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권 14화
464화
코웃음을 친 캬주가 빠르게 돌진 하며 꿰뚫을 듯 내뻗은 창에 붉은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광기 격살.”
붉은 창이 흡사 채찍처럼 휘둘러 지며 사방에서 공격을 해온다.
그를 가볍게 피한 서연이 코웃음 을 치며 발을 내딛자 주변으로 아 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공허가 단숨 에 캬주의 전면을 뒤덮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변한 시야에 캬주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순간이었다.
“참 웃기지 않아? 원초적이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 알고 있으면서 따르지 못한다는 게.”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놀란 캬주 가 창을 휘두르자 광기가 휘몰아친 다.
콰과광-!
애꿎은 안개만을 갈라 낸 캬주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최소한의 동선으로 최고의 효율 을 내기 위해서 규칙적으로 움직이
고 있어, 결국 너도 규격에 얽매여 있다는 거지.”
“닥쳐라!”
또 한 번 휘둘러진 창이 안개 너 머에 숨어 있는 서연의 형상을 꿰 뚫는다.
하나 여전히 손끝에 걸리는 감각 은 없다.
오히려 안개 너머에서 사람의 손 이 튀어나온다.
튀어나온 손은, 마치 뱀과 같은 움직임으로 창을 타고 오르더니 단 숨에 캬주의 손목을 낚아채 꺾어버 리며 창올 내던진다.
.....
놀란 캬주가 다급히 반대편 손을 내뻗으려 했지만, 그 순간 창이 허 공에서 일어난 회백색의 균열에 집 어삼켜지며 모습을 감춘다.
‘공허!’
정복왕의 사도, 한서연은 공허의 힘을 다룬다.
그 사실을 문득 깨달은 캬주가 호홉을 짧게 들이켤 때였다.
“공허장(空虛掌), 제1식, 흡수(吸 收)
손목을 타고 목젖까지 치고 올라
온 서연의 손에서 회백색의 기운, 공허가 폭발하듯 치솟아 캬주의 육 신을 집어삼킬 듯 다가온다.
“어림없다……1”
까드드득-!
이를 악문 캬주가 눈을 부라리며 서연의 손바닥을 거세게 쳐낸다.
빨려들지 않는다.
“상당히 끈질기긴 하네, 근데 아 쉽게도 이제 시작에 불과해.”
어느덧 얼굴을 완연히 드러낸 서 연이 피식- 미소를 흘린다.
“난 무인이거든, 초식은 이어지
는 법이고 1장은 시작에 불과해, 공허장, 제2식, 포식(能食)”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 직인다.
밀어낸 손바닥에서부터 솟아난 거대한 회백색의 기운이 삽시간에 펼쳐지며 캬주의 전신을 뒤덮어낸 다.
“끄어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핏물을 쏟아내는 캬 주가 기운을 일으키자, 입고 있던 검은 갑주에서부터 칠흑과 같은 어 둠이 일어나며 회복을 시작한다.
심연의 어둠은 놀랍게도 서연이
펼친 공허장의 힘을 밀어내기 시작 했다.
강렬한 어둠이 사방을 뒤덮으며 서연을 밀어내는 것도 순식간이다.
“심연의 기사는 죽지 않는다! 영 원히! 패배하지 않는 불패의 기사 다!”
공허에 잡아먹혀 육신이 반쯤 사 라진 캬주의 괴성은 하늘을 울렸다.
사라졌었던 창은 되돌아오며 그 의 손에 잡혀 붉은빛을 토하기 시 작한다.
서연은 코웃음을 친다.
“너를 비호하는 심연, 광기에 물
든 창, 결국 네 힘은 온전한 본인 의 것이 하나도 없는, 빌려온 거라 는 거지, 결국 딱 그 수준에 불과 하다는 거야.”
“크크, 잘난 듯 떠드는 네놈 또 한 정복왕의 힘을 빌려 사용하는 사도이면서 유세를 떠는구나.”
“난 너처럼 빌려온 힘에 기대며 안주하지는 않거든, 어차피 말해줘 도 이해 못 하겠지.”
“증명할 수 없기에 도피하는 것 에 불과하겠지, 이만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도록 하지.”
심연의 기사.
그 이름처럼, 다시금 검게 물든 캬주가 창을 내지르려는 순간이었다.
“착각하지 마, 이미 싸움은 끝났 어.”
서연이 손에 묻은 캬주의 핏물을 허공에 흩뿌린다.
바닥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회 백색의 기운은 그간 캬주가 흘린 핏물을 흡수해내고 있었다.
“공허는 한번 인지한 먹잇감을 절대 놓아주지 않아, 제3식, 소멸 (消滅).”
바닥, 회백색의 소용돌이에서 촉
수들이 치솟아 오른다.
그 짧은 시간, 다급함을 느낀 캬 주는 바닥의 회백색의 기운을 꿰뚫 으려 한다.
“크아악-!”
허나 너무 늦은 판단이었다.
쿠구궁-!
개방된 공허의 문, 활짝 열린 회 백색의 균열에서 솟아난 촉수들에 캬주의 육신이 사로잡힌다.
“이, 이건……!”
놀란 캬주가 외친 순간, 서연은 회백색의 균열 뒤에서 비릿한 미소
를 흘린다.
“말했잖아. 내가 이겼다고.”
“놔, 놔라!”
강하게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무 의미한 발악에 불과했다.
이미 공허는 캬주를 먹잇감으로 인식했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떨쳐내고 싶어도 떨쳐낼 수 없 는, 강한 구속감에 캬주의 눈이 부 릅- 뜨였다.
“아쉽겠어. 공허에는 심연이 존재하지 않거든.”
“끄아아아악—!”
사라진 한쪽 다리.
끔찍한 고통과 함께 찾아온 죽음 의 위기에 캬주의 눈이 공포로 물 들기 시작했다.
“끝이야!”
서연이 비릿한 미소를 홀리며 완 전히 개방된 공허의 문을 바라보았다.
심연의 기사가 가진 불패의 신화 는 부서졌다.
넝마가 되어 회복되지 않는 육신 을 부여잡고, 촉수들에 사로잡힌 채로 더 이상 어찌 대항할 방법도 찾지 못한 채로 몸을 떨고 있었다.
간절한 눈동자를 한 캬주의 시선 이 서연과, 육신을 집어삼키고 있 는 끔찍한 공허를 향한다.
“정복왕의 사도……
“위지율 언니는 어디 있지?”
서연은 얼음장과 같은 목소리로
캬주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후 손을 들어올리며, 캬주의 육신을 더욱더 깊은 공허로 끌어당 긴다.
콰드득-!
무언가 뒤틀리고 씹어 삼켜지는 소리와 함께 캬주의 육신이 공허에 사라져간다.
“꾜아아악-!”
아무런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하반신을 모두 잃은 캬주의 눈에 어린 공포가 더욱 커졌다.
기회를 넘보며 창을 쥐고 있던, 캬주의 손에도 더 이상 힘이 들어
가지 않는다.
“어설픈 짓 하려 하지 마, 이미 내가 이긴 싸움이야.”
“끄으읍……
캬주가 머리를 떨어트리고는 아 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결과에 납득하기가 힘든가? 정 복왕의 사도라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명성도 떨치지 못하고 있는 풋 내기한테 패배한 게 어지간히도 화 나는 것 같은데, 그러면 이기지 그 랬어?”
조소를 머금은 서연은 손을 내저 어 캬주의 오른쪽 어깻죽지마저 공
허로 끌어당긴다.
콰드득-!
“꾜읍-!”
“결국 스스로 무언가를 일궈내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된 거야, 아무리 명성이 드높든, 칭 송받든 네가 스스로 이뤄낸 건 없 었잖아.”
“말…… 말해주마.”
공허의 틈새에 끼어 허우적거리 는 캬주가 서연을 올려다보며 말한 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어떠한 전 투의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답은 괜찮은데, 말투가 마음 에 안 드네.”
느긋한 걸음을 옮겨, 이제는 운 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캬주의 바로 앞에 선 서연이 차가운 목소 리를 내뱉는다.
“예의라는 것을 가르쳐 줄게.”
“잠…… 잠시. 네가 궁금해할 것 들을 모두 말해 줄 수……
콰득-!
“꾜아아악-!”
상반신이 모두 공허로 빨려 들어 가버린 캬주가 몸을 크게 떨며 비
명을 내질렀다.
“아직도 자신의 처치를 모르겠 어‘?”
콧김을 거칠게 내뿜은 서연이 곧 장 캬주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렸 다.
“서연.”
공포에 물든 캬주가 몸을 사시나 무처럼 떨고 있을 때, 위지강의 목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동착을 멈춘, 서연의 시선 이 위지강을 향한다.
“적당히 봐주고 넘어가자고 하시 려는 건 아니겠죠?”
미간을 찌푸린 서연의 표정을 본 위지강이 고개를 내저었다.
“시간이 아깝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서연은 고 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네요, 이런 놈이 저 희한테 제대로 된 정보를 줄 리가 없을 텐데.”
“끄으읍…… 끄으으읍……
더 이상은 음성조차 나오지 않는 지, 신음만을 홀리는 캬주의 곁에 주저앉은 서연이 피투성이가 된 그 를 바라본다.
자신감이 가득 차 있던 눈동자는 죽은 지 오래다.
“우리를 건드린 대가로 너는 이 제 영원히 공허 속에서 고통받게 될 거야.”
“꾜으읍……
“이제야 죽음이 두려워? 하지만 이미 늦었어, 누군가를 죽이려 했 다면 너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거잖아?”
캬주가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다.
서연의 눈동자에 맺힌, 죽음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수마나스를 따라다니며 죽 이고 파멸시켜 온 이들도 같은 공 포를 느꼈을 거야.”
“제…… 제에……발.”
“잘 가, 고통뿐인 세상으로.”
쾅-!
서연이 가볍게 손을 내젓는 순 간, 공허가 캬주의 육신을 집어삼 킨다.
이미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그 의 육체를 끌어당겨내는 것은 이 전에 비하여 훨씬 더 쉬웠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싸늘한 죽
음.
그를 말없이 내려다본 서연은 발 걸음을 돌렸다.
그 시각.
서준은 위지강이 숨겨놓은 지하 왕궁에서 천 대륙의 지상으로 향하 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수련은 무의미해.’
그저 황금안을 유지한 채로 주변 을 바라보는 것까지는 계속해서 유 지를 할 수 있었다.
허나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되었다.
황금안을 개안하여 적을 통찰한 상태로 전투를 이어나가야 한다.
위지율의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수련을 도와줬겠지만 아쉽게도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때문에, 서준은 적합한 수련 상 대를 찾기 위해서라도 지상으로 나 가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상으로 나 가는 데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소모되고 있었다.
‘올 때는 금방이었는데 나갈 때 는 한참 걸리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위지율과 혁련 무강은 몸을 전부 회복하지 못한 탓에 계속 지하도시에 숨어있는 상 태였다.
길잡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없 다는 것이다.
심지어 유일하게 아는 탈출구라 할 수 있던 지름길은 주샤콘이 등
장하며 파괴되어 버리기까지 했다.
때문에 거의 지구 몇 바퀴를 도 는 정도의 동선이 소비되었다.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면 그조차 도 순식간이었겠지만 서준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만전의 상태를 유지해둬야 해.’
만약의 때에 대비하여, 전투력을 보존해둬야 한다.
아광속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걷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 이 없는 탓에 큰 불편함을 느꼈다.
더군다나 혹시 돌아왔을지도 모 를 스승, 위지강과 서연의 걱정 때
문에 더욱더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 에 없었다.
고된 여정 끝에 지상으로 돌아오 는 데 성공해냈지만 애석하게도 대 륙을 에워싸고 있는 검은 기운 때 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느낄 수 없 었다.
“점점 느낌이 좋지가 않네.”
수마나스가 심연을 불러들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헌데 이렇게 눈에 띌 정도로 빠 르게 퍼져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 각하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 것 같은데.’
하지만 다급하다고 해서 곧장 수 마나스를 마주하러 갈 수는 없었다.
단순히 패배를 염두에 둔 것만은 아니었다.
황금안의 사용에 익숙해질 때까 지 수마나스와의 전면전을 피하기 로 위지율과 약속까지 해버린 상황 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 기로 해버렸으니……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최우선의 과제는 황금
안에 적응하는 것이다.
‘수련을 해가며 싸울 수 있는 적 당한 상대가 있으면 좋겠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행운이 넙죽 찾아올 리가 없었다.
“직접 발로 뛰어서 찾아보는 수 밖에 없겠지.”
생각해보면 어차피 스승님이랑 서연이도 찾아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서준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며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