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권 17화
467화
위지강의 일행과 서준이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천대륙은 때 아닌 커다란 풍파를 맞이했다.
전설 속, 백귀야행(百鬼夜行)이 시작되었다.
스스로를 광기제, 크로투라는 이 름으로 밝힌 그는 커다란 족적을 대륙 곳곳에 남겼으며, 그를 따르 는 요괴들이 무수히 많이 몰려들었다.
비단 요괴들뿐만이 아니었다.
크로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행진을 단순히 목도한 것뿐인데, 멀쩡했던 청년들마저 미쳐 날뛰기 시작하며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요괴와 악귀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수십만.
그들의 길을 막는 것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마을 혹은 철옹성이라 불리는 요새라 할지라 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대륙 각지에 퍼져있는 영지에서 부터 올라온 소식이 뒤늦게 각지의
문파들, 이어서 무림맹까지 뻗어져 나갔다.
거대한 요괴 무리는 이 대륙에 있어 갑작스러운 재앙이었다.
서로를 향해 이빨과 발톱을 감춘 채 조심스러운 냉전(冷戰)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정파와 사파의 무인 들은 연합군을 결성해야 된다는 의 견에 동의할 정도였다.
마지막 수단이라 할 수 있는 황 실에도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그들 은 침묵을 지켰다.
하나 대륙의 무인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벌써 수십만에 달하는 요괴 군단 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백만을 넘어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는 전설 속 인간을 잡아먹고 세상을 집어삼킨 다는 요괴들의 왕이 함께한다.
역사가 언제나 그러했듯 외부의 적 앞에, 무인들은 다시 하나가 되 어 갈 수밖에 없다.
허무하게 멸망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리고 그 시점, 쿠루후를 가장 먼저 맞닥뜨린 채 멸망의 길을 걷 고 있는 곤륜파의 최고 강자이자
신선이라 칭송받는 장문인, 양소는 몰려드는 요괴 군단의 해일을 보며 탄식을 흘렸다.
“백귀야행……. 정녕 인간의 시 대는 끝이 난 것인가?”
그의 질문은 선봉으로 나선 크로 투의 도끼가 일격에 곤륜산의 결계 를 무너뜨리는 순간 절망이 되었다.
콰과광-!
“살, 살려줘!”
“끼아악-!”
괴성을 내지르는 요괴들의 진군 과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인다.
준비해둔 대규모 도술, 천지붕괴 를 펼치기도 전 양소는 입을 꾹 닫 아야만 했다.
어느덧 그의 눈앞에 마치 태산과 같은 육중한 덩치를 가진 괴인이 붉은 눈을 부라리고 있다.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양소는 펼 치고 있던 도술조차 취소하며,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림맹의 맹주?
크로투라는 요왕(妖王)이 가진 힘에 비하자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음, 음지에 살아야 할 요괴가 대체 무슨 연유로 양지로 나오려는 것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어 호 통 섞인 질문을 할 수 있던 것은, 목숨을 포기한 자가 보인 최후의 용기였을 터다.
대다수의 요괴들은 본능에 의하여 살아간다.
하지만 몇몇 아주 특출 난 요괴 들은 본능이 아닌, 이성을 보이기 도 한다.
요왕이라 칭송받을 수 있을 정도 의 요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실제로도 크로투는 양소의 질문 에 휘두르려던 도끼를 잠시 멈추고 는 미소를 보인다.
“이유는 없다, 그저 죽일 뿐이다 그것이 너희에게 내려진 운명일 뿐 이다, 심연의 지배자님의 말씀 외 에는 그 누구도 이 순리를 벗어날 수 없다.”
꿈틀거리는 크로투의 두 눈에는 짙은 광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이성보다는 본능에 더 충실한 분 명한 요괴의 모습.
하나 그의 입은 이성보다도 어떠 한 존재를 읊고 있었다.
“심연의 지배자님……
많은 지식을 탐해온 양소조차도 한 번도 들어 본적 없는 이명이었다.
“대체 누가……
질문을 내뱉기도 전, 양소의 목 이 허망하게 허공을 날았다.
그 마지막 순간 양소는 문득 생 각했다.
‘아주 먼 과거, 남궁세가의 일원 들이 심연과 같은 어둠의 흔적을 봤었다고 했었지.’
부디 그 어둠이 인간의 손을 들
어주길 바라고, 또 바랄 수밖에 없 었다.
위지강을 사냥해야 한다.
다른 광기제들보다도 빨라야 한 다.
처음에는 오롯이 내려진 명령만 을 떠올렸던 크로투였다.
하나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그 의 본능은 강한 위험 신호를 보내 왔다.
‘위지강은 나보다 강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오랜 세 월 전장을 헤쳐 오며 새겨진 날카 로운 감각이 그 이름을 읊을 때마 다 크로투의 뇌리를 강하게 자극했 다.
다른 광기제들은 분명 패배할 것 이다.
캬주는 용맹과 기지는 높지만, 전투 능력은 분명 크로투의 아래다.
카릴은 술사로서 오랜 준비가 필
요한 만큼 아무런 대비도 되지 않 은 현재로서는 절대로 위지강을 이 길 수 없다.
확신에 가까운 직감, 크로투는 뒤늦게라도 힘을 합쳤어야 하나 짧 은 후회를 했다.
하나 걸어온 길에 얽매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지금의 나보다 강하다고 해서 미래의 나보다 강하리란 법은 없 다.’
무극의 위지강, 우주에서도 강력 한 존재로 손꼽히는 만큼 한 손으로 열 손, 백 손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수백만의 대군을 감당하기 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요괴들은 인간을 양분으로 삼아가며 성장할 수 있다.’
크로투의 생각은 단순한 망상만 은 아니었다.
실제로 요괴들은 인간들을 섭취 할 때마다 아주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요괴라는 존재에 각인된 지독한 생존 본능이 그들을 성장시키고 있 는 것이다.
물론,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
니었다.
더 많은 인간을 섭취하고 강해질 수록 이성을 잃어간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이성을 유지 할 수 있는 요괴들은 한 단계 더 도약하여 성장한다.
요괴 중에서 대요괴(大妖怪)라는 호칭을 받는 이들이 극히 드문 이 유다.
크로투는 천대륙에서 요괴라 일 컬어지는 이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그 와중에 도 끝없는 이성을 유지한 요왕이다.
‘기다려라. 위지강.’
사냥을 끝마친 후 고대의 존재에 게 받게 될 총애를 떠올린, 크로투 의 눈에 강한 욕망이 피어올랐다.
‘……사라졌어?’
동공 속, 는을 감은 채 조용히 가부좌를 취하고 있던 위지강의 미 간이 옅게 파였다.
방금 전, 거대한 혼돈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후, 광기의 힘을 가진 누군가 와 싸움을 벌였다.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거대한 혼돈의 기운을 가지고 있던 자가 누구일지, 그리고 어떠 한 일이 일어났는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서준이 나타났고 광기제와 전투 를 치렀다.
그래도 다행히 싸움은 일방적이 었다.
애초에 기운의 크기부터, 싸움의 능숙함까지 모두가 서준의 우위일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한데, 그 직후 머지않아 서준의 기운이 또다시 사라졌다.
마치 이 세계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난 듯, 대륙 전체에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괜스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부상을 입은 건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위지강은 황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정도로 약하게 수련시키지 않
지금의 서준이라면 분명 압도적 인 승리를 거머쥐었을 것이다.
위지강은 즉시 상념을 털어냈다.
현재 상태에서는 괜한 걱정보다 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나갈 때 다.
‘고대의 존재들의 세력을 줄이고, 놈들의 위치를 추적한다……
그게 모두를 위한 일이었다.
“이만 출발하도록 하지.”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린 위지강은 서연을 향해 말한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이미 익 숙해진 만큼 서연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죠?”
“어제 객점에서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 백귀야행으로 인해 곤륜파 가 무너졌다는 것이 있었네.”
“고대의 존재와 관련이 있겠네 요.”
“나도 그럴 확률이 높다고 보 네.”
목적지를 확인한 서연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 어난다.
“바로 확인해 봐야겠네요.”
바람 소리와 함께 서연의 몸이 허공에 떠오른다.
이어서 위지강도 허공에 몸을 띄 운 채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고대의 존재와 관련된 존재라면 확실히 말살해 둬야겠지.”
위지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 무리에 휩싸인 서연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위지강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정말…… 성격 하나는 끝내주게
화끈한 편이군.”
위지강은 불과 같은 성격을 가졌 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다.
그리고 어디 가서도 화끈함에 있 어서 누군가에게 밀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는 인간 중에서는 오직 단 한 명, 제자인 서준만이 그를 뛰어넘 을 정도로 급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서연과 같이 다닐수록 그 생각이 점점 바뀌어간다.
“엄청난 집안 내력이야.”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찬 위지강 의 시선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진운을 향한다.
“부디 잘 따라오길 바라마.”
음흉한 웃음을 홀린 위지강의 신 형이 흩어졌다.
서준에게 있어 시련을 받는다는 것은 언제나 고되면서도 기쁨이 동 반되는 일이었다.
고행길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 지만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성장 의 기쁨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바라 마지않을 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인으로서 강해진다는 것을 느 낄 수 있는 충족감은 어떠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종류였기 때문이 었다.
그렇기에 짧은 한숨을 내쉰 서준 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변화한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 휴우......
잿빛뿐인 세계에 놓인 탑의 위용 에서준의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여기가 망각의 시련장.”
능력을 증명받고 망각제의 자리 에 오를 수 있는 탑.
쿠루후와 거래함으로써, 망각의 세계에 숨겨져 있는 이 비밀스러운 세계에 도달한서준은 일대를 가득 매우는 망각의 힘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대체 어떤 시련들이 있으려나?’
망각의 시련장을 지키고 있는 혼 돈인들의 모습을 확인한서준의 눈 에는, 세계의 일부가 지워지는 것 같은 기괴한 감각이 느껴진다.
직후, 인간 여자와 같은 모습을
한 존재가 서준의 눈앞에 섰다.
“호오? 일반적인 수행자가 아니 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오는 잿 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누구인지 굳 이 정체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험관.”
단지 내뱉은 말로 추측한 것이 아니다.
은연중에 풍겨 나오는 망각의 힘 이 그의 존재감을 부풀려주고 있었다.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내는 혼돈
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혼돈제가 정말로 존재하는 거였 군요?”
손 대신 기다란 촉수를 가진 이, 등 뒤에 꼬리와 날개가 솟아있는 혼돈인, 수십 개의 팔을 가진 혼돈 인까지.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었지만, 몸에서 흘러나오는 망각의 힘 은 상당히 강렬한 편이었다.
“다른 황제는 처음 보는 건가 요‘?”
그 질문에 싱긋 웃은 잿빛 머리 카락의 시험관이 서준의 어깨에 얼
굴을 기대온다.
흘러내리는 머릿결 사이로 맑고 기분 좋은 향이 서준의 코 안을 가 득 채운다.
“힘들게 찾아온 손님에게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꼬리와 날개를 가진 혼돈인이 다 소 다급히 서준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시험관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어느덧 형성된 잿빛 방어막이 그 손길을 쳐내버린다.
“탑주님! 제발 조금만 체통을 지 켜주십시오J”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