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권 21화
446화
글라키는 자연스레 뒷걸음질을 하며 거리를 벌린다.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지금 눈앞 에 있는 위지강은 무극의 경지에 올라있는 존재다.
실제로도 전력을 개방하고 있음 에도 위지강의 기세에 경계심이 잔 뜩 일어날 정도였으니, 헛된 소문 은 아니었다.
‘ 최악이군.’
이미 진즉에 도주한 심연의 거주 자, 적의를 강하게 표출하는 주샤 콘, 마지막으로 무극에 오른 위지 강의 출현까지.
기존의 계획이 완전히 뒤틀려버 렸다는 것이다.
눈을 흘겨 전장을 훑어본 글라키 는 빠르게 판단을 내려간다.
어차피 승산은 없다.
그렇다고 욕심이 많은 보크루그 가 정복왕의 사도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과욕을 부리다가 이 자리에서 죽게 되겠지.’
계약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게 된 다는 말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보크루그를 전력 으로 도울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은 그리 좋은 날이 아니군요.”
어색한 미소를 흘린 글라키의 촉 수들이 빠르게 움직인다.
허공에 피어난 마법진들이 글라 키의 신형을 휘감아낸다.
“훗날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 다.”
빛 무리와 함께 글라키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주샤콘, 네놈은 나와 싸울 생각 인가?”
“지금 내 목표는 빌어먹을 글라 키 놈이다.”
“그렇다면 썩 꺼져라.”
“허세 부리지 말거라, 위지강. 네 놈도 그리 상황이 좋지는 않을 텐 데?”
주샤콘의 시선이 위지강의 등 뒤,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위지 율에게로 향한다.
“지금 날 협박하려는 거야?”
위지강의 진한 살기에 주샤콘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발 물러선다.
“그럴 리가, 그저 스스로의 사정 도 정확히 알 때라는 거지.”
여기서 위지강과 싸움을 벌이게 된다면 글라키에게 복수하기는커녕 도리어 사냥당할 것이다.
“……지금은 물러나지만, 조만간 네놈의 목도 취하러 와주마.”
“그러면 그때가 네놈이 영멸을 맞이하는 날이겠구나.”
주고받은 말을 끝으로 주샤콘의 신형이 검은 회오리에 휘감기며 완 전히 자취를 감췄다.
“여기는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 군.”
이제 남은 것은 한 마리, 보크루 그뿐이다.
자연스레 위지강의 시선이 옮겨 졌다.
보크루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으킨 파괴의 힘, 어떠한 고대 의 힘보다도 강력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고대의 존재들도 전력 을 개방한 자신과 전면전을 벌이는 일은 없었으니, 단순한 망상은 아 니었다.
한데 눈앞의 사내, 한서준은 그 런 파과의 힘을 대단할 것도 없는 주먹질과 발길질로 맞서 싸워내고 있었다.
보크루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건 단순한 공격이 아니다.’
무예 (武藝) 다.
가볍게 흐르는 듯한 주먹질과 발 길질은 유(流)의 묘리를 따라 세계 선을 타고 흐르며, 그 뒤를 쫓으려 는 파괴의 힘을 농락한다.
그리고 주먹이 보크루그의 파괴 와 맞닿는 순간에는 드높은 경지의 패도(敗道)가 펼쳐진다.
분명, 파괴의 힘은 아니다.
허나 순간적인 폭발력은 보크루 그의 상상을 벗어나, 압도적이고 경이롭기까지 했다.
‘고작 백 년도 살지 못한 인간이 면서……
드넓은 우주에서도 손꼽히는 무 극에 다다른 존재들과 같은 무(武) 를 펼쳐낸다.
지금처럼 전력을 분산한 상태로 상대할 수 있을까?
보크루그는 잠시 시선을 돌리어 글라키를 바라본다.
‘역시나 도망을 치는군.’
계약은 파기되었다.
머지않아서 위지강마저 이 전선 에 합류를 할 것이다.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허나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정복왕의 사도.’
눈을 가늘게 뜬 보크루그가 서준 을 향해 달려들려던 순간이었다.
“욕심이 과하군.”
웃음을 보인 위지강이 보크루그 의 코앞으로 다가와 주먹을 내뻗는 다.
쾅-!
파괴가 다시 한번 폭발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더 이상 보 크루그의 신형이 남지 않았다.
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일렁이는 회색빛 기운이 타오르 는 보랏빛 파괴의 힘을 쫓는다.
“크읍-!”
보랏빛 기운은 허공에 떠올라 신 기루처럼 일렁이더니 다시 보크루 그의 형태를 취한다.
사실 마음먹는다면 서준은 보크 루그를 조금 더 몰아붙일 수도 있 었을 것이다.
하나 현재 서준은 완전히 탈진한 서연을 보호해야 하는 상태다.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서준의 시선이 자연스레 위지강을 향
한창 보크루그와 전투를 펼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서준은 저 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뭐하고 계시는 거지?”
보크루그는 분명히 강했다.
하지만 위지강에 비하자면 몇 수 는 모자라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지강 은 보크루그를 가벼이 압도하지 못 하고 있었다.
아니, 압도하지 않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여 자신처럼 쓰러진 동료를 걱 정되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위지강은 그 정도가 아니다.
누군가를 지키면서도, 보크루그 를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다.
머릿속에 계속해서 의문이 꼬리 를 물고 이어지고 있던 순간이었다.
“제자야, 이 스승님은 여기 있는 이, 뱀 머리가 제법 훌륭한 수련 상대라는 생각이 드는데 너는 어떠 냐‘?”
이제야 모든 것이 납득이 갔다.
서준은 흔쾌히 고개를 주억인다.
“제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오히려 좋았다.
감히 소중한 가족에게 손을 댄 놈이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 야 했다.
“뒤는 이 스승님이 맡아주도록 하마.”
보호하고 있던 서연의 몸 주변에 묵색의 기운이 둘러진다.
고대의 존재들이 기습을 가해온 다 할지라도 쉽게 깨지지 않을 보
호막이다.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 유가 없었다.
혼돈기를 폭발하듯 내뿜는다.
콰앙-!
폭음과 함께 윤기 있던 비늘들이 모두 찢겨져 나간 보크루그가 허공 을 빙글빙글 돌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서준을 노려보는 눈에는 분노가 가득하다.
“비겁한……!”
“원래 싸움은 이기는 게 장땡인
거야.”
코웃음을 친 서준이 그런 보크루 그의 앞에 섰다.
어느덧 위지강은 공격을 멈추고 그런 서준과 보크루그를 바라보기 만 한다.
“미리 말해주지만, 보크루그는 고대의 존재들 중에서도 가장 약하 다고 평가받는 놈이다.”
위지강은 서준에게 많은 가르침 을 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은하를 되찾아 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이 정도도 꺾지 못한다면 이 스
승님의 원한을 풀어주기는 힘들 거 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씩 웃어 보인 서준이 보크루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썩을 놈들……!”
보크루그의 입가로도 흉흉한 미 소가 흘렀다.
파괴의 힘을 이끌어내자 그의 주 변으로는 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리 며, 호위하듯 펼쳐진다.
불과 얼마 전의 서준으로서는 감 히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 도로 강력하다.
하나 지금은 분명히 달랐다.
서준은 위지강과의 수련을 통해 얻은 가르침들을 되새겼다.
앞서 위지강이 말했다시피, 보크 루그는 수련의 성과를 확인하기에 훌륭한 상대였으니 말이다.
‘우선은 기본기부터.’
내뻗는 일권, 그 안에 담긴 무의 묘리가 파괴의 힘이 쏘아 보낸 보 랏빛 섬광을 갈라내버린다.
쿠르릉-!
계속해서 보랏빛 섬광들이 쉴 새 없이 쏘아졌지만, 서준이 몸을 팽
이처럼 회전시키며 발끝을 허공에 긋자 쏘아지던 섬광들이 일제히 갈 라져 버린다.
콰광-!
무의 흐름을 타고 나아가 힘을 폭발시킨다.
동작 하나하나에는 본능적인 움 직임이 담겨있었다.
쏘아지는 보랏빛 섬광의 가장 약 한 부분을 정확하게 타격한다.
특별해 보일 것 없는 움직임이지 만, 어떠한 것보다도 무(武)에 적합 하다.
이 간단한 본능이자 움직임을 익
힘으로써 서준의 무는 이전에는 닿 지 못했던 경지로 완전히 발을 디 뎠다.
무극(武極), 무의 끝에 선 것이 다.
‘바라던 목표에 왔어.’
그토록 갈망하던 경지에 도달한 무가 쏘아지는 섬광들을 허무할 정 도로 가벼이 갈라버린다.
자연스레 보크루그의 눈동자에는 경악이 담겼다.
‘괴물 같은 놈.’
서준은 드넓은 우주에서도 규격 외, 이레귤러라고 불릴 수 있는 존
재였다.
불멸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 찰나, 짧은 시간 동안 있을 수 없 는 성장을 이루어냈다.
심지어 아직 전력을 꺼내든 것도 아님이 분명해 보였다.
당장 여기서 자리를 벗어난다 하여도 한서준이라는 비수는 결국 그 의 목을 조여 올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적이 많은데 새로 운 적이 생겼다는 것이다.
‘ 최악이군.’
가벼이 내뻗은 공격들이라지만 모조리 간파당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 이 순간에도 서준 은 계속해서 성장해가고 있었다.
하나 아직 승부가 판가름 난 것 은 아니었다.
‘놈이 받아칠 수 없는 힘으로……. 확실하게 죽인다.’
장기전으로 가면 필패다.
다시 한번 허무하게 갈라지는 섬 광을 보며 보크루그의 주먹이 빠르 게 내뻗어진다.
쾅-!
짧은 떨림과 함께 폭발한 기운이 단숨에서준의 권기를 갈라버린다.
동시에 자신의 입으로 손을 내뻗 어 두 개의 송곳니를 뽑아낸다.
푸슉-!
입가에 흐르는 피를 훔쳐낸 보크 루그가 송곳니를 양 손에 들고 정 면, 서준을 향해 겨누자 삽시간에 검의 형상으로 뒤바뀐다.
“이제야 제대로 해볼 마음이 생 겼나 보네?”
그간 파고의 힘만을 쏘아내던 보 크루그가 처음으로 무기를 뽑아 들 었다.
헤아릴 수도 없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전투에 대한 지식 또
한 상당할 것이다.
‘본신인 고대의 존재와의 싸움.’
기대와 홍분이 서준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볼 만한 상대를 만났 다는 생각에 미소마저 흘러나올 정 도였다.
“위지강!”
창을 앞으로 내세운 보크루그가 목소리를 드높였다.
허공 위, 뒷짐을 진 채로 구경하 고 있는 위지강이 고개를 갸웃거린 다.
“분명 무의 규율을 따른다고 들 었다!”
위지강의 입가로 헛웃음이 흘렀 다.
“그래서?”
“만약 내가 이 싸움에서 승리한 다면 승자로서의 대우를 하며, 나 를 살려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그건 정식적인 대련일 때의 이 야기지…… 이건 목숨을 건 싸움, 생사결이잖아.”
“……그렇다면 그냥 죽여라.”
아무런 생각 없이 목숨을 내놓은
게 아니었다.
‘놈들이 원하는 건 나를 양분 삼 아 성장하는 것이다.’
이게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기서 한서준을 이겨낸다 할지 라도 위지강을 감당해낼 수 있을 까?
‘불가능해.’
심지어 앞선 대화를 통해 보건 대, 위지강은 한서준을 제자로서 받아들인 상태였다.
오히려 큰 분노를 발산하며 달려 들 것이다.
이기든 지든 죽음을 맞이하게 된 다는 것이다.
때문에 다소 되도 않는 제안을 한 것이다.
받아주고, 말고는 어차피 위지강 의 몫이다.
“뭐, 특별히 받아주지.”
다행히도 위지강이 고개를 주억 인다.
보크루그의 입가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착각하지 마, 네놈이 수련상대 가 되지 않아줄까 봐, 걱정해서 그
런 게 아니니까.”
위지강의 믿음직한 시선이 여유 로운 미소를 보이고 있는 서준의 얼굴을 향했다.
자신의 싸움을 걸고 되도 않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음에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저 제자가 진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위지강은 다시 한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겨 봐, 할 수 있다면.”
“약속을 한 것, 후회하게 될 걸
세.”
보크루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