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권 24화
449화
“염치가 없는 것도 나를 닮은 듯 하구나.”
“원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거 아니겠습니까.”
“어찌 말을 하면 할수록 나만 손 해 보는 것 같구나, 그나저나……
잠시 말을 끊은 위지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파괴의 힘에 직격당한서준의 꼴 이 정말 말도 아닐 정도로 흉측했
다.
“저도 엄청 아팠습니다.”
그 시선을 느낀 서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싸우라고 했느냐.”
고개를 내젓는 위지강을 향해 웃 음을 보인 서준의 시선이 하늘 너 머, 우주를 바라본다.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고대의 존재들에게…… 그들이 누 굴 건드린 건지, 제가 얼마나 위험 한지 말이에요.”
“그래도 너무 무식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파괴의 힘에 부서지는 것 은 네 쪽이었을 거다.”
“먼저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거든 요.”
“이건 뭐 나보다도 더 무식한 놈 이군.”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웃음을 보 이는 위지강을 향해 자신 있는 미 소를 보인 서준이 자신이 끼고 있 는 수투를 가볍게 두드린다.
“게다가 치료할 자신도 있고요.”
고대의 힘을 다루는 주인이 남아 있었다면, 수투의 능력으로 완전히 회복하기는 힘들었을 거였다.
하나 힘의 주체라 할 수 있는 보 크루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덕분에 무결의 수투의 회복 능력 이 온전히 서준에게 발동된다.
우우웅-!
공명음과 함께 피어난 불빛이 빠 른 속도로 서준의 육신을 본래의 형태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면……
멀쩡해진 모습의 서준이 시선을 돌려 보크루그를 바라본다.
처음 서준의 공격에 직격당한 후, 눈이 뒤집혀 의식을 잃었던 보
크루그는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호 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보크루그.”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 은 없다.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든 상관없 었다.
어차피 보크루그는 모든 것을 잃 었다.
서준이 펼친 무극에는 걸어온 패 도와 혼돈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만물을 무릎 꿇리는 이 압도적인 혼돈의 패도에 직격당한 이상 보크 루그는 그저 평범한 혼돈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말 그대로, 그간 쌓아온 모든 것 을 잃었다.
보크루그의 입장에서는 죽음보다 처참한 심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롭겠지.’
하나 가족을 건드린 대가를 치렀 다고 보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분근착골이라도 한 방 먹여주고 싶은데……
지금의 정신, 몸 상태를 생각한 다면 지옥에 떨어진 것과 같은 기 분일 거다.
허나 애석하게도 이미 보크루그 의 신병을 위지강에게 넘겨준 상태 였다.
굳이 내뱉은 말을 물리면서까지 잔인한 복수를 할 필요는 없었다.
“뒤를 부탁하겠습니다.”
서준이 고개를 주억인 후, 쓰러 져 있는 서연과 위지율을 안고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고맙구나.”
뒤이어, 위지강이 웃으며 고개를 숙인 후 보크루그에게로 다가갔다.
위지강과 보크루그, 둘을 제외하
면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는 세계.
그곳에서 위지강이 제멋대로 날 뛰려는 거친 숨을 다잡아낸다.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고향 행성 을 파괴했던 고대의 존재 중 하나, 지독한 악연으로 이어진 탓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동료와 신 하들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 었던 소중했던 가족들의 끔찍했던 죽음이라는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눈앞 의 보크루그의 사지를 찢어발기고 싶었다.
허나 억눌러야 한다.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는 동료, 신하들을 위해서라도 감정에 사로 잡혀 지킬 수 있는 것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의식이 돌아왔음에도 고개를 들 지 못함은, 모든 것을 잃은 허탈함 인가?”
보크루그의 지척 거리에 당도한 위지강이 차갑게 운을 떼었다.
“……아니면 스스로가 벌였던 일 에 대한 복수의 두려움 때문인가?”
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크 루그를 내려다보았다.
과거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갔던 존재라고 보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설마 이제 와서 속죄를 할 생각 은 아니겠지?”
억누른 감정들이 계속해서 폭발 하려 하며, 목소리의 끝이 떨려온 다.
그런 위지강의 모습을 비웃기라 도 하듯 보크루그의 어깨가 들썩인 다.
“큭큭......
실제로도 보크루그는 웃음을 흘 렸다.
“크흐흐흐...
“웃지 말고 대답을……!”
“크하하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보크루그 가 광소를 터트렸다.
뱀도 혼돈인도 그렇다고 인간도 아닌, 기이하고도 흉측한 몰골을 한 그가 가늘어진 눈동자로 위지강 을 노려본다.
광소를 터뜨리고 있는 눈동자에 는 분노와 원한이라는 감정이 폭발 하듯 솟아났다.
“고대의 존재에게 속죄를 논하다
니, 정말 싸움밖에 아는 것이 없는 놈이구나……!”
거친 외침에는 힘이 있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수많 은 은하를 파멸시킨 고대의 존재 중 하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목소리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남은 것 은 목소리뿐이었다.
기세나 위엄은 전혀 존재치 않았다.
“어설프게 말을 돌려서 할 거 없 다, 위지강……, 너는 그저 잊혀져 버린 세계의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거 아닌가?”
“나에게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할 거다, 그냥 죽여라.”
“정말 살아있는 이들이 있나 보 군.”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할 것이 라 했을 텐데.”
“말해라!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이 냐!”
“위지강!”
무릎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키는 보크루그의 신형이 크게 휘청이며
바닥에 엎어졌다.
누적된 피로와 부상으로 인해 제 발로 대지를 딛고 설 수도 없었다.
“크흐흐흐..
바닥에 처박힌 채로, 흙모래를 입에 삼킨 보크루그가 웃음을 터트 렸다.
“죽여라. 잊혀진 세계의 존재여.”
“난 널 죽여줄 생각이 없다.”
고대의 존재들은 악의로 물든 존재들이 었다.
애초에 순순히 말해줄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이제는 잊혀져버린 세계를 기억 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목적은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고 말했 을 텐데?”
위지강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잊혀져버린 세계가 아직 존재했 다.
동료들과 신하들의 강함을 생각 한다면 아직 살아있을 확률이 농후 했다.
갇혀 있는 이들을 구원한다.
혹시나 하며 품고 있던, 오랜 세 월 염원했던 소망을 이룰 수 있다 는 것이다.
“너는 말하지 않아도 돼, 내가 직접 확인하고 마주할 거니까.”
위지강이 손을 내뻗는다.
손바닥에 넘실거리는 기운이 보 크루그의 머리를 통해 내부로 침투 한다.
“끄으으읍-!”
그렇지 않아도 나약해져있던 보 크루그의 육체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뒤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검은 입자가 되어 위지강의 육신으
로 빨려 들어온다.
“복종시켜주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 월 살아왔을 존재가 위지강의 힘에 무릎 꿇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위지강은 보크루그를 완 전히 굴복시키며, 그가 가지고 있 던 기억을 모두 읽어낸다.
애초에서준에게 부탁하며 보크 루그를 넘겨받은 것이 복종시키고 기억을 읽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위지강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보크루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어리석은.”
갈라지는 목소리, 마치 지옥의 괴물과 같은 끔찍한 음성에 위지강 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심연 또한 널 마주할 것이 다.”
경고인지, 저주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마지막 말을 남긴 보크루그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찾았다……
읽어 낸 보크루그의 기억을 더듬 고 있던 위지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고 고되었지만 드디어 한 발
자국 내디뎠다.
앞으로 더욱더 많은 고난이 있겠 지만 결국 나아갈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위지강은 무언 가에 도전하고 복종시키는 데 익숙 했다.
그렇기에 남은 적들을 직시한다.
‘이제부터가…… 내 복수의 시작 이다.’
위지강의 눈동자에는 강한 열망 이 피어나고 있었다.
*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너무나 많 았다.
리벨리온의 의장으로서 영국 총 리로 자넷을 지지, 갑작스러운 혼 돈인들의 침공으로 인한 피해, 서 연과 위지율의 몸 상태를 확인하는 일까지, 짧은 시간 자리를 비웠는 데도 처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서준은 그 모든 일들을 빠르게 처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계약이 있었다.
‘스승님의 세계를 되찾으러 가야 해.’
가장 효율적인 것은 의장 대리를 임명하는 것이다.
허나 모든 권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만큼 한 명에게 모든 것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팀을 만든다.’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면서도, 정 확하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색출해낸다.
생각을 했다면 실현하는 것은 그 리 어렵지 않았다.
불과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었다.
서준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일 인 만큼, 세계 각지에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이들이 곧장 지원을 자 처해왔기 때문이었다.
‘다소 급하게 결성한 느낌이 있 긴 하지만……
사람을 관리하고 배치하는 데 있 어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부의장, 강석호가 어느 정도 뒷수습을 해줄 것이다.
아마 입으로는 불평불만을 내뱉
으면서도 도맡아서 처리해줄 것이 다.
‘정말 큰 힘이 되어주고 있어.’
아주 오래 전 지구로 처음 귀환 했을 때부터, 현재에 이르러서까지 강석호의 존재감은 남다르다.
비록 한계에 부딪혀 무력적인 측 면은 다소 부족해졌지만 어찌 보자 면, 가장 유능한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서준은 업무적인 부분을 처리해 놓은 상태로, 고대의 존재와 벌였 던 전투에 대해서 다시 상기해보았다.
‘생각했던 것만큼 강했어.’
적당한 싸움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조금만 방심하더라도 패배를 맞 이하게 될 거다.
심지어 보크루그는 고대의 존재 중 최약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아직도 더 강한 적들이 많이 남 아있다는 것이다.
따지자면, 이제 갓 전쟁을 시작 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앞으로는 정말 말도 안 될 정도 로 힘들겠지.’
서준이 가장 바라는 것, 이 은하 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반 드시 싸워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물론, 마음먹는다면 혼자서야 어 떻게든 고대의 존재들을 피해 도망 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인 지구와 다른 차원들은 어쩌란 말인가?
더군다나 이제는 각 은하의 차원 이 연결된 상태다.
고대의 존재들이 다소 어렵지 않 게 침공을 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차원을 넘어온 고대의 존재들이 지구를 향해 힘을 쏟는다
면?
‘ 최악이겠군.’
때문에라도 위지강을 돕고 잊혀 져버린 은하를 되찾아내서 동료를 늘려야 한다.
고대의 존재들을 상대하기에 아 직 서준은 가진 힘도 부족했고, 당 장의 상황도 좋지 못했다.
더욱더 강한 힘을 얻고, 든든한 동료들을 모아서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어 낸다.
생각의 정리를 끝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서준은 위지강을 향해 찾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 은 기운과 함께 위지강이 알아서 방문을 해주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나 보 구나.”
“못난 제자가 스승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죄송합니다.”
서준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한 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고 위 지강이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생각과 달리 위 지강은 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입 을 열었다.
“그리 주눅들 거 없다, 추궁하러 이곳까지 온 게 아니니까 말이야.”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