 망각의 시험관들은 마 치 반가운 손님을 대하듯이 살가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시험관의 접근이 더욱더 어색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자격이 증명된 존재인데, 굳이 까다롭게 굴 필요 없잖아.”
싱긋 웃은 시험관이 눈을 초승달 과 같이 가늘게 뜨며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린다.
덕분에 둘의 시선이 허공에 마주 하였고, 그 순간 잽싸게 날개를 펼 쳐 다가온 혼돈인이 뻗은 손바닥이 둘 사이를 완벽히 찢어 놓았다.
“혼돈제께서도 당황하고 있으시 니, 우선 정식으로 인사부터 나누 시죠, 이런 장난을 치려고 오랜 시 간 다른 황제를 기다린 게 아니지 않습니까?”
딱딱한 음성, 그에 개의치 않는 다는 듯 코웃음을 흘린 시험관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인사가 늦었네, 나는 위대한 혼
돈인이자 망각의 시련장의 탑주, 카라후야.”
“한서준이라 합니다.”
“저는 시험관 가서린이라 합니 다.”
활짝 펼치고 있던 날개를 접어 낸 가서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험관들이 차례대로 인사를 건네 온다.
“케이쿠.”
“파라쥬라 합니다.”
손 대신 촉수를 가진 이와 수십 개의 팔을 가지고 있던 혼돈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다소 난처한 얼굴로 볼을 긁적인다.
“혼돈제와의 만남은 매번 고대해 오던 일이다만 혼돈의 힘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힘, 다소 경계 를 보일 수밖에 없는 건……
“알아,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서준이 가볍게 화답했다.
주변을 배회하던 혼돈구들이 시 험관들을 향해 내뿜어내는 적의(敵 意)가 강렬히 느껴진다.
신비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돈은 망각의 존재를 완벽히 인정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각기 다른 힘이라지만 결 국 혼돈에서 파생된 힘.
애초에서로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었다면 동시에 두 개의 황제 위 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나누어졌지만, 결 국 시작점은 같은 곳이라는 거죠.”
카라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다.
“그게 바로 혼돈이 가진 힘이자 무서움이지.”
자칫하다가는 모든 것들이 혼돈 에 잡아먹혀 버린다.
그것이 설사 고대의 힘이라 할지 라도 말이다.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 다.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내 기준 안에서라면 충분히 하나로 합일시킬 수 도 있을 거야.’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서준이 ‘망각’이라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서준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시험 관들이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이윽고는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
다.
“한서준,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애초에 자격을 충족했 기에 길을 찾은 것일 테니까.”
가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종족마저 인간이시잖아 요‘?”
파라쥬의 말을 받은 케이쿠가 고 개를 주억인다.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법 이지, 그야말로 혼돈과 어울리는 종족이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연스 레 대화들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서준은 머릿속에 피어나고 있던 의 문이 존재했다.
“그런데 대체 왜, 저를 이렇게까 지 반기시는 거죠?”
“우린 이 탑에 종속됐어, 달리 말하자면 이 탑이 없다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는 거지.”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이해할 수 없는 카라후의 말에서준의 고개가 갸우뚱- 젖혀지려 할 때였다.
가서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탑에는 태초의 시작점부터 내려 온 예언이 존재합니다, 새로운 혼
돈이 세계를 갈라낼 것이다, 그리고 저희는 이 예언의 끝 부분 세계 가 갈라진다는 문장을 이 탑이 부 서진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죠.”
“그렇다면 제가 그 새로운 혼돈 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러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 다.”
이제야 카라후를 비롯한 시험관 의 태도가 이해가 됐다.
서준을 자유를 선사해 줄 인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이해는 충분히 된 것 같네, 그 러면 바로 시작할까? 어차피 서준
도 우리랑 이런 잡담을 나누기 위 해서 온 건 아니잖아?”
카라후의 말에서준이 고개를 끄 덕인다.
애초에서준이 이곳에 온 이유는 시련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미 혼돈제의 자리에 올라 있 는 만큼 자잘한 시련들로 괜한 시 간을 끌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곧 장 최종 시련을 내릴까 하는데 괜 찮을까?”
시간을 아껴 시시각각 변화하는 천 대륙으로 빠르게 돌아갈 수 있 다면, 최고의 상황이라 볼 수 있었
“저야 감사하죠.”
“그럼 문을 열게.”
망각의 시련장, 눈앞의 탑의 주 인이기 때문인지 카라후는 잿빛 기 운, 망각의 힘이 넘실거리고 있는 최상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 긴장되네요.”
어떠한 시련이 기다릴지 알 수 없지만 이미 혼돈의 시련을 겪어 봤기에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결단코 쉽지 않을 것이다.
시련장은 오랜 세월, 우주의 시 작점이라 할 수 있을 때부터 존재 했었다.
헌데 고대의 존재들에게서 힘을 하사받은 것이 아닌, 정식으로 황 제의 자리에 오른 이들은 손에 꼽 힐 정도다.
때문에 제법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혼돈인들조차도 시련장에 접근하는 것을 꺼렸다.
자신이 어렵사리 쌓아올린 힘마 저 부서질지도 모르는 그 세계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준이 실패를 생 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준은 그런 시련을 받고 살아 돌아와 혼돈제의 자리에 올랐다.
“처음 시련보다 더 어려울 거야, 욕망은 커지면 커질수록 제어하기 가 힘들거든.”
조심스레 입을 연 카라후의 시선 이 서준을 응시한다.
기대, 그리고 커다란 불안감이 공존한다.
다른 시험관들도 마찬가지다.
당연한 것이었다.
예언대로 진행된다면 서준은 시 험관들에게 자유를 선사해줄 수 있 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눈앞의 서준이 욕망에 잡아먹혀 자신의 존재 를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시험관들은 오랜 세월의 염원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절망과 동시에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서준을 처리 해야 하는 일마저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최대한 잡담을 하며 시간 을 끌었을지 모른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던 것이
“걱정할 거 없어요.”
서준이 불안해하는 그들을 향해 짧게 말했다.
“저를 믿으세요.”
오만이 아니다.
서준의 직감은 말하고 있었다.
어떠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해 도 상관없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올 겁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서준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들은 카라후는 입가에 미소를 띄워 낸 채로 손바닥에서 강렬한 잿빛 기운을 발산한다.
고오오-!
허공에 떠오른 잿빛 소용돌이가 세계를 일그러뜨리기 시작한다.
“갔다 올게요.”
서준이 그 사이로 몸을 내던졌
그.사이, 어느덧 백만에 달한 엄 청난 수의 요괴 군단과 함께 삽시 간에 대륙을 휩쓸며, 수많은 문파 들을 무너뜨리고 세계를 광기로 물 들여 낸 크로투는 전신 혈관에서 솟아나는 힘을 느끼며 자부했다.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졌다.’
이제는 요왕(妖王)이 아닌 요황 (妖皇)으로서 칭송받을 정도로 강 력한 군대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직도 위지강이라는 이름을 떠
올리면, 뒷목 아래로 서늘한 감각 이 먼저 차오른다.
크로투는 이 감각에 대해 제법 잘 알았다.
‘죽음.’
또한 이 죽음이 두렵다.
때문에 크로투의 입가로 미소가 흘렀다.
광기에 있어 죽음이란 언제나 가 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만 한다.
‘두렵고 무섭기에 미쳐가는 것이 지.’
강해지기 위해 더욱더 미쳐버리
는 것이다.
우오오오-!
또 하나의 문파를 무너트린 요괴 와 광기에 물든 인간들이 크로투를 보며 괴성을 내지른다.
많은 수와 적지 않은 전투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법이라는 규 율과 그들을 억압하는 무인들이 있 기에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며 대륙 의 변방으로 밀려나서 요괴 혹은 악인 취급을 당했던 그들이, 이제 는 이 땅의 주인이 되어 가고 있 다.
“황제시여, 곧 대륙의 절반이 우
리 손에 들어옵니다.”
전투를 통해 성장하기 이전부터 홀로 하나의 산을 지배하고 있던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 구미 호가 다가와 환한 미소를 보인다.
“머지않아 모두 우리의 것이 되 겠지요. 나약한 무인들은 결코 광 기에 물들어 있는 우리의 진군을 막지 못할 겁니다.”
용의 머리, 개의 몸, 소의 발굽, 원숭이의 꼬리, 뱀의 비늘을 가진 요괴, 세상의 모든 것올 먹어치우 는 탐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말 했다.
크로투는 말없이 그들을 내려다 본다.
구미호와 탐과 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요괴들이 자그마치 열.
그들은 모두 하나의 산 혹은 중 소 도시의 영주를 세뇌하여 지배했 던 이들이다.
그야말로 요괴들의 정예, 이들 중 몇몇은 이미 어지간한 문파의 장문인들을 짓밟을 정도의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
크로투가 내뿜는 광기에 물들었 기에 가능한 일.
삽시간에 성장하며, 자신들의 군
단을 이끌게 된 이들의 자신감은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이 상태로 분열만 하지 않는다면 요괴들은 크로투 없이도 인간들을 몰아내고 대륙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나 그는 심연의 지배자님께서 내린 명령이 아니다.’
크로투는 이 싸움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요괴들이 기세를 올려도, 더 강해져도, 노력하여도, 대륙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곧 이 세계의 지배자가 될 심연
의 지배자님의 뜻이니 크로투는 이 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니 요괴들이 욕망을 발산하는 이 전투는 그야말로 자신의 승리를 위한 초석에 불과하다.
이들의 욕망은 무의미한 불을 피 워내기 위한 장작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크로투는 웃음을 보였다.
“머지않아, 너희들의 욕망과 야 욕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가장 가까이 다가온 구미호 의 어깨를 두드리며, 거짓된 말을 입 바깥으로 내뱉는다.
응원은 기세가 된다.
인간의 기준에서는 서슬 퍼런, 요괴들의 입장에서는 당장 매료되 어도 이상하지 않은 매혹적인 미소 를 보인 구미호가 등을 돌리며 소 리친다.
“요황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대륙을 정벌하자!”
“위대한 요황을 위하여!”
기세등등한 요괴들의 외침에 따 라 백만이 넘는 군단이 괴성을 내 질렀다.
이성보다는 광기에 물든 절규, 그 음성에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혼들린다.
가슴 한복판의 심장이 북을 치듯 박동했다.
충, 충 > '쿵.
그 즐거운 소리를 만끽하며 크로 투는 등을 돌렸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그의 차가운 시야에는, 거대한 성벽을 쌓고 긴 장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인간들이 보인다.
‘더 모여라. 더욱더 뜨거운 불길 을 피워내기 위한 장작이 되어라.’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 도, 가치는 충분했다.
고대의 존재, 심연의 지배자님의 명령을 완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진군해라, 군단.”
크로투의 외침을 따라 환호성을 내지른 요괴와 광인들이 달리기 시 작했다.
광기에 물든 군단의 진군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