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권 8화
458화
“그…… 그……만.”
발악을 하고 있던 혁련무강의 육 신이 실 풀린 인형처럼 늘어진다.
“두려워할 거 없다, 충실한 광기 의 종이 되는 것이다.”
하늘로 치솟는 붉은 기운, 광기 의 힘이 혁련무강의 전신을 휘감는 다.
허나 애석하게도 치솟은 광기는 혁련무강에게로 쏘아지지 못했다.
손으로 사로잡고 있던 혁련무강 의 육신이 황금빛 마법진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주샤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법?”
물론, 일반적인 마법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육신 자체를 강제로 이동시킬 수 있는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 빌어먹을 수호룡 년!”
주샤콘의 입가로 차가운 웃음이 번졌다.
‘잔머리를 썼군.’
시선을 돌려 황폐하게 변한 주변 의 풍경을 바라본다.
널브러져 있던 위지율이 보이지 않는다.
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던, 한서준의 모습 역시 사라졌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나쁠 것 없 지.”
서준에게서 되찾은 광기의 힘은 어느덧 가루처럼 홑어져 주샤콘의 몸에 흡수된다.
이번 출정은 빼앗길 뻔한 광기의
근원을 되찾은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어차피 놈의 소멸은 시간문 제에 불과했다.
“다시 볼 날이 기대되는군.”
가볍게 흥얼거리며 말한 주샤콘 의 신형이 다시금 빠르게 검은 회 오리의 형체로 변화하며 자취를 감 췄다.
서준은 아주 긴 잠에 들며 꿈에 취했다.
꿈속 세상에서 서준은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웃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꿈이 었지만 기이하게도 눈물이 날 정도 로 행복했다.
하지만 꿈은 꿈에 불과할 뿐이었다.
서서히 돌아오는 감각들이 현실
로 서준을 이끌어낸다.
과정 속, 행복했던 시간마저 빼 앗아간다.
그토록 행복했는데, 기억조차 나 지 않는 괴팍한 꿈으로 변해버리는 순간이었다.
“크읍-!”
눈을 뜨려고 하니 몸 곳곳에서 격렬한 고통이 찾아왔다.
머리가 띵하고 울려오며 내부의 장기가 부서질 듯 아려온다.
힘겹게 들어 올린 눈꺼풀 틈새로 보이는 시야는 너무나 흐릿하다.
그제야, 이전까지 있었던 현실이 떠오른다.
‘광기제.’
광기의 힘을 다루는 황제와 싸웠 다.
‘위험했어.’
직접적인 전투 능력은 그리 위협 적이지 않았다.
허나 어떤 의미로는 지금까지 만 난 어떠한 적보다도 위험했다.
때문에 폭발하려는 감정들을 억 누르기 위해 배수의 진을 칠 수밖 에 없었고, 힘겹게 광기제를 쓰러
트렸다.
그 결과 서준은 위지율을 구해냈 다.
그리고 광기의 힘이 넘실거리는 황제의 심장을 쥐었다.
고대의 존재에게 되돌아갈 것을 우려하여 광기의 힘을 홉수하려던 그 순간, 당시가 떠오른 서준의 전 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주샤콘.’
아니, 이 소름 돋는 감각은 주샤 콘에게서 느낀 것이 아니었다.
‘또 누가 있었어.’
혼돈, 서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힘에 자연스럽게 동조되어 있는 그 힘을 부풀리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단지 직감적인 느낌일 뿐이지만 차원의 틈새 속, 눈웃음을 지으며 지켜보는 시선이 이제 와서는 분명 히 떠올랐다.
‘만약 그 상태로 광기를 홉수했 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행운인지, 불행인지 서준은 광기 의 힘을 취하지 않았다.
주샤콘이 나타나며 서준을 밀쳐 내고는 광기의 힘이 담긴 심장을
빼앗아 간 덕분이었다.
‘주샤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며, 흩어졌 던 기억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 간다.
동시에 의문이 피어난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다행히도 이어지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 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두운 동굴 속, 몸을 웅크린 채 숨을 가다듬고 있던 상대의 황금빛 눈이 스르륵 뜨인다.
빛이 꺼져버린 시선.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 끼는 동생에게 원망을 듣고 싶지는 않거든.”
그의 말에서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위지율을 구해주기 위해 간 것이 었다.
그런데 주샤콘의 등장 이후 곧장 정신을 잃어버렸다.
도움을 주러 가서 오히려 받아버 렸다.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미안해할 거 없어, 어떠한 존재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는 법이니까.”
서준의 말에 입가에 호선을 그린 위지율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어두운 동굴 속이고, 서준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잘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위지율의 몸은 넝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몸 곳곳에는 크고작은 상처들이 벌어져 있었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은 황금의 눈에는 힘이 빠
져 있었다.
생기가 넘치던 육체는 말라비틀 어진 나뭇잎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조금 어리숙하긴 했지만 결국 네가 날 구해준 것도 사실이 니까.”
서준의 앞으로 다가온 위지율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한다.
“너는 광기제로부터 나를 구했고 나는 주샤콘으로부터 너를 구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서로에게 빚진 거는 없다는 거지.”
혼잣말을 잠시 웅얼거린 위지율 이 분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애초에 내가 몸 상태만 정상이 었어도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 을 텐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까요?”
서준의 요청에 위지율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계획적이었어, 위지강과 서연이 가 차원을 떠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주샤콘과 수마나스가 군단을 이끌고 공격을 해왔어, 치사한 새 끼들.”
욕을 내뱉은 위지율이 서준의 앞
에 털썩, 주저앉았다.
“계속 서연이의 수련을 도와주느 라 지친 상태만 아니었다면 시간 정도는 끌 수 있었을 텐데, 남은 마력으로는 도망치는 것도 버거웠 어.”
서준은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가 는 위지율을 바라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궁금한 것들 이 없지는 않았지만 입을 열기조차 너무 힘들어서 질문을 할 수가 없 었다.
주변의 기운을 끌어들여, 몸을
회복하려 하고 있었지만 상태가 너 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상대의 조합도 좋지 않 았어, 어둠을 몰고 다니는 주샤콘 과 어둠을 다루는 수마나스였으니 까 말이야.”
직후, 서준을 곁눈질로 바라본 위지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최고이자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조합인 만큼, 아무리 급하다 할지 라도 침착하게 상대해야 해, 무작 정 전면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는 거지.”
위지율의 말을 듣던 서준은 괜스
레 차오르는 불안감에 질문을 던졌 다.
“……스승님과……서연이는요?”
“나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어.”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위지율이 고개를 내저었다.
“짐작 가시는 게 있으실 거잖아 요.”
계속해서 차오르는 불안에서준 이 간절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진다.
“아마…… 놈들의 계획대로 홀러 간다면……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위지율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만으로 어느 정 도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서준이 입술을 깨물며 주먹에 힘 을 쥘 때였다.
“주샤콘과 수마나스의 목적은 세 계에 어둠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것만 막아낼 수 있다면 현재 저 희가 가정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을 겁니다.”
위지율의 뒤편에서 다가온 혁련 무강은 서준을 내려다보며, 한 손 에 들고 있던 거대한 멧돼지를 바 닥에 내려놓는다.
“무슨 말이죠?”
질문에 답하기 전 복잡한 시선을 한 혁련무강이 위지율을 바라본다.
이어진 시선, 위지율은 결국 고 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위지율은 처음 서준을 마주하게 됐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 일 수밖에 없었다.
‘직접적인 일면식은 전혀 없는
머지않은 과거 위지강의 부탁에 따라 한 소녀에게 연락을 전해주기 위해 변방의 자그마한 행성에 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정에서 예상치 못한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태초의 수호룡, 용족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존재로서 살아온 위지 율은 우주 전체에 있어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다.
때문에 어떠한 종족과도 교류하 지 않았고, 고고하게 살아온 존재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긴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던 도중, 한서연이라는 작은 소녀를 만났고, 같은 주제로 빠르게 친해지고 서로 의 상처를 보듬으며 둘도 없는 자 매가 되었다.
때문인지 사력을 다하여 서연을 도와주고 싶었다.
실제로도 위지율은 방대한 마력 이 고갈될 정도로 오랜 시간 수련 을 도왔다.
그래도 유의미한 성과를 내어, 만족감을 느끼며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려던 때쯤에 고대의 존재들에 게 습격을 당하게 되었다.
정면승부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들.
그런데 수적 불리함, 최악의 몸 상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광기의 힘은 위지율과 성역에 남아있던 위 지강의 사도를 허망하게 무너트렸 다.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위지율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위 지강에게 소식을 전해줄 수 있는 성역의 사도들을 안전한 곳으로 전 이시켜 냈다.
그를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끔찍했다.
고대의 존재들의 손에 무참히 쓰 러져 정신을 잃고, 사로잡히게 되 었다.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말해줄 수 없었기에 위지율은 광기제에게 사 로잡혀 꽤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고문을 당했다.
광기제는 수십 가지의 방법을 모 두 사용하여 위지율을 망가트리려 했다.
그중에는 위지율의 성별체가 여 성이란 것을 이용한 추악한 방법들
도 존재했다.
본래 태초의 수호룡미라 칭송받 던 만큼 그녀의 정신력은 고작 그 딴 상처와 고통으로 무너트릴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문제는 광기제의 주변에서 흘러 나오는 광기의 힘.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고 미쳐버 리고 싶다는 욕구가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를 찾아왔다.
위지강과의 계약을 끊어내고, 광 기의 종이 된다.
그뿐이면, 단지 그것이면 충분하 다.
지독한 유혹 속에서 그녀의 정신 을 온건히 유지해준 건, 아주 먼 과거에 했었던 고리타분한 약속이 었다.
본인이 죽더라도, 무너지더라도 지켜주기로 했던 작은 소년과 세계 만은 지켜야 한다.
참으로 강한 집념이었다.
광기의 힘을 발산하는 광기제도 몇 번이고 놀랐을 정도로 말이다.
곧 찾아올 죽음이라는 편안함만 을 떠올리며 억지로 견뎌가고 있었다.
하나 결국 끝은 정해져 있었다.
끔찍한 고통, 쉴 새 없이 머릿속 에 울려 퍼지는 광기의 목소리는 결국 위지율의 정신을 무너뜨렸다.
포기하겠다고, 허망한 눈빛으로 왕궁의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 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왕궁이 뒤흔들린다.
놀란 광기제는 다급히 위지율을 안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상황의 변화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변화가 가져다줄 희망에 기대 고 싶었다.
‘아무나 좋으니까.’
이 지옥에서 자신을 구해주길 간 절히 바랐다.
그리고 이런 간절한 염원이 닿은 것일까?
눈앞에 전혀 예기치 못한 존재가 자신을 구하러 와주었다.
‘한서준.’
위지율은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이 아니었다.
‘ 이건......
이곳에 한서준이 당도하게 된 것
은 단순한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었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단 한 번밖에 느껴보지 못했지만, 너 무나도 강렬했기에 명확하게 기억 하고 있었다.
‘운명의 이끌림.’
혹은 운명의 초대라 칭하고 있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