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권 7화
457화
이상할 정도로 시야가 흐릿하고, 흔들린다.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세계를 뒤 틀어 놓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크히, 크히히-! 네놈이 한서준 이구나. 생각보다 멍청하잖아, 죽어 버려!”
붉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상대가 괴상한 웃음을 홀리고는 곧 고함과 함께 붉은 섬광을 쏘아 보냈다.
혼돈인들이 쏘아내던 섬광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어떠한 요령이나 기술 따위는 전 혀 보이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기운이 과하게 응 축되고, 마구잡이로 뒤섞여서 쏘아 내는 느낌이었다.
때문에서준은 그 힘을 다소 무 시했다.
‘굳이 막아야 하나? 몸으로 맞아 도 조금 아픈 게 끝일 것 같은데.’
평소라면 절대 내리지 않을 판단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어차피 힘의 차는 역력하다.
놈의 장단에 맞춰가며 여유롭고 느긋하게 가지고 놀다가 위지율을 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직후, 앞으로 달 려 나가고 있는 서준의 뇌리를 스 쳐 지나가는 생각이 존재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 지?’
이미 한번 방심한 탓에 성채에 접근하는 것이 노출되었다.
끔찍한 유희, 적을 농락하고 죽 이며 일대를 피로 물들일 생각만 하고 있었다.
스스로 답지 않은 부끄러운 생각 이 이어져서일까?
지금의 스스로가 묘하게 뒤틀려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니,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후웅-!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붉은 섬광 을 피한서준의 입에서 깊은 숨이 터져 나온다.
“허업-!”
그 즉시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 각들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때가 되어서야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엄청난 광기에 물들 어 있었다.
눈앞의 대상들의 고통을 즐기고 농락할 생각만 떠올랐다.
지금 당장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왕궁에 둘러진 광기를 마주한 그 순간부터……
뒤틀린 유희를 즐기려고만 하고 있었다.
본래의 목표 따위는 뒷전이 되어 버리고 오롯이 욕망을 위해서만 움 직여가고 있던 것이다.
서준은 이와 비슷한 상황을 이미 느껴본 적이 있었다.
혼돈의 시련, 그때와 같이 부정 적인 감정이 폭발하고 있었다.
“재미있네, 이게 광기가 가진 힘 인가 보네.”
고대의 힘 중 한 가지, 광기.
그 힘을 떠올리며 던진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눈앞의 붉 은 로브의 혼돈인은 등을 돌려 달 아나기 시작했다.
비효율적이면서도 기이하고 뒤틀 린 발놀림.
하지만 그 뒤를 바짝 쫓아서 손 짓을 해도 마지막에 와서는 시야가 흐릿해지고 뒤틀리며 허공을 내저 을 뿐이다.
이런 무의미한 술래잡기마저도 흥미가 동하며 즐겁게 느껴진다.
‘집중해야 해.’
서준은 계속해서 뒤흔들리려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집중력을 올린 다.
놈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 한 장막이 둘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장막의 주체는 광기 다.
서준은 지금까지 얻어 낸 정보를 빠르게 정리해나간다.
‘눈앞의 적은 이름 모를, 광기제.’
냉정하게 말하자면 실력은 참으로 보잘것없을 수준이다.
이런 능력 하나로 위지율을 이겼 을 리는 없다.
광기의 힘을 다루는 고대의 존재 들이 위지율을 공격하여 기절시킨 후 눈앞의 광기제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다.
문제는 놈이 품고 있는 광기의 힘의 크기였다.
당장이라도 팔을 내뻗어 닿을 것 같았지만, 닿지 않는다.
“고대의 존재도 아닌데……
서준은 지속적으로 뒤틀리고 있 는 세계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혼돈의 시련 때와 마찬가지로 강 력한 정신력으로 버텨내려 하고 있 었지만, 오히려 당시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광기에만 신경을 써버리면 내 안의 혼돈이 폭주하려 해.’
혼돈이 품은 부정적인 감정은 완 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서준을 괴롭힌다.
혼돈, 광기, 파괴, 망각.
뒤섞인 감정들이 계속해서 마음 을 뒤흔든다.
포기하면 편해질 것이다.
모든 것을 부숴라.
세계를 지워내는 것이다.
필멸자들의 시간은 일순간에 불 과하다, 유희거리로 삼는다 할지라 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저 본래의 순리를 되찾아갈 뿐 이다.
설사 지키지 못하여 소중한 이들
이 죽게 된다 할지라도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애써 지킬 필요 없다.
부정적으로 생각들이 서준의 뇌 리를 계속해서 찌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폭발하는 감정 을 억누르느라 움직임을 멈출 수밖 에 없었다.
‘짜증 나네.’
갑작스레 중원 대륙으로 차원 이 동이 된 날부터, 단 한 번도 포기 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진정으로 바라는 것, 목표를 달 성하지 못한다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지금에 와서 이 거대한 감 정에 휘둘리는 것은 무엇일까?
‘그만큼 내 안의 혼돈이 폭주하 고 있었다는 거겠지.’
제법 잘 억누르고 있는 듯했지 만, 마음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감정이 기회를 틈타서 폭발하고 있 는 것이다.
어느덧 서준의 감정은 주체되지 않고 폭발하려 하고 있었다.
붉은 로브의 광기제는 곁눈질로 서준을 보고는, 비웃음을 보이며 달려 나간다.
그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지만 쫓을 이유가 없다.
어차피 모든 것을 순리대로 돌린 다면 저런 도주가 아무런 의미 없 기 때문이다.
“쓰레기 같은 놈……
스스로를 타박한서준은 내부에서 무결기를 이끌어내어 내부의 혼 돈기와 충돌시킨다.
쾅-!
“커헙-!”
강렬한 폭음과 함께 가슴 한편이 아려오며 입가로 핏물이 쏟아져 내
내장이 억눌림에 따라,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찌릿찌릿 자극한다.
치명적이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큰 부상.
이런 부상을 입어 본 적이 언제 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지만, 오히려 이편이 나았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서준의 입가로 미소가 흘렀다.
힘의 충돌에서 패배를 맞이한 혼 돈기가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었다.
더 이상 혼돈이 폭주할 일은 없 다.
광기만을 억누르는 것은 그리 어 려운 일이 아니다.
혼돈의 시련을 받은 이후, 서준 은 늘 혼돈을 억눌러가며 살아왔다.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시한폭 탄을 안고 있는 듯한, 위태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고작 광기 따위에 먹힐 리가 없 잖아.’
어느덧, 눈앞에 다시 날아온 붉 은 섬광을 비틀거리는 몸으로 피한서준의 몸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환 하게 물들었다.
‘초광속.’
파앗-!
부서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부 여잡아내며, 전력을 쏟아붓는다.
놀란 광기제가 돌아보며 붉은 섬 광을 연달아 쏘아 보냈지만 서준은 이미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무결천마, 심검.”
만들어진 마음의 검은 광기제의
한 팔을 잘라내며, 떨어지는 위지 율을 받쳐낸다.
적을 농락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한 번이라 도 공격당하면 죽는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 발악하듯 손을 휘젓는 광기제의 등 뒤를 점 하고는 단숨에 심장을 꿰뚫어 낸다.
콰직-!
붉은 눈동자를 부릅- 뜬 광기제 를 향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를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서준 은 망설임 없이 광기제의 심장을
뽑아 들었다.
촤악-!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허나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크흡-!”
제자리에서 무너지듯 쓰러지며 핏물을 다시 한번 뿜어낸 서준의 시선은 자신의 심검들을 바라본다.
한 자루는 깨어나려는 듯 조금씩 움직임을 보이는 위지율을 받쳐내 고 있었다.
다른 심검에는 광기제에게서 뽑
아낸, 광기의 힘이 넘실거리고 있 는 심장이 매달려 있었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힘의 근원을 흡수한다면 광기의 힘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서준은 광기의 힘이 진하게 느껴 지는 심장을 손에 쥐어 잡았다.
의심할 바도 없었다.
‘이게 광기의 근원이야.’
손에 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광 기들이 차오른다.
죽음의 위기에서조차, 그저 살육 과 유희를 바라는 욕구가 치솟아 올라온다.
허나 쉽사리 손을 댈 수는 없었다.
‘흡수해도 될까?’
지금 몸 상태는 최악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도리어 잡아먹힐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파지직-!
고민하는 사이, 광기제가 영멸함 으로써 갈 곳이 사라진 광기의 힘 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 상태로 내버려둔다면 아마 높 은 확률로 다른 고대의 존재가 흡
수해버릴 것이다.
‘시간이 없어.’
박동하는 심장을 바라보는 서준 의 시선이 묘한 빛으로 물들었다.
지독한 광기가 그의 뇌리를 강하게 자극하려 한다.
쩍-!
어느덧, 입을 벌려 심장을 향해 다가가는 서준의 눈이 붉게 물들 때였다.
“남의 것을 탐내면 안 되지.”
차가운 목소리, 가벼운 어조였지 만 그 무게감은 결코 얕지 않다.
그가 나타난 것만으로 세계가 뒤 엉키고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 으니 말이다.
“주샤콘!”
이를 아득 간 서준이 단박에 눈 앞의 존재를 인지했다.
“오랜만이군, 그리고 곧 영원한 안녕을 볼 수 있겠군.”
씩, 웃은 주샤콘의 어둠이 서준 을 뒤덮는다.
“끄아아악-!”
어둠에 휘감긴 서준의 비명 소리 가 홀러나오고 있던 순간이었다.
“하앗-!”
왕궁에 홀로 남겨두고 왔던 혁련 무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기제가 사라져 잔챙이밖에 남 지 않아서일까?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지원을 왔다.
사실, 이유 따위를 생각하고 있 을 겨를이 없었다.
이미 한계까지 밀어붙인 육신은 주샤콘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 너져 내린다.
서준이 힘겹게 잡고 있던 정신의
끈마저 끊어져버렸다.
불행 중 다행히도 쓰러진 서준을 대신하여 혁련무강이 주먹을 내뻗 으며 주샤콘의 거대한 어둠의 장막 을 때린다.
콰과광-!
폭음과 함께 그 장막을 꿰뚫고 쏘아진 주샤콘의 검붉은 회오리가 채찍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끼이이-!
광기에 물든 외침, 끔찍한 소리 와 함께 주샤콘의 회오리가 단숨에 혁련무강의 전신을 휘감았다.
“잔챙이 주제에 감히.”
육신을 찢어발길 듯하던 주샤콘 의 검은 회오리를 피하여 혁련무강 은 빠르게 검을 그어낸다.
“심검, 공간 절단.”
혁련무강 또한 웬만한 황제들과 엇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고대의 존재라 할 지라도 이런 가벼운 공격에 쉽게 무너질 만한 무인이 아니라는 것이 었다.
자연스레 혁련무강이 그어내는 검이 세계를 갈라낸다.
파지지직-!
매서운 기세로 쏘아지던 검은 회 오리들은 이내 전혀 다른 공간으로 전이되어버린다.
후웅-!
힘없는 바람 소리와 함께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검은 회오리를 확인한 혁련무강이 주샤콘을 향해 달려들 었다.
“잔챙이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제법 능력이 있구나.”
비릿한 미소를 홀린 주샤콘이 손 을 크게 휘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를 감싸고 있던 검붉은 회오리가 마치 촉수처
럼 변모하더니 혁련무강의 전신을 두들긴다.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 보거 라.”
콰과과광-!
허나 이어지는 검격으로 인해 그 무엇도 혁련무강의 몸에는 닿지 못 했다.
그사이, 폭발이 일으킨 자욱한 안개구름 사이로 빠르게 거리를 좁 혀낸 혁련무강이 주샤콘의 지척 거 리까지 당도한다.
하지만 주샤콘은 가벼운 동작으로 손을 내뻗어 사나운 혁련무강의
얼굴 정면부에 얹으며 차가운 미소 를 그린다.
꼼짝할 수 없게 사로잡힌 혁련무 강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린다.
“마침 아끼는 심복 하나를 잃어 서 짜증이 났는데, 네놈 정도면 제 법 쓸 만하겠구나, 광기에 물들거 라.”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주샤콘의 손에 사로잡힌 혁련무강의 육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한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