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권 15화
465화
눈을 휘둥그레 뜬 서준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는 멀지 않은 곳을 응시한다.
“꼬마?”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대로 말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실상은 평범한 꼬마 가 아니었다.
괴이한 기운을 풍기는 붉은 머리 의 꼬마는, 공간을 도약하여 서준
이 응시하고 있던 곳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아마 상당한 강자일 확률이 높 다.
물론, 고작 이 정도로 서준의 시 선을 단박에 잡아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변에서 광기가 넘실거리고 있 어.’
심지어 꽤나 많은 양이다.
여태껏 보고, 싸워 본 이들을 생 각한다면 황제에 올라 있는 이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다.
한데 어리숙해 보이는 꼬마가 그
정도의 광기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고대의 존재의 흔적 도 느껴지고 있고.’
여러모로 정체에 대해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직접 가봐야겠네.”
단숨에 공간의 거리를 좁힌 서준 이 상대의 코앞에 섰다.
“흐익-!”
놀란 꼬마가 거칠게 헛바람을 들 이켜며 손을 휘두른다.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전면을 뒤 덮었지만, 서준은 가벼운 발걸음으
로 회피해낸다.
그렇게 눈앞에서 꼬마를 마주하게 된 서준이 분주히 눈을 굴린다.
‘확실해.’
단순히 광기에 물들 것이 아니 다.
광기를 지배하고, 발아래 두고 있었다.
눈앞의 꼬마가 광기제라는 말이 었다.
물론, 서준만 꼬마의 정체를 파 악한 것은 아니었다.
“뭐, 뭐야……! 왜 소문난 혼돈제
가 여기 있는 건데?”
“광기제를 여기서 마주한 나도 당황스러운데.”
분주히 움직이던 꼬마의 시선이 빠르게 서준의 위아래를 훑는다.
상당히 당황한 모습이다.
이런 곳에서 홀로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일까?
호기심이 고개를 든다.
“이름이 뭐지?”
“카, 카릴, 너는 한서준 맞지?”
몸을 뒤로 살짝 물린 카릴이 조 심스레 입을 연다.
두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하다.
“혹시나 나랑 싸울 생각이야?”
서준은 그를 보며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한편은 아니잖아?”
각자의 정체를 확실하게 확인했 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서준은 이미 위지율과의 대화를 통해 앞서 이야기를 들었다.
주샤콘과 수마나스, 그리고 그를 따르는 광기제들이 천대륙을 침공 해왔다.
그런데 마침 눈앞에 광기제를 마
주하고도 굳이 멀쩡히 보내줄 이유 가 없었다.
‘심지어 황금안의 수련용으로도 적합한 상대지.’
전투에 직접적으로 사용해본 적 은 없지만 확실한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너무 약한 상대여도 안 된다.
‘광기제만 한 수련 상대가 없다 는 거지.’
심지어 광기제 정도라면 쓸 만한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었다.
서준의 가는 눈에서, 분명한 적 의를 읽은 카릴의 두 눈에는 감출
수 없는 곤혹이 어렸다.
“이거 완전히 꼬여 버린 것 같은 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붉은빛 기 운이 카릴의 주변으로 폭발하듯 번 져나간다.
“응?”
서준의 시야가 흐트러지고 곧장 눈앞에 짙은 안개가 피어오른다.
‘도망친다고?’
분위기상 조금 그런 끼가 있더라 니, 역시나 영악한 잔꾀를 부렸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척하면서 도주를 준비했던 것이다.
‘아마 상대가 안 된단 걸 눈치챈 거겠지.’
카릴이 광기제들 중에서 손에 꼽 힐 정도로 강력하다고 하지만, 고 대의 존재마저 사냥했던 서준과 비 교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서준은 전처럼 광기에 사 로잡혀 감정이 폭주할 일도 없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한 번 억눌러 낸 감정을 두 번 억누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본래 상태의 서준이라면 같은 황 제의 싸움이라면 패배할 리가 없었
‘게다가 본래 목표도 내가 아니 었던 것 같고.’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허나 눈앞에 펼쳐진 안개로는 서준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광기의 힘을 이용한 것 같은데.’
결국 시야 가리기에 불과했다.
두 눈을 부릅- 뜨는 것으로 황금 안을 개안해낸 서준은 광기로 빚어 낸 안개를 완전히 통찰해낸다.
직후, 가벼운 손짓으로 광기의
안개구름을 밀어 낸 서준은 저 멀 리 공간이동을 펼치며 달아나고 있 는 카릴을 여유로운 시선으로 바라 본다.
“움직임은 좋네.”
하나 황제라 칭송받기에는 한참 이나 미치지 못한다.
아주 가볍게, 단 세 호흡 정도를 내뱉을 때쯤이었다.
“나한테서 도망가기는 힘들걸?”
어느새 카릴을 추월하여, 앞을 가로막아낸 서준이 말했다.
몸을 흠칫하고 떤 카릴이 미간을 깊게 찌푸린다.
“우선 평화롭게 대화로 해결할 생각은 없어?”
“너희들도 대화로 안 했잖아?”
비릿한 미소를 홀린 서준의 손이 단숨에 카릴의 목덜미를 잡으려 할 때였다.
붉은빛 늑대가 카릴의 어깨에서 튀어나와 서준의 손을 막아선다.
“신기한 능력이네.”
파앗-!
단숨에 그를 찢어발긴 서준의 손 짓이 아쉽게 카릴의 목 끝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 서준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 이 아니었다.
“무결천마, 무극장(武極掌)
서준의 뒤편, 어느덧 지상으로 현현한 황금빛, 무결천마가 내뻗은 손바닥이 카릴의 가슴팍을 향해 쇄 도한다.
“이런……
난감한 듯 신음을 흘린 카릴은 정면에서 날아오는 무극장을 바라 보고는 자신의 팔뚝을 강하게 베어 문다.
핏물을 허공으로 흩뿌리자, 기이 한 형태의 괴수들이 무수히 서준의
시야를 뒤덮었다.
당황스러운 사태였지만, 서준의 황금빛 눈동자는 소환수들을 통찰 해낸다.
‘필요 없는 정보들은 걸러낸다.’
가장 바라는 것, 지금 전투에 필 요한 것들만을 받아들인다.
그러자 밝게 빛을 토해내는 소환 수들의 심장, 핵이 단박에 시야에 들어온다.
후웅-!
가벼운 발길질로 괴수들을 찢어 발겨 낸 서준은 반항하려는 카릴의 턱을 가격하여, 입을 강제로 닫아
내고는 그의 목까지 가볍게 움켜쥐 었다.
“커헙......!”
신음을 토하는 카릴을 들어 올린 서준이 손을 놓고는 뒷짐을 진다.
무결기를 바탕으로 펼친 허공섭 물의 힘이 카릴의 육체를 들어 올 렸다.
“재미있는 능력을 쓰네, 피를 제 물로 바쳐 소환수를 불러들이는 건 가?”
과거, 서준도 스스로를 소환사라 칭한 이들을 이따금씩 만나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방금 본, 카릴의 능력은 마치 그런 소환사들과 같았다.
때문에서준은 카릴의 공격에 대 처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카릴이라고 했지? 몇 가지 질문 에 답해줄 생각 있어?”
“성실히 답하면 그냥 보내줄 거 야?”
“그럴 리가.”
서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은 안 하는 편인가 보 네.”
“어차피 안 믿을 거잖아, 애초에 질문을 주고받는 걸로 시간을 벌어 머리를 굴려 잔꾀를 낼 수 있는, 서로가 손해 볼 게 없는 거래니까. 거절할 리도 없을 거고.”
“하, 반박할 수가 없네.”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린 카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사로잡힌 이상, 서준의 손 아귀를 벗어나기란 힘들다.
질문을 이어나가며 조금이라도 틈을 찾아보는 것이 현재 카릴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으니, 거절할 도리도 없었다.
“우선 첫 번째 질문.”
질문과 함께 여유롭게 팔짱까지 낀 서준의 입이 다시 한번 열린다.
“위지율 님한테 대충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본인들에게 듣는 이 야기만은 못하겠지. 천대륙에는 무 슨 일로 왔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자세히는 몰라.”
서준의 질문에 카릴이 고개를 내 젓는다.
“이곳에 온 이유를 모른다고? 설 라..”
애초에 고대의 힘을 받은 황제들 은 고대의 존재들의 손아귀에서 벗 어날 수 없었다.
이 말은 즉, 어디서 무엇을 하든 이들에게 제대로 된 목적을 가르쳐 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간의 여정들로 추측을 해보면…… 가장 우선시되는 건 심 연을 불러들이는 거일 거야.”
그사이 눈을 굴린 카릴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눈치가 빨라. 방금 전, 죽을 뻔 한 위기를 한 번 넘겼어.”
서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물을 정보가 없다면 살려줄 이유가 없다.
때문에서준의 머릿속에서는 카 릴의 죽음이 매우 가까워져 있었다.
심지어 그의 음성에 확신이 어려 있지 않았다면 분명 곧장 심장을 꿰뚫어 버렸을 것이다.
단순한 추측은 제대로 된 정보로 서의 가치를 가질 수 없으니 말이 다.
동시에 이로써 질문이 끝난 이후 에 카릴을 확실히 죽여야 할 이유 가 늘었다.
목적을 눈치채고 있다는 걸 알면
분명 그에 따른 방비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웃기네, 성실하게 대 화를 이어 갈수록 죽음이 가까워지 고 있네.”
“눈치가 빠른 편이라 대화하기는 편하네, 내가 할 질문도 예상이 가 지?”
“앞으로의 정복 방식은 어떤 식 으로 진행되는지 물어보겠지.”
“정확했어.”
“시작은 같지만 이후의 방식은 매번 달라져, 이번에는 어떤 방식 으로 진행될지 알 수 없다는 거지.”
서준은 카릴의 뻔한 헛수작과 같 은 말을 굳이 끊지 않았다.
“굳이 예외를 두자면 수마나스 님 정도는 알고 있겠네, 아니지, 함께 움직인 만큼 주샤콘 님도 알고 있을 수 있어.”
“결국 모른다는 말을 돌려서 하 고 있는 거네?”
“가능성들은 몇 가지 알고 있지,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다소 상념에 잠긴 듯 짧게 답한 카릴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선 심연을 퍼뜨려 절망을 안 겨준 뒤에 광기를 뿌리겠지만 이번
의 경우에는…… 크악-!”
단숨에 손을 휘둘러 방심하고 있 는 카릴의 팔을 자른 서준이 웃음 을 보였다.
“경고야. 난 그리 인내심이 좋지 가 않아. 잡설이 길어진다 싶으면 다음에는 반대쪽 팔이다.”
“크흐흐…… 냉정하네. 마치 고 대의 존재님들을 보는 것 같아.”
“비교하지 마. 기분 나쁘니까. 팔 하나 더 자른다.”
“아아, 미안. 미안해.”
“분명 잡설이 긴 거는 싫다고 말 했을 텐데, 2차 경고 간다?”
서준의 말에 눈을 딱딱하게 굳힌 카릴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마치 이곳을 심연 그 자체로 만 들려드는 듯한 느낌이야, 상당히 특별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지.”
“심연으로 만들려 한다라.”
턱에 손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게 가능해?”
“여태껏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 지, 그런데……
서걱-!
서슬 퍼런 소리와 함께 카릴의
남아있던 팔이 날아갔다.
“2차 경고. 본론에만 대답해.”
“크으으…… 대기 중에 느껴지는 광기와 어둠, 사실 이미 눈치채고 있지 않아?”
“만들 수 있겠네.”
머릿속으로 카릴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서준은 한 차례 고개를 주 억였다.
“과연 심연을 불러들이며 어둠을 다루는 입장에서 수마나스가 두려 워할 거는 아무것도 없겠네, 그러 면 일반적으로 심연을 불러들이는 데 얼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해서 카릴은 입가로 묘한 웃 음을 흘리고 있었다.
서준 역시 입가로 미소를 그렸 다.
어느덧 주변으로는 붉은빛 기운 이 마치 거센 해일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열심히 준비하던 게 끝났나 보 네?”
“곧장 날 죽이지 않은 거, 후회 하게 될 거야.”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
콰과광-!
폭음과 함께 솟구치던 해일 사이 에서 붉은빛 괴수들이 마구잡이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