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권 23화
448화
“결국 부순다는 것은 다를 바 없 는 거잖아.”
따지자면 보크루그의 힘은 과거 에 존재했던 기억의 시간과 공간을 부숴내는 힘을 다루는 것이다.
“이해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
보크루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흘 렸고, 서준 역시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 였다.
“애초에 완벽히 이해한 것도 아 니야.”
자그마치 과거라는 시간을 부수 기 위해서 보크루그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을까?
또한 그 당시의 기억이 묶여있는 공간을 부수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 나 많은 힘을 들여야 하는 걸까?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실제로도 서준은 전력을 다한다 할지라도 과거를 파괴해낼 수는 없 을 것이다.
“싸움에 자신이 있을 만하네.”
타격과 동시에 역사를 부숴내어 본래의 힘을 잃게 만든다는 것은 서준이 가진 근간을 부숴버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웬만한 주신들은 감히 싸울 엄두 조차 내지 못할 능력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놀란 건가?”
보크루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 가 흐른다.
과거의 역사를 부숴내는 것이 위 협적인 힘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허나 다른 고대의 존재들이 가진 힘들을 생각한다면 그리 위협적이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가진 힘은 파괴가 전부가 아니다.”
흠칫.
잠시 몸을 떤 서준의 입가로 웃 음이 흘렀다.
‘ 역시......
파괴의 힘을 다루는 것이 전부였 다면 고대의 존재라 불리지도 못했 을 터였다.
‘숨겨둔 수가 있다.’
보크루그가 가진 힘은 무엇일까?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서준은 머릿속을 비우고 다시금 자세를 취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과거부터 살아온 존재다.
어차피 예상하려 한다고 해서 떠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크루그 역시 몸을 낮추며 검을 서준에게로 겨누었다.
대화는 충분하다.
이제는 공방이 오갈 것이라 생각 하던 중, 보크루그가 물었다.
“나도 한 가지 묻고 싶군……. 혼돈의 힘은 어디서 손에 넣었지?”
“……위대한 존재의 조각이라는 것을 얻었어.”
서준의 짧은 답에 보크루그의 눈 동자가 빛난다.
“어쩌면…… 너와 나 모두 부질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 겠군……
먼 과거, 숭배자들의 소환에 응 한 고대의 신은 우주에 강림했었다.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자 신의 육신을 찢어내고 나눠주었다.
보크루그가 고대의 존재라는 명 칭으로 불리기 전에 일어난 전설처 럼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하나 그 전설의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고, 직접 보지 못했지만 단순히 이야기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없었던 이야기는 탄생할 수 없 다.’
조금은 와전될 수 있지만 없던 이야기가 탄생했을 리는 없었다.
당장 고대의 존재라 불리는 본인 들 또한 실존하고 있지 않은가?
“썩 유쾌하지 않지만, 어울리는 수밖에.”
어느덧, 보크루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기운의 형태가 변했다.
강렬했던 기세가 안개처럼 흐릿 해지고 있었다.
보크루그의 육신이 마치 안개처 럼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브의 존재들이여……
“분신술이야?”
일대에 흩어졌던 안개는 단숨에 보크루그의 형태가 되어 빚어진다.
한 명뿐이었던 보크루그가 단숨 에 다섯으로 늘어난다.
“네놈이 보고 다루던 것과는 전 혀 다를 거다, 이 힘은 내가 고대 의 존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
니...
“……정말 지독하네.”
서준은 다시금 인정할 수밖에 없 었다.
보크루그는 강적이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브의 존재들은 단순한 분신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일전에 보 았던 보크루그와 같은 힘을 품고 있었다.
과연 고대의 존재라 칭송받을 만 했다.
위지강의 도움으로 이만큼 성장
하지 않았다면 감히 손속을 나누어 볼 수 없었을 만큼 격이 다른 존재.
“하지만 결국 내가 이겨.”
서준은 위지강의 시선이 등 뒤를 좇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처음부터 지금 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실망시켜드릴 수는 없지.’
보크루그의 힘은 위협적이다.
하나, 숨겨둔 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보크루그뿐만이 아니었다.
‘혼돈기 개방.’
파지지직-!
폭발하는 혼돈기는 보크루그의 움직임을 모조리 잡아낸다.
쇄도해오는 보크루그를 예측해낸 서준은 여유로이 쏟아지는 공격들을 피해낸다.
그사이 서준의 지척 거리로 접근 해온 이브의 존재들에 다급히 발을 놀린다.
쾅-!
도망치고 있는 서준의 어깨를 꿰 뚫은 보크루그가 웃었다.
“그대만이 내 무공을 파악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지.”
움직임을 읽힌다면 닿지 못한다.
그리고 내뻗는 힘이 아무리 강력 하다 할지라도 닿지 못한다면 아무 런 의미가 없었다.
처음 서준의 까다로운 능력에 보 크루그 역시 당황했다.
하나 몇 번 겪고 나니, 약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피해낼 길이 없을 정도로 몰아 붙이면 그만이지.”
어깨에 꽂아 넣은 검에서부터 흘 러나오는 파괴의 힘을 서준의 육신 으로 흘려 낸 보크루그가 웃어 보
이며 디스트로이어를 일으킨다.
‘쌓아온 시간, 기억과 함께 모조 리 다 부서져라.’
파괴의 힘이 일어나며 과거를 부 숴낸다.
콰과과광-!
폭발이 서준의 전신을 휘감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모든 곳을 휘 감은 곳은 아니었다.
두 눈, 혼돈기가 폭발하듯이 샘 솟고 있는 눈동자 주변만큼은 보크 루그가 자랑하는 파괴의 힘이 닿지 못했다.
부서져가는 신형 속, 귀기 서린 눈을 마주한 보크루그가 저도 모르 게 몸을 홈칫- 떨었다.
분명 성공적인 공격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리 불안할까?
“난 너처럼 시공간을 부숴서 과 거의 역사를 파괴하는 건 하지 못 해, 애초에 내가 다루는 힘에 어울 리지 않는 능력이거든.”
서서히 부서져가는 육신에 사지 가 찢어발겨지는 아찔한 고통 속, 서준은 웃으며 몸에 힘을 주었다.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혼돈구에서부터 폭발한 혼돈기가 몰아치는
거센 바람, 회오리처럼 서준의 눈 동자를 기점으로 전신을 돌아 어깨 와 팔 그리고 다리까지 향한다.
“대신 나에게는 엄청나게 빠르고 강력한 무공들이 있어.”
몸을 떤 보크루그가 다급히 이브 의 존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허나 서준의 몸에 둘러진 혼돈기 가 가벼이 이브의 존재들을 막아선 다.
위험하다.
황급히 검을 뽑아내며 도망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보크루그의 움직임보다, 서준이
그 뒤를 쫓는 것이 빨랐으니 말이 다.
파괴의 힘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가속한다면 도망칠 수 있을지 몰랐 으나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보크루그가 가진 파괴의 힘은 서준의 어깨에 꽂힌 검에 모두 소모 되고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네 이놈……
서준이 당황하는 보크루그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래서 이런 한 방 싸움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어.”
파지직-!
부서져가는 과거의 시간들 때문 에서서히 무너지는 것으로 다소 기괴해진 서준의 얼굴이 보크루그 의 눈동자에 비친다.
번뜩이는 회색빛 눈동자가 기괴 한 웃음을 그렸다.
눈앞에서 느껴지는 공포에 보크 루그의 입으로 마른침이 삼켜진다.
“특히나 나처럼 이렇게 무식한 힘을 다루는 사람들을 보고 세간에서는 이렇게 칭하더라고.”
패왕(敗王), 마침내 서준의 주먹 이 초광속을 뛰어넘으며 폭주하듯 쏘아졌다.
콰앙-!
뻗어진 주먹을 가슴팍에 직격당 한 보크루그의 눈이 새하얗게 뒤집 혔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게 아니었다.
서준의 주먹에서 폭발한 혼돈기 가 솟아올라 보크루그의 내부를 마 구잡이로 뒤덮기 시작한다.
파괴처럼 단순히 부숴내는 것이 아니었다.
‘……잡아먹힌다.’
아니, 이건 본래의 자리를 찾아
가는 것뿐이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혼돈의 품 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랜 시간 쌓아왔던 모든 것, 고 대의 존재라는 역사까지. 단 일격 에 어렵사리 쌓아온 모든 것들이 사라진 그 충격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아무것 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느낌.
온몸을 진탕시키는 충격이 일어 나는 순간, 안개처럼 흩뿌려놓은 이브의 존재들도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이윽고 주먹이 닿은 반대
편, 등 뒤로 회색빛 거대한 주먹이 솟아오른다.
콰아아아—!
그 힘은 우주를 가로질러 한 줄 기의 빛줄기를 만들어낸다.
은하 너머, 우주의 끝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오연하게 지켜보고 있 는 이들에게 보란 듯 쏘아진 회색 빛 주먹이 이내 우주의 어둠에 뒤 섞이며 폭발을 일으키고 흩어진다.
“으아아아아-!”
괴성을 내지른 것은 보크루그가 아니었다.
그것은 저 은하 너머에서 지켜보
고 있는 이들에게 던지는 서준의 경고성이었다.
결국 무극에 닿았다.
누구라고 하여도, 두렵지 않다.
‘기다려라, 고대의 존재들.’
서준의 눈동자는 은하 너머에 몸 을 숨기고 있는 고대의 존재들에게 로 향했다.
파멸이라고 불리며 공포를 몰고 다니던 고대의 존재, 보크루그가 쓰러졌다.
혼돈의 세계에서는 흔하디흔하게 볼 수 있는 혼돈인의 모습이 되어 버린 그는 초라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는다.
털썩-.
자연스레 회색빛 용과 함께 바깥 으로 홀러나온 파괴의 힘이 요동친 다.
보크루그가 패배하며, 모든 것이 잡아먹혀버림으로써 갈 곳이 사라
진 파괴의 힘이 일대를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무수히 많은 충 돌로 인해 쇠약해진 우주의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새로운 육신을 찾고 있는 것이 다, 내버려둔다면 아마 높은 확률 로 다른 고대의 존재의 손아귀에 떨어지겠지.”
“취해둬야겠네요.”
서준이 다급히 손을 뻗어 낚아채 려 했지만, 곧장 위지강이 만류한 다.
“위험할 수도 있다, 네가 다룰
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전보 다 더 많은 부정들이 너를 지배하 려 할 것이다.”
“그래도 적의 손에 들어가는 건 막아야죠, 여차하면 체내에 봉인만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무리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 야 할 거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위지강 을 향해, 웃음을 보인 서준이 파괴 의 힘을 취해낸다.
“이제 마지막이네요.”
자연스레 서준의 차가운 시선이 보크루그에게로 향한다.
“……미안하지만, 보크루그를 내 가 처리하고 싶구나.”
이어진 말에서준의 눈가 끝이 살짝 떨렸다.
‘미안하다고?’
서준을 갑자기 공격을 했을 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한데 미안하다고 말한다.
지금에 와서 이 마무리에 끼어드 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 스 스로 알고 있다는 뜻일 터였다.
그럼에도 부탁했고, 때문에 사과 했다.
“제자의 공적을 빼앗아가려고 하 시는 겁니까?”
“염치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반 드시 묻고 싶은 것들이 있구나.”
간절한 위지강의 눈동자에서준 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대신 이걸로 빚은 없는 겁니 다.”
위지강은 무공 수련 외로도, 서준의 엄청난 성장을 도와주었다.
바로 혼돈기의 폭발적인 증가, 그것에 대한 빚이라는 뜻이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위지강의
입가에는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해준 것들에 비하자면 값 이 너무 싼 것 같구나.”
“원래 제자는 스승에게 조금 날 로 받아먹어도 되는 겁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